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5화. 단단한 줄 (5)
“이번에는 제대로 짚었나?”
“……그런 것 같군.”
의식을 잃은 연치상의 호흡은 무척이나 가늘었다.
기가 활발하진 않지만, 단전이 부서진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았다. 몸은 많이 망가졌으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연치상에게는 혼혈을 짚여 기절한 지금 상태가 좋을 것이다. 더 깨어 있었다가는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테니까.
“너.”
“말해라.”
허필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폭혈마공을 뺏으려고 이놈을 노린 거냐?”
“폭혈마공은 전리품에 불과하다. 말했을 텐데?”
“전리품치고는 너무 크고 위험하지 않냐? 알아도 함부로 익힐 수 없어. 걸리면 작살날 테니까.”
“배울 생각은 있어도 익힐 생각은 없다.”
“……그게 그거 아니냐?”
“다르다.”
허필은 뭐가 다르냐고 묻지 않았다. 눈앞의 이 목각 인형보다도 딱딱한 놈을 이해하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배우건 익히건 네 마음대로겠지만, 이놈이 제대로 된 구결을 알려 줬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어차피 죽을 거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구결을 꼬았을 줄 누가 아냐?”
“능력이 좋군.”
“뭐?”
“구결을 꼬아서 줄 거라는 생각은 아무나 못 하지. 네게 그 정도 능력이 있으니 그런 생각도 하는 거 아닌가.”
“……!”
허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마냥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이나 생각이 그대로 읽히는 것 같아 외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좀 멍청하다.”
“……왜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허필을 보는 이천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일부러 이놈에게 세 번이나 구결을 읊으라고 했다. 같이 들었을 텐데?”
“그런데?”
“직접 들었으니 알 것이다. 구결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순간 허필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걸 듣자마자 다 외웠다고?’
폭혈마공의 구결은 어지간한 마공 네다섯 개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이 망나니 같은 놈이 그 많은 구결을 잘도 외웠구나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걸 한 번 듣고 다 외울 수는 없다. 허필 역시 세 번이나 집중해서 들었지만, 부분 부분을 기억할 뿐 절반은 기억에도 없었다. 기억하는 구결 중에도 헷갈리는 게 태반이었다.
“죽음 앞에 독기를 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걸 알면서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
“이놈은 후자다.”
허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감정 없는 퍼런 눈으로 연치상을 내려다보는 이천상의 모습이, 정말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정말 정체가 뭘까.’
이놈을 볼 때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꾸 드는 생각이었다.
이모저모 따져 봐도 도통 마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파의 샌님들 같지도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유형. 이제 와서는 정말 사람이기는 한지도 모르겠다.
이천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 시진은 더 기다려야겠군.’
하늘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완전한 밤은 아직이다.
“먼저 들어가라.”
“왜?”
“처리할 일이 있다.”
허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 죽이고 묻을 생각이냐?”
“내가 죽이진 않는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허필이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천상이 힐끗 돌아보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 야차 중에 이 머저리 죽일 놈이 어디 있어? 네가 안 죽이면 령주님밖에 없겠지.”
“그렇다.”
이미 양백호의 허가를 받은 사안이라고 말해 두었기에 거기까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놈 이 꼴로 만든 걸 지켜본 것만으로도 공범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령부에서 편하게 살려면 나도 대장한테 눈도장이나마 찍어야겠지.”
“마음대로 해라.”
팔짱을 낀 이천상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날 왜 믿었냐?”
뜬금없는 질문에도 이천상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나는 아직 널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 왜 이놈 족치는데 나까지 데려왔지? 보아하니 주연교라는 여자랑 친한 것 같은데, 그 여자한테 부탁하면 될 일 아닌가?”
“주연교는 상식적인 점혈법 그 이상은 모른다. 너는 점혈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으로 널 택했다.”
허필의 눈이 깊어졌다.
“만약 내가 이 사실을 바깥에 알리려 든다면?”
“…….”
“네가 그 생각을 못 했을 리 없다. 그랬다면 머리깨나 아팠을 텐데?”
“사령부의 정문을 막아 두었다. 령주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이니 누구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물론 그렇지. 하지만 벗어나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아니, 못 한다.”
“왜?”
“내가 널 죽일 테니까.”
“……!”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이 진심을 가득 담은 말보다도 명백한 진실성을 보장한다는 걸, 정말 절절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허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려울 것 같다.”
“…….”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이천상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심심한 게 아니라면 지금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뭐?”
“정말 그게 궁금하면 목숨을 걸어 보면 되고, 아니라면 굳이 할 대화는 아니다. 어쨌든 넌 함께했고, 그로써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거나 호승심을 느낀다면, 나중에 한판 붙자고 하면 그만이다.”
쓸데없이 열 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허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마인으로서 저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화가 나는 게 정상이다. 아니, 마인이 아니라 실력에 자신이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허필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상대는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는데, 자꾸 이쪽에서 상대를 자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놈 말마따나 사실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증명할 수 있는 온건한 방법을 시도하면 된다.
“젠장, 너랑 대화하면 정말 진 빠지는 기분이야. 아냐?”
“알 바 아니다.”
“잘나셨어.”
투덜대던 허필이 넌지시 물었다.
“궁금하지는 않냐?”
“무엇이?”
