외전 53화. 단단한 줄 (3)
이천상이 돌아간 뒤.
“…….”
혼자 남아 멍하니 창밖을 보던 양백호는 문득 탁자에 올려진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찻잔을 주시하던 그가 찻주전자를 가져와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후욱!
불은 필요하지 않았다. 강력한 열기로 치환해 물을 데우는 것은 초절정고수인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끓인 물을 식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상마진화(上魔眞火), 무림에서 말하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경지에 올랐다면 빠르게 식히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화경(化境)에 이른 절대고수의 전유물이었다.
음공(陰功) 계열의 마공을 익혔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공을 연성한 마인이 화경에 이르지 않고 고온의 내력을 발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 그런 거지.’
무인에게 화경, 극마의 경지란 무도(武道)의 완성을 뜻한다.
그 너머의 경지도 존재는 하나, 사실상 불가능한 경지이니 무인 대부분은 화경, 혹은 극마를 마지막 목표로 잡고 수련에 매진한다.
‘극에 이르지 못한 자는 반드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한낱 무인의 경지도 그러할진대.’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다 보면, 반드시 하나를 취하면서 하나는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양백호도 그러했다.
군문에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약한 국력에 모리배 천지라 승진은커녕 황야의 텁텁한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다.
승진에 목을 매는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화가 난 것은 명확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위정자들의 탐욕이었다.
지닌 무력만 보면 제국의 오천인장까지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백호장으로 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모든 걸 그만두고 혈혈단신 무림으로 향했다.
간신배들의 정치질에 넌더리가 났다. 더 큰 자유를 느끼고도 싶었다.
그러나 무림의 사정도 제국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이다. 화선지 위에 색을 칠하는 위정자들의 타락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리고 제국처럼, 무림 역시 타락한 이들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적었다.
기대했고 실망했고 체념했다. 그렇게 천하를 돌고 돌다가 결국 천마신교에 입교하였다.
무림이 악이라고 부르짖는 곳이었지만, 정작 중원에 나온 마인들은 정파 무림인들에게 기를 못 펴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보았을 때, 학살당하는 마인들 중에는 순박한 이도 있었고 호협에 가까운 성정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무엇도 미리 판단하지 않겠다. 그러한 심정으로 홀린 듯 신교에 들어왔다.
그렇게 오늘을 맞이했다.
천마신교 역시 다른 색을 지닌, 그간 겪었던 많은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서글픈 깨달음을 안은 채.
쪼르르르.
가루 낸 찻잎이 든 잔에 적당히 식은 물을 붓는 양백호의 얼굴은 무심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김. 향이 좋았다.
양백호는 연녹빛으로 물든 차를 내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안정되는 색이었다. 그러나 그 찻잔에 비친 얼굴은, 편안하고 싱그러운 찻물에 어울리지 않게 냉담해 보이기만 했다.
“…….”
한참 동안 차를 내려다보던 양백호가 일순 잔을 들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째앵!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밖에 있느냐?”
“예.”
“부령주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반 시진 후.
“어, 부르셨습니까?”
집무실로 들어오는 장무병의 얼굴은 꽤 불콰해져 있었다.
양백호의 눈이 깊어졌다.
“술을 마셨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부관들 긴장 좀 풀어 주려고요.”
뻔했다. 말이 긴장이지 기녀를 끼고 술판이나 벌여 제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분 냄새가 진했다.
게다가, 어떤 주루든 장무병의 신법이라면 이각도 안 되어 도착해야 정상이었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올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직책만 아래일 뿐, 네 명령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훈련을 닷새 뒤로 미룰 걸세.”
“예?”
장무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닷새 뒤 말입니까?”
“그렇다네.”
“하지만 상부에서…….”
“령주인 내가 내린 결정일세. 자네가 고민할 건 아니지.”
장무병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찝찝하다는 얼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닷새나 더 개인 시간이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희희낙락하는 기색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하는 그를 가만히 보던 양백호가 말없이 혀를 찼다.
장무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상관 앞에 주기(酒氣)도 뽑지 않고 온 것까지야 좋게 넘어가 줄 수 있지만, 놀 시간 늘어났다고 단박에 헤벌쭉해지는 낯짝 정도는 관리하는 게 좋을 텐데.”
“…….”
더더욱 굳어지는 장무병의 얼굴.
애써 주기를 뽑지 않아서일까? 그는 한층 솔직해지기로 한 것 같았다.
“업무 시간이 아닌데도 별거 아닌 일로 부르신 것은 령주님이셨습니다.”
“업무 시간?”
“그렇습니다.”
“업무 시간은 누가 정해 줬나?”
“물론…….”
“내가 줬던가? 아니면 자네가?”
“…….”
장무병은 말이 없었다.
군사부 백뇌각 소속이었다면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꽤 명석할 텐데, 장무병에게는 그런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실제 입각했을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취기가 과해서일까.
장무병은 자꾸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다.
“내일 말씀하셔도 괜찮았을 사안 아닙니까?”
“내일?”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령주님께서 하시지 못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관들 관리가 그것이지요.”
“…….”
“아랫것들이란 적당히 풀어 주고 조일 때 확 조여야 말을 듣는 법입니다. 령주님께서는 그런 걸 못 하시잖습니까?”
가만히 장무병을 보던 양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거 보십시오. 령주님께서 보시기에 노는 것 같지만 저도 나름대로…….”
