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6화. 단단한 줄 (6)
이천상이 나간 문을 보던 양백호는 문득 고개를 돌려 허필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허필이 고개를 숙였다.
“일각 일 조 소속 허필입니다.”
양백호가 쓰러진 연치상을 힐끔거렸다.
이천상은 허필과 함께 이놈을 데려왔다. 말하자면 이 녀석도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허필을 보던 양백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의외인가?”
“예?”
“나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겠지.”
“예.”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라서 당황하진 않았나?”
결단은 내렸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하다.
양백호도 사람이다. 자신의 이러한 선택이 제 욕망 채우기에만 급급한 권력자들의 정치질로 비칠까 불안한 것이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당황스럽고요.”
양백호가 쓰게 웃었다.
“그랬겠지.”
“야차사령부로 좌천되다시피 오신 분께서, 드디어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아 놀랐습니다.”
“……?”
양백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좌천이라는 단어는 상관 앞에서 함부로 할 말이 아니다. 사실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상대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런데도 허필은 담담한 기색이었다. 친분 없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어색함은 있을지언정, 자신이 뱉은 말에 긴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령주님의 무공은 신교육대의 수장급을 넘어 원주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분께서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우리 사령부의 미래도 탄탄해지겠군요.”
받아들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일조라면 일각 삼 층이군.”
“조장과 같은 방입니다.”
일각 삼 층 일 호.
양백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디에서 왔나?”
“호법원에서 왔습니다.”
“호법원에서?”
꽤 놀라운 일이었다.
대대로 호법원이라는 조직은 신교 최고의 조직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직이었다. 소속 무사의 숫자가 가장 많은 조직이며, 특히 내성 호위를 맡는 이들의 무력은 정예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당연히 당대 호법원도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호법원주 역시 극마에 도달한 진짜배기 고수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우우웅.
양백호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어렸다.
무언가를 살피는 듯 허필을 주시하던 그의 눈이 이내 살짝 커졌다.
“굉장하군.”
“…….”
“호위 무사란 때에 따라서 자신의 힘과 기척을 완전히 숨길 줄 알아야 하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마공을 끌어 올리기 전에는 자네의 진짜 힘을 보지 못했네.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과찬이십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단순 호위의 무력은 아닌데.”
“호법원 삼 조 부조장 출신입니다.”
“부조장?”
양백호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허필이 숨기고 있는 힘은 분명 상당한 것이었다. 내공만 보면 일류를 넘어 거의 절정고수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신체 균형이나 흐르는 마기로 유추되는 혈도의 발달도를 보면 부조장 직위에 오를 정도는 아닌 듯했다. 능력 있는 조원 정도랄까?
‘게다가 삼 조라?’
호법원 산하에는 수많은 조직이 있다. 하지만 허필은 호법원 산하 조직명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삼 조라고 말했을 뿐.
“호법원 본대의 삼 조를 말함인가?”
“그렇습니다.”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무력이다. 본대의 조장급 무력은 신교육대의 수뇌부급에 필적한다. 공격력은 처질지라도 방어력만큼은 육대 수장급 이상이었다.
실력을 숨기는 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은 그 정도로 높다고 보기 어려웠다.
양백호는 자신의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부조장급의 무력이라고 보기는 힘든데.”
허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전출된 모양입니다.”
사연이 있는 말투였다. 적어도 양백호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하긴,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겠나.’
허필의 본래 소속이라면 사령부가 아니라 호령부로 전출을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령부로 왔다는 건 허필 역시 상부에서 좋게 보는 인재는 아니란 뜻이리라.
“이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게.”
“물론입니다.”
양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돌아가게. 이곳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그때였다.
‘삼 조?’
문득 양백호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 하나.
“자네.”
“예.”
“삼 조라면…… 곽규가 조장으로 있던 조가 아닌가?”
“전대 조장이었습니다. 제 사형이었지요.”
“사형?”
양백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설마 자네, 대력신마(大力神魔) 어르신의 제자였나?”
“그랬었지요.”
그렇다가 아니라 그랬었다고 한다.
‘대력신마라니!’
대력신마는 전대 십대마왕 중 하나로, 자전신마가 교주로 취임하기 전 호법원주였다.
막강한 육체, 파괴적인 무공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성품과 인간미가 돋보이는 극마의 고수. 대력신마가 호법원주였던 시절, 비록 역대 최강은 아니었을지라도 조직원들의 충성도만큼은 최고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대력신마도 새 시대의 물살을 버티지 못했다. 정확히는, 대력신마가 새 교주인 조백천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조백천 역시 아부 따위와는 담을 쌓은 대력신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교의 중추인 호법원주로서의 위명이 너무 대단해서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냥 쳐 내자니 따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고, 가만히 놔두자니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종의 합의를 거친 후, 대력신마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허필은 바로 그 대력신마의 제자였던 것이다.