“난 똑똑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어. 이 사태에 끼는 건 위험 부담이 커. 그런데도 이곳에 왔다.”
“…….”
“왜 그랬는지 궁금하진 않았냐.”
“별로.”
“그러냐.”
“함께한다면 지켜보고, 일을 망치려 든다면 죽인다. 그럴듯한 신뢰가 없으니 너의 인생도, 판단도 굳이 궁금하지 않다.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야.”
허필이 허탈하게 웃었다.
“인생 참 명쾌하게도 사는 놈이구만.”
뭔가 두 손 두 발 드는 기분이었다. 대화만으로도 맥이 빠지는 기분, 하지만 묘하게 마음은 차분했다.
짧은 각자의 시간이 흐른 끝에, 어느덧 완전한 밤이 찾아왔다.
“됐군.”
이천상이 연치상을 어깨에 걸쳤다.
“가지.”
“명령하듯 말하지 마.”
“난 조장이고 넌 조원이다.”
“목숨 거는 데 조장이고 조원이고 없어. 그리고 아직 훈련 시작도 안 했다.”
“야차들 동태나 제대로 살펴라. 연치상을 들고 가는 것, 걸려서 좋을 거 없다.”
“어차피 사라질 놈인데 뭘.”
“…….”
“알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리고 너 눈 좀 깜빡여라. 소름 돋는다.”
“좋아.”
“하나만 더 묻자.”
“짧게 해라.”
“바르지 못한 일을 바로잡는다고 했다. 이게 웬 정파 샌님들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싶었지만, 넌 정말 그럴 생각인 모양이군.”
“…….”
“사령부에서 빠져나가 윗선에 알리려는 내 행동이 죽을죄는 아닐 텐데?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거, 그것도 올바른 일이냐?”
“나는 아직 배울 게 많다. 하지만 평생 배워도 안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진리 하나는 있다.”
“그게 뭐지?”
“챙길 거 다 챙기면서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한다.”
“……너무 속 편한 말 아니냐?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 뭐 그런 건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그러지 않는다.”
“…….”
“가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천상의 등을 보며, 허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인은 마인이다, 너도.”
* * *
털썩!
바닥에 놓인 연치상을 보는 양백호의 눈이 깊어졌다.
이천상이 손을 털며 말했다.
“뒤처리는 령주님 몫입니다.”
가만히 연치상을 보던 양백호가 한숨을 쉬었다.
“기습했나?”
“그렇습니다.”
“고문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몸이 완전히 맛이 갔군.”
한눈에 연치상의 상태를 꿰뚫어 본 그였다.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양백호의 집무실 구석에는 네 명의 사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부령주 장무병과 세 명의 부관들이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 연치상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그 넷은 심하게 당했어도 치료하면 현역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연치상은 대라신선이 와도 본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
탁자 끝에 걸터앉은 양백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선을 넘었다. 자네 역시 선을 넘었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내일이라도 목숨 부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럴 겁니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찝찝하진 않나?”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습니다.”
양백호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의 뒷배를 이용해 보겠다?”
“이미 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랬었지.”
말 안 듣는 부하들, 심지어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도 모자라 모욕까지 한 놈들을 두들겨 패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문제는 뒷감당이 되느냐였다. 양백호는 그들을 처벌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후회도 없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다.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주관이었다. 원칙이었다.
“나는…….”
“사령부가 시작입니다.”
“……?”
“사령부를 시작으로 외전을, 외전을 바로잡으면 내전을 바로잡습니다.”
“……그러기로 했었지.”
“령주님의 상대는 부패한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신교 그 자체입니다.”
“…….”
“호랑이를 잡을 때, 제아무리 실력 좋은 사냥꾼이라도 칼을 차는 건 비겁하다며 맨손으로 잡으려 드는 이는 없습니다. 오히려 함정을 파고 미끼도 써먹어야지요. 그러고도 잡기 힘든 게 호랑이입니다.”
“…….”
“떳떳하게 살고 싶은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양백호가 눈을 감았다.
“전자를 선택하면 죽을 것이요, 후자를 선택하면 진흙탕으로 들어가는 것이로군.”
“전자를 선택하면 세상이 끝나는 것이고, 후자를 선택하면 세상과 드잡이를 할 것입니다.”
천천히 눈을 뜬 양백호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함께 온 조원도 보였지만, 지금 그의 머리에 들어오는 건 이천상의 말뿐이었다.
“자네 뒤에 누가 있나?”
“형법당입니다.”
양백호의 눈이 흔들렸다.
“형법당주 공무외.”
“그렇습니다.”
“공무외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는 있나?”
“지금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인간인 건 압니다.”
그 사람이 나쁜 놈이건 좋은 놈이건 따질 필요가 없다. 지금 필요하다면 써먹어 주면 그뿐이다.
이천상은 한마디로 자신이 공무외와 다른 인간이라는 걸 증명했다.
“어째서 공무외가 자네를……?”
“…….”
“그래, 사연 없는 사람은 없겠지. 중요한 건 자네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양백호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테니.’
이왕 내친걸음이다. 바지 젖기 싫다고 진흙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독사들의 밥이 될 것이다.
죽어도 후회는 없지만, 과연 내가 보는 세상이 바뀔 수가 있는지 보고 싶다.
“자네의 능력을 보여 주게.”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