“너무 풀어 줬어, 자네를.”
“예?”
한옆으로 걸어간 양백호가 벽에 기대 놓은 대검을 들었다.
스르릉.
검갑에서 뽑혀 나온 대검이 소름 끼치는 검음(劍音)을 토했다.
장무병의 안색이 돌변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짓?”
“……?!”
“정비 기간을 늘리지 않았다면 당장 훈련이 코앞인 시점에 관리란 명목으로 기녀 끼고 술이나 마시고.”
“……!!”
“상관 호출에 주기도 배출 안 해, 상관 말에 바득바득 대들기나 하지, 와중에 같잖은 충고까지.”
우우우우웅.
양백호의 검에서 불그스름한 마기가 일렁였다.
“내가 자네를 즉결 처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분위기기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상황이 이쯤 되면, 제아무리 장무병이라도 섬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령주님! 잠시 제 말을 들어 보십……!”
번쩍!
순간 장무병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어느새 양백호의 대검이 그의 어깨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양백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주둥이에서 뽑아내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해야 할 걸세.”
“……!!”
“기녀 끼고 술판 벌이면서 부관들 관리한다는 거, 그거 정말 효과가 있나?”
“려, 령주님!”
“조금만 더 신중해지길 권고하네. 질문에 제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오랜만에 뽑은 이 도축용 칼이 어떻게 움직일지 나도 장담할 수 없네.”
양백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두 눈에는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령관사는 물론 사령부 전체를 불태울 것 같은 끔찍한 마기의 불꽃이었다.
장무병이 침을 삼켰다.
“다시 묻지. 그 짓거리가 부관들 관리에 효과가 있나?”
“기, 긴장한 부관들의 심신을 적당히…….”
“효과가 있나? 없나?”
목덜미가 따끔했다.
위협적인 마기가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 버릴 것처럼 넘실거린다. 어깨 위에 수십 마리의 독사가 입을 벌리고 똬리를 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무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없습니다!”
“그랬구만. 효과가 전혀 없었군. 한데 자네는 왜 내 앞에서, 부관들 관리 운운하며 건방을 떨었는가?”
“그것은……!”
“왜? 자소대마 장로님의 사생아 문제로 자네의 불충함도 묻어 둘 수 있을 거라 확신했나?”
“……!!”
“뒤 봐주는 사람이 많은 것 같군. 한데 지금 이곳에, 내 칼을 멈추게 해 줄 만한 뒷배가 있나?”
장무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양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성이라고는 자네 양심만큼도 없는 그따위 말 한마디로 상관 모독, 하극상에 대한 벌을 회수할 수 있을까?”
생각하길 포기했을 때라면 몰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판이다. 이럴 때의 장무병은 누구보다도 행동이 빨랐다.
그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령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양백호가 차가운 눈으로 장무병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등판에다 대검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밖에 있는가?”
“예, 예!”
“부관들을 불러라. 일각 안에 오지 않으면 모조리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전해.”
“예!”
“그리고 부관들이 돌아오면, 사령부 정문을 통제한다. 그 시간 이후 닷새 동안 누구의 출입도 허가하지 않는다.”
콱!
대검이 장무병의 얼굴 옆 땅에 박혔다.
천천히 쪼그려 앉은 양백호가 장무병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내가 좀 무기력했네. 혼란스러웠지. 그래서 나 자신을 잃고 방황했다네.”
“……!”
“이제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야. 내가 언제부터 너희 같은 잡놈들 협잡질에 고분고분 고개를 조아렸던가, 생각해 봤는데 그런 적이 없었더라고. 무시한 적은 있어도 말이야.”
“……령주님!”
“백 년을 더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제대로 된 내일을 살아가지 못할 것을.”
“…….”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 나도 다시 목숨을 걸어 볼까 하네.”
양백호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그 목숨을 걸어 보겠나?”
장무병은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벌벌 떨었다.
* * *
“빌어먹을 새끼.”
동이 트기 전까지 일 호에 머물렀던 연치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어디로 튄 거야? 이 개 같은 놈, 오늘 아주 찢어 죽여 버려야 했는데.”
아무도 없는 걸 보니 같은 방 식구와 술이라도 마시러 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술집까지 뒤져 가며 찾아서 족칠 수는 없었다. 부대 내에서라면 상관없지만, 부대 밖은 보는 눈이 많았다.
물론 부대 밖에서 죽인다 한들 충분히 수습될 것이다. 다만 그 노친네가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연치상이 하품을 쩍 했다.
“개만도 못한 새끼 때문에 잠도 못 잤네, 시발.”
그놈 하나 때문에 버린 시간을 생각하니 또 한 번 짜증이 났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죽여 버릴 테니까.”
이를 득득 갈며 일 호를 나선 그가 제 방에 당도했다.
끼이익!
거칠게 문을 여는데도 두 마인들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연치상은 불현듯 짜증이 일었다.
“이 미친 새끼들은 잘도 처자네. 야, 이 개새……!”
그때였다.
툭!
‘억?!’
순간 온몸이 마비되었다. 연치상은 걷던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쿵! 끼이이익!
그와 거의 동시에 방문이 닫혔다.
“뭐, 뭐야?”
“늦었군.”
뻣뻣해진 등을 타고 스멀스멀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무심한 목소리.
연치상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점혈법을 배워 왔다.”
“너, 너?!”
“아직 능숙하지 못해서 표본이 필요해.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