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4화. 단단한 줄 (4)
야차사령부의 부대 정비 시간이 늘어났다.
그 말은 각 부관에 의해 전달되었다. 누구는 개인 시간이 많아진 걸 반겼고, 누구는 차라리 훈련이 낫겠다며 투덜댔다. 어쨌거나 명령이니 달리 선택권은 없었다. 야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비에 돌입했다.
다만 사령부의 정문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술을 마시거나 맛난 밥을 먹으러 외출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부대 내에 구비된 전투 식량을 주식 삼아서 수련하거나 쉬는 것이 전부였다.
누구는 지루해하고, 누구는 잘됐다며 수련에 몰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며 침상에 붙어 늘어지게 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옆 건물 마인들과 친분을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때로는 충실하게, 때로는 허무하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의 시간만큼은 어떻게도 잘 굴러가지 않고 있었다.
* * *
“허억!!”
정신을 차린 연치상이 숨을 헐떡거렸다.
‘뭐야?’
눈이 아팠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연치상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은 물론 사지 전체가 굳어서 감각이 없었다.
마치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듯했지만, 부유감 없이 기분 나쁜 오한만이 느껴졌다.
“이게 뭐…… 콜록콜록!”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폐 속에 거미가 들어가 집을 지어 놓은 것 같은 기분. 숨쉬기가 갑갑하고 어딘지 모르게 끈적했다.
연치상은 다급히 마기를 운용했다.
그때였다.
“컥!”
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이 오장육부 전체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다. 이가 잔뜩 나간 거친 칼로 배 여기저기가 그어지는 고통,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기해혈(氣海穴)이 봉쇄되었다.”
끔찍한 고통에 덜덜 떨던 연치상의 몸이 뚝! 멈추었다.
“확실히 섬세한 작업이더군. 극히 미세한 조절만으로 반 각에서 일각까지의 시간이 조정될 수 있고, 반 치 깊이로 죽음이냐 병신이냐가 결정되기도 하는군.”
“누, 누구야?”
“마기를 끌어 올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점혈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갔기 때문에, 단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강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너?!”
“반의반 치만 더 들어갔어도 단전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역시 아직 미숙해.”
연치상이 눈을 번쩍 떴다.
강한 햇빛 탓에 눈이 부시다 못해 아팠지만, 햇빛 옆에 선 음영 진 얼굴만으로도 상대를 식별할 수 있었다.
연치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 이 새끼!”
비록 목소리는 이번에도 개미가 기어가는 양 작았지만, 분노와 살의만큼은 넉넉히 잘 담겨 있었다.
“여긴 어디야? 니 새끼가 감히 날 여기에……!”
“다음은 여긴가.”
순간 연치상이 입을 떡 벌렸다.
팔꿈치가 생으로 파열된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불시에 닥친 그 고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순식간에 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장이 꾸루룩 소리를 내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대소변을 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곡지혈(曲池穴). 한 치 깊이로 누르면 소화 대사를 증진할 수 있지만, 그보다 깊어지면 팔이 마비된다. 혈(穴)과 이어지는 신경이 워낙 많기 때문에 마기를 퍼트리기만 해도 극단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소화 대사에 영향을 주는 혈인 만큼 극히 세심한 힘 조절로 장을 막히게 하거나, 반대로 활발히 만들 수 있다.”
연치상이 숨을 헐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천상의 목소리는 단조롭기만 했다.
“이건 꽤 유용하군. 싸움 중에 써먹을 수 있겠어.”
“쉽지 않을걸.”
순간 연치상이 숨을 멈추었다.
이천상 외에, 누군가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점혈의 세계는 무척이나 깊고 방대해. 하지만 점혈의 고수가 천하제일인이 된 예는 없었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글쎄.”
“이유는 간단해. 상대의 내공력이 나와 비슷하기만 해도 내공력으로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이야.”
“그렇군.”
“내력이 실리지 않은 착점은 지압에 불과해. 심지어 초절정고수가 되면 인간 본연의 점혈 중 절반 이상이 통하지 않고, 극마에 이르면 반쯤 무혈지체(無穴之體)라고 봐도 무방해.”
“극마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누가 점혈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통하지 않을 거야.”
“이놈의 내공은 절정고수 이상이다. 그런데도 당했다는 건…….”
“양보다는 질이 우선이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쉽게 쓰러져 버렸어. 둘 중 하나겠지. 네 점혈이 강했든지, 아니면 마공의 특성 때문이든지.”
“마공의 특성?”
“폭발적인 힘을 내는 기공은 평소에 느슨함을 고수하지. 나만 해도 의식하지 않아도 기습적인 점혈을 어느 정도 막아 낼 만큼의 내력이 몸을 돌고 있어. 너도 그럴걸?”
“그래, 그렇군.”
“근데 이놈의 마공은 그게 안 되고 있어.”
“왜지?”
“나야 모르지. 다만 자소대마 장로님의 폭혈마공이라면…… 잘은 모르겠지만, 혈도가 충분히 연마되지 않은 이상 그처럼 거친 마기가 평소에도 몸을 휘젓고 있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통일 거야.”
“……?”
“방비가 안 된 놈의 마혈을 그리 강하게 짚었으니 반나절 동안 기절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이보다 수준 낮은 놈이었으면 그 한 방으로 병신이 됐을 거다.”
“그랬군.”
연치상은 자신을 요모조모 분석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쉴 새 없이 눈을 굴렸다.
