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7화. 죽음의 전령 (1)
“……그랬군.”
양백호가 한숨을 쉬며 허필을 바라보았다.
허필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 보였다. 울면서 할 얘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웃으면서 할 얘기도 아니었다. 한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처음 표정과 변함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겠지.’
오히려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어 되레 담담해진 것에 가깝다.
그리고 허필의 그런 마음을 양백호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디 이 녀석만 그럴까.’
사령부에는 이천상이나 연치상처럼 든든한 뒷배를 안고 들어온 녀석도 있을 테지만, 허필처럼 원하지 않았는데도 떠밀려서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예 아무 생각 없이 온 놈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사연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백호가 할 일은, 그 사연 많은 이들을 강하게 단련시켜 사령부라는 조직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나로 묶어 내는 것이었다.
가만히 허필을 보던 양백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원망하는가?”
“다 털어 낸 줄 알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솔직해서 좋군.”
그때였다.
‘……?’
말을 이으려던 양백호는 순간 자신의 기감에 걸리는 익숙한 기도 하나를 읽어 냈다.
뜨거운 마기를 품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냉정한 느낌을 주는 기도. 생기가 불타오르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존재감은 적은 기척의 주인공.
바로 이천상이었다. 그리고 곁에 누구 하나가 더 붙어서 오고 있었다.
‘절정고수…….’
한데 왠지 무딘 기도였다. 날이 잘 선 칼 같은 기도가 아니란 의미였다.
하지만 그 깊이는 상당했다.
양백호의 눈이 흔들렸다.
“이 녀석이 설마?”
잠시 후.
“령주님.”
“들어오시게.”
문이 열리고 이천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한 사람.
양백호는 물론 허필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형법당주님……?!”
공무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은 들었지만, 정말 환장하겠구먼. 피 냄새를 지우려고 차를 끓였나?”
“……!”
“나도 한 잔 타 주게. 향 좋은 놈으로.”
집무실에서 나간 이천상은 거처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허필이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무엇이 말인가.”
“형법당주님을 직접 모시고 왔어? 너 제정신이냐?”
“내가 데려온 거 아니다. 본인이 직접 오겠다고 했지.”
“……뭐?!”
이천상이 집무실 건물을 돌아보았다.
“재료는 솥에 다 넣었다. 얼마나 끓일지는 숙수의 몫이다.”
* * *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공무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급한 찻잎을 쓰는구먼.”
양백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애초에 유연한 모습 따위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공무외의 얼굴에는 어떤 불쾌함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탁자를 내려다보던 공무외가 한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무병과 부관들, 그리고 연치상이 쓰러져 있는 곳이었다.
말없이 그들을 보던 공무외가 불쑥 물었다.
“기분이 어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력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고, 나이 역시 양백호가 열 살은 더 많다.
하지만 공무외는 당연하다는 듯 하대를 했고, 양백호 역시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책이 다르니 당연했다.
“지옥 불구덩이에 한 발 걸친 기분 말일세.”
이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양백호의 눈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입교 후, 이 세상은 제게 언제나 불구덩이와 같았습니다.”
공무외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어쩜 변한 게 하나도 없군.”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개 야차 한 놈의 설득에 인생을 걸다니 너무 무모한 건 아닌가?”
“일개 야차가 아닙니다.”
“음?”
“저는 야차사령부의 수장이고 그놈은 능력 좋은 조장입니다.”
“조장이든 조원이든.”
“그리고 제 새끼입니다.”
공무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공무외를 보는 양백호의 눈은, 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치상 저놈은? 자네 새끼가 아니라서 죽이려 들었나?”
“제 새끼가 되기도 전에 형제처럼 지내야 할 야차를 죽였습니다. 패륜아지요. 죽어 마땅합니다.”
“좋을 대로의 해석처럼 들리는데.”
“상관없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쥔 형법당의 수장 앞에서 용케도 그런 말을 한다.
물끄러미 양백호를 보던 공무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녀석 뒤를 우리가 봐주고 있는 거, 이미 다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원칙주의자에 권력에도 별 관심이 없고, 정치에도 별 관심이 없는 자네가 지금은 나와 이렇게 엮이게 되었군.”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
“제가 증오하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적이 아닌 동료를 향한 술수와 모략이지요.”
너희가 하는 짓거리는 그렇게나 저급한 짓이다. 양백호의 말은 그와 같았다.
공무외가 빙그레 웃었다.
“알지. 그래서 자네가 사령부로 좌천된 거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한데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뀌었나?”
“…….”
“사정은 들었네. 사실, 저 녀석 때문에 자네가 마음을 바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자네 성격에 언제고 한 번은 터졌을 것 같기는 하네. 언제인지가 문제였지.”
“…….”
“그리고 자네가 언제 터질지, 나는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거든. 다만 자네가 무너질 때 힘만 센 멍청한 작자의 말로라고 비웃어 줄 생각은 있었네.”
“…….”
“이런 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
양백호는 말없이 공무외를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 바라보던 공무외가 의자에 등을 묻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자네가 바보 같다고는 생각해도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네. 그래서 더 답답했지만.”