양백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곽규는 그 무공만큼이나 출중한 일 처리로 유명한 자였다.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어.”
곽규 역시 스승을 닮아 성품이 좋았다. 외부의 유혹에 쉬이 마음이 꺾일 자가 아닌지라, 양백호의 기억에 좋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축출이라도 당한 건가?!”
대력신마의 대제자다. 상부에서 대력신마를 좋게 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처우도 좋았을 리 없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전대 조장이었다면서?”
“지금은 총괄 조장입니다. 승진했지요.”
“……?!”
“그리고 저는 실질적으로 파문당했습니다.”
이상한 그림이었다.
물끄러미 허필을 보던 양백호가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장무병과 부관들을 바라보았다.
“연치상을 저놈들 옆으로 옮기게.”
양백호가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일 조장을 기다릴 겸, 자네 얘기를 듣고 싶군.”
* * *
“허어.”
집무실로 들어온 공무외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자네가 직접 날 찾아올 줄은 몰랐군.”
이천상이 고개를 숙였다.
“당주님을 뵙습니다.”
공무외가 미소를 지었다.
이천상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쁜 편도 아니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도헌이 데리고 온 인재라 신경 썼을 뿐, 딱딱하고 인간미 없는 그를 좋게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군사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고약한 놈의 반격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헤쳐 나간 그의 능력은 진짜였다. 그로 인해 놈에게 한 방 먹여 주었고, 나아가 도헌의 충성심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공무외에게 이천상도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물론 도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무작정 나를 보자고 하다니. 나라고 편히 놀기만 하는 건 아니라네.”
“죄송합니다. 광마대주님을 통해 부탁을 드려 보려 했지만, 상황이 급하고 나름대로 중요한 사안이라, 부득불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이천상은 그답지 않게 꽤 저자세로 나가고 있었다. 공무외가 이런 모습을 원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과연 공무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네. 한두 번의 무례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어. 자네 정도의 인재를 얻기가 어디 쉬운가.”
들고 온 사안이 별게 아니라면 불편해질 거란 뜻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말씀에 앞서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혹 자소대마 장로님과는 불편한 사이십니까?”
공무외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어찌 묻나?”
“대답 못 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대답부터 듣겠다는 뜻이었다.
공무외의 얼굴에 은근한 불쾌감이 일었다. 아무리 아끼는 인재라지만 도헌만은 못하고, 그 위치도 한참 아래인 녀석이다. 일개 조직원 나부랭이를 이렇게 만나 준 것은 어디까지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지, 격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다 떠나서 이놈은 투마 출신이었다. 사령부 소속이 되었다고 해서 출신이 바뀌는 건 아니지 않나.
“너의 그 질문이 얼마나 주제넘은 것인지는 알고 있겠지?”
호칭이 자네에게서 너로 바뀌었다. 그만큼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천상의 표정은 당당했다.
불쾌한 한편 호기심이 일었다. 물끄러미 이천상을 노려보던 공무외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사람과는 좋은 사이도, 불편한 사이도 아니다.”
그 말 한마디로 이천상은 알 수 있었다. 공무외가 자소대마 장로와 친분이 없다는 사실을.
친분이 있었다면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그 사람이라는 말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좋지 않게 보는 쪽에 가깝다.’
예상대로였다.
도헌에게 듣기로 자소대마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현실에 안주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자세히는 모를지언정, 행보로 미루어 유추하는 것은 가능했다.
공무외와는 다르다. 공무외 역시 권력에 집착하고 비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권력자로서의 향상심이 있다. 자소대마와 맞을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확인해 보길 잘했군.’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공무외가 자소대마에게 줄을 댔다면 또 다른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고, 일이 몇 배는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듣기로 난세는 언제나 영웅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뭐?”
“상황이 어지러울수록 어부지리를 취할 기회가 생긴다고도 들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천상이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
“선물이지만, 폭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놈이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것이냐?”
“확인해 주십시오.”
가만히 이천상을 노려보던 공무외가 서책을 들어 펼쳤다.
짜증 어린 눈길로 서책 내용을 확인하던 공무외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폭혈마공의 구결입니다.”
“……!!”
공무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소대마의 독문마공?!”
장로라는 직함조차 붙이지 않는다. 창졸간에 나온 말이라 더더욱 자소대마를 향한 공무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 모르지만, 타인의 무공을 속속들이 안다 하여 완벽하게 대응하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무공이라도 고수마다 해석하는 방식 등 개인차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 비급이 경쟁자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배짱과 능력이 있는 권력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
“독문무공은, 무인의 목숨과도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공무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이 비급 하나가 난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노리는 사람에게 있어 이처럼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무기는 없을 겁니다.”
“자네……?”
“혈마인이 다스리는 사령부를 통째로 손에 넣으시고, 본격적으로 날아오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