이천상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못마땅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반갑기까지 했다. 적어도 감정이 느껴지기는 하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내공 특성까지 간파해 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폭혈마공은 마기가 워낙 강하고 거칠어서 혈도가 연마되지 않으면 제힘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칠 성(七成)에 이르기 전까지는 하루에 반나절은 운공으로 보내야 했다. 마기를 지속적으로 운용하여 혈도 자체를 단련시키고, 그만한 출력을 뒷받침하도록 통제력까지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치상은 그 단련을 소홀히 하였다. 하루하루 너무 고통스럽기도 했거니와, 영약으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어서였다.
한데 이런 단점이 있을 줄이야.
“어쨌거나 네 점혈이 먹혀든 것도 반쯤은 운이라고 할 수 있어. 이놈이 제대로 단련했다면 순식간에 풀렸을 테니까.”
“그 잠깐의 시간으로 충분했을 거다.”
“재미있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냐?”
“사실을 말함이다.”
“잘나셨어.”
“다음 공부에 들어가도록 하지. 다음은 천돌혈(天突穴)이다.”
“거기도 꽤 위험한데. 힘 조절 잘해라, 너.”
“걱정하지 마라.”
연치상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자, 잠깐!”
여전히 목소리는 가여울 만큼 작았지만, 다급함만은 제대로 실렸다.
“너 이 새끼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지금 내 몸에……!”
“넌 어차피 죽는다.”
“뭐, 뭐라고?!”
이천상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
“그 전에 네 몸을 이용해 얻을 지식이 있다. 이 일이 끝나고 죽일 테니 얌전히 있도록.”
“미, 미친 새끼! 날 죽이겠다고? 이 연치상을 죽여?”
“입 다물어라.”
“너네 제정신이냐?! 날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내 아버지가 누구인 줄은 아는……!”
순간 연치상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빗장뼈부터 목, 안면에 이르기까지 순간적으로 마비가 왔다가 강한 통증이 일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쪽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고 펴지길 반복했다.
“잘못 짚었나?”
“딱 보면 알 거 아냐? 내력을 삼 푼 정도 줄여. 이번에도 위험했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숨통이 끊어졌을 거다.”
“알겠다.”
연치상이 재빨리 말했다.
“기, 기다려 봐! 잠깐만 기다……!”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그의 눈이 홱 뒤집혔다. 부르르 떠는 몸, 누가 봐도 이상한 상태였다.
“제대로 짚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대로 짚긴 했는데, 네 마기가 너무 공격적이었어. 같은 힘으로도 기의 성질에 따라 결과가 달라. 그래서 점혈법은 대성하기 어렵지.”
“꽤 복잡하군.”
“복잡하지. 점혈법은 극단적으로 세심한 공부다. 그를 위해서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자신의 진기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해. 힘 조절은 물론 기의 밀도까지도.”
“지금으로선 대성은 요원한가.”
“백 년이 지나도 대성하기 어려울 거다.”
두 사람은 연치상의 상태 따윈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의 반응을 관찰했다.
어떨 때는 팔이 마비가 되었고, 어떨 때는 다리 한쪽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점혈을 짚다가 신경을 잘못 건드려 분변이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천상은 멈추지 않았고 허필은 한 번씩 한숨을 쉬거나 눈살을 찌푸리길 반복했다.
그렇다면 연치상은?
연치상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공포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
차라리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면 오기라도 생겼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목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몸의 반응만 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연치상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입을 벌릴 수 있을 때면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했다. 협박도 했고, 욕도 했다.
당연히 두 사람은 그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허필은 더욱 열성적으로 이천상을 가르쳤고, 연치상에게 돌아오는 건 몇 배는 더 끔찍한 공포와 고통이었다.
그렇게 다시 반나절이 지났다.
“자, 이렇게까지가 기본이야. 더 세밀하게 들어가자면 외우는 것만으로 한 달은 더 걸릴 거다.”
“엄청난 양이군.”
“나도 어릴 때 배워서 그렇지, 나이 들고 배우려고 했다면 못 했을 거다. 그러니 너도 적당히 해라.”
“신경 꺼라.”
“말 참 예쁘게 하네. 그나저나…….”
허필이 떨떠름한 눈으로 연치상을 바라보았다.
“이 물건 이거, 진짜 괜찮은 거냐?”
연치상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호흡도 어려운지 학학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중병에 걸린 병자를 보는 듯했다.
한쪽 눈은 신경이 다쳐 색을 잃었고,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두뇌 쪽 혈을 잘못 건드려서 생긴 폐해였다.
“사, 살려 줘.”
일각 전부터, 연치상은 힘없는 목소리로 그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혈이 손상되어서 이전보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살아도 본래의 목소리를 되찾지는 못할 것이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상이 연치상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넘어가서 눈은 부시지 않았다. 하지만 한쪽 시력을 잃은 데다가 극단적인 공포와 고통에 탈진해 버린 연치상은 더 이상 이천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이천상이 다시 쪼그려 앉았다.
“살고 싶으냐?”
“살려 줘…… 제발…….”
“그렇게 말하면 안 될 텐데.”
“제, 제발…….”
“빨리 죽여 달라고 해야 될 텐데.”
“……?!”
“편히 죽고 싶은가? 아니면 네 정신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이 일이 지속되기를 바라나?”
연치상의 외눈에서 실낱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악인의 눈물이다. 이천상의 눈은 여전히 무심했다.
“나는 더 얻어 가고 싶은 게 있다.”
“예, 예?!”
“폭혈마공의 구결을 불러라. 그럼 편히 죽여 주겠다.”
“……!!”
“싫다면, 그것도 괜찮다. 복습은 언제나 중요하지.”
연치상의 얼굴에 절망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