“…….”
“긴말 않겠네.”
천장을 보던 공무외가 양백호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있나?”
양백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천상 저 녀석이 그럽디까? 양백호라는 작자가 사고를 쳤으니, 무마하기 위해서 당주님 밑으로 들어갈 거라고?”
“대답이나 하게.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있는가?”
“당연히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
천천히 의자에서 등을 뗀 공무외가 찻잔을 살살 돌렸다.
코끝에 훅 끼치는 다향이 꽤 강렬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이 부대의 수장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수장은커녕 당장 내일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인데.”
“저도 하나 여쭙지요.”
“그러시게.”
“저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주님 역시 하시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합니다.”
“…….”
“서로를 떠보는 것은 그만하도록 하지요. 제게 눈치 싸움을 바라고 오신 것은 아니잖습니까?”
공무외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는 정말 다루기 힘든 사람이야. 싸가지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거든.”
“절 다루러 오셨습니까?”
“성격 거친 야생마가 나만을 위해 등을 허락해 준다면, 그 기분이야 말해 무엇 할까.”
“그 생각은 평생 접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럴 생각이네. 야생마는 자네 말고도 많거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어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양백호였다.
“당주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저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당주님 자신만을 위해 움직여 줄 사람을 필요로 할 테니까요.”
“맞네.”
“다만, 사령부를 원칙대로 잘 키워 갈 수 있게 도움을 주신다면 저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드릴 수 있습니다.”
“거래를 하자?”
“그렇습니다.”
공무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느 선까지의 보답을 해 줄 수 있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의 보답입니다.”
“하하하!”
공무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원칙에 어긋나는 보답이라도 주겠다는 말을 해야 거래가 성립이 되지.”
“그렇다면 거래는 결렬이군요.”
“그렇군.”
양백호가 후련하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멀리 배웅은 못 나갑니다.”
정말로 터럭만큼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양백호를 향한 공무외의 눈빛에 은근한 흥미가 어렸다.
“자네, 생각보다 거래를 할 줄 아는구만?”
“그렇습니까?”
“예전의 자네와는 분명 달라. 허리를 숙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유연해진 것 같으이. 목숨이 달려서 그런가? 아니면 뭔가 목표라도 생겼나?”
“글쎄요.”
미소 짓던 공무외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었다.
“상부에 불만이 많은 걸 아네.”
“…….”
“누가 가장 불만인가? 아니, 무엇이 가장 불만스럽나?”
“하나하나 말씀드리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내 정적이 될 사람에게도 불만이 많겠군.”
양백호가 고개를 들어 공무외를 바라보았다.
공무외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이제야 진짜 대화의 장이 열린 것이다.
잠시 뜸을 들였던 양백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저는 신교를 타락하게 만든 수뇌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
“솔직히, 힘으로라도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발언이야. 하지만 일부 동의하네.”
“그 뜯어고쳐야 하는 부분, 부위, 사람 중에…….”
“…….”
“당주님의 정적도 분명 포함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하하하!!”
공무외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자신의 정적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어차피 머리 쓰는 사람들만 올라갈 수 있는 무대다. 칼잡이들은 그 아래에서 참수도(斬首刀)를 갈아 두고 있다.
공무외의 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제거하기를 원하는 정적의 분명한 죄목이 드러나게 되면, 그에 따라 야차사령부에 따로 연락이 떨어진다면.
명분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움직이겠다. 양백호의 말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먹잇감을 함정에 밀어 넣는 것은 공무외의 역량이다. 그리고 먹잇감을 사냥할 때, 자신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공무외에게는 굉장한 이득이었다. 제 사람이 아니라 마음대로 다루지는 못하지만, 술수든 모략이든 상대를 지정해 주면 언제든 전투 부대로서 움직이겠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쥐고 휘두르는 칼을 얻지 못했지만, 유도한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화살통을 얻었다.
그 화살을 어린애에게 쏘게 할지, 명궁(名弓)에게 쏘게 할지는 이쪽 역량에 달린 것.
공무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소대마의 정적이 누구인지 아나?”
“모릅니다.”
“자네답군. 하지만 나는 자소대마의 정적에게 줄을 대지 않을 것이네. 끗발이 부족하거든.”
“……?”
“그보다 더 윗줄, 교주 휘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줄을 대러 갈 것이네. 그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지금까지 참고 있었지.”
“당주님께도 결단의 순간이 온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제는 움직여야겠어. 주변에서 이렇게까지 날개를 달아 주는데 무엇 하러 엉덩이 무겁게 버티고 있겠나?”
“…….”
“내일 동이 튼 후 사람을 보낼 것이네. 만약 그 사람이 온다면, 이제부터 사령부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네.”
“만약 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자네 살길은 자네가 알아서 찾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을 각오를 하고 저지른 짓이라 미련도 없습니다.”
피식 웃은 공무외가 몸을 돌렸다.
“내일 올 사람에게 찻잎도 딸려 보내 주지. 그따위 허접스러운 차는 그만 마시게. 격 떨어지네.”
다음 날 아침.
한 명의 사내가 야차사령부의 문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