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8화. 죽음의 전령 (2)
쿵!
이천상이 내려놓은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연무장 한옆에 모인 일 조 조원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상자를 연 이천상이 옷 한 벌을 들고 말했다.
“사령부의 정식 의복이다.”
조원들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훈련 당일, 제대로 된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조장들이 조원들에게 물품을 지급하는 시간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사령부 정복이었다.
“사흘 만에 만드느라 직공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지나치게 덩치가 크거나 왜소한 사람은 없으니, 아무거나 입어도 넉넉하게 맞을 것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옷에 사령부 문양만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대단한 일이었다. 무려 오백 명이 입을 의복에 살벌한 야차 문양과 사령(死令)이라는 두 글자를 손수 새겨 넣어야 했을 테니까.
조원들은 제각기 설레는 눈으로 의복을 가져갔다.
의복이라고 해 봤자 검은 무복에 활동성 좋은 붉은 장포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 장포의 재질이 무척 좋았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웠지만, 무척이나 질겨서 전투 부대 대원들이 입기에는 최상의 옷이라 할 수 있었다.
“작전에 나갈 때 정복을 입을 것이다. 지금은 한 벌씩이지만, 훗날 개인당 세 벌이 더 지급된다. 사흘 뒤에 병장기들도 온다고 하니 본인의 애병보다 괜찮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챙기도록.”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소.”
“말해라.”
“훈련 내용에 진법도 있는데, 우리는 조가 완전하지 않소.”
첫 입소식 날 이천상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아직도 혈혼각 신세를 지고 있는 조원이 있었다. 실제로는 조가 만들어지기도 전이었지만, 어쨌든 종평 역시 조원이었다.
“상관없다.”
“정말 그렇소?”
“실전에서 조원 몇 명이 죽었다고 대형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
“최후의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그때그때 구사할 수 있는 진법의 방위와 공방의 흐름까지 훈련한다. 상부의 훈련 방침이다.”
마인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천상의 말은 옳았다. 누구 하나 죽었다고 유지할 수 없는 진은 절대 좋은 진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이제야 실감했다. 야차사령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실전에 나가 죽는 인원이 생길 수도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이제 깨달은 것이다.
그때, 허필이 손을 들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훈련은 어떤 식으로 진행됩니까.”
사석에서와는 달리 허필은 이천상에게 확실한 조장 대우를 해 주었다. 호승심 때문에 사고(思考)를 포기한 여느 마인들과는 달랐다.
조장에 대한 확실한 예우와 그에 따른 실력이 있어야 조가 사는 법이다. 당연히 조가 살아야 나도 산다. 허필은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부터 사흘 뒤까지 진법을 훈련한다. 다음날은 개인 훈련, 그다음 날은 진법을 제외한 전체 훈련이 있다. 그리고 하루를 쉰다.”
“흐음.”
주에 육 일을 훈련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다. 꽤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전체적인 훈련의 틀이 잡힌다. 당분간은 그런 식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후 부대의 수준과 명확한 목표가 생기면 훈련 방침이 또 달라질 것이다.”
허필이 피식 웃었다.
“다른 조장들보다 훨씬 그럴듯해 보입니다.”
대우는 해 주지만, 특유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필.”
“말씀하십시오.”
“네가 임시 조장이다.”
“……예?!”
느닷없는 말에 허필은 물론 조원들도 깜짝 놀랐다.
“모종의 ‘사유’로 부관 모두가 이탈했다. 일각에 새 부관이 올 때까지 내가 임시 부관이 된다. 당연히 일 조만을 챙길 수는 없을 것이다.”
“……허!”
“우리는 조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따로 부조장을 둘 필요는 없다. 조장도 그 나름의 권위와 책임이 있을 뿐, 훈련 시에는 조원과 다를 바가 없다. 그건 임시 부관인 나도 마찬가지다.”
“…….”
“알아서 서로를 챙겨라. 그래야 실전에서 죽을 위험이 줄어든다.”
헛웃음을 짓던 허필이 다소 장난스럽게 물었다.
“경험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나도 들은 말이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부령주와 부관 일동이 모두 이탈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훈련은 령주인 양백호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
양백호의 지휘력은 대단했다.
이곳저곳에서 치여 제자리를 못 잡았을 뿐, 진법의 이해와 집단전에서의 경험이 무공만큼이나 뛰어난 그다.
당연하다. 그는 무인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 군문에서 활동했던 장수였다. 비록 백호장으로 끝났지만, 유사시에는 천호장 역할까지도 수행했던 숨겨진 명장이기도 했다.
더 강하고 독한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 하여 집단전의 성질이 변할 리가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의 경험과 신교에서의 경험이 그의 안목을 몇 곱절 상승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양백호는 힘든 훈련 속에서도 마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줄 알았다.
처음이라 극한까지 몰아붙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힘든 훈련이었다. 대신 쉬는 시간을 넉넉히 주었고, 그때마다 체력이 남은 조원이나 조장들을 상대로 보기 좋게 추가 강의까지 곁들었다.
다시 말해, 양백호에게는 가르치는 재능이 있었다.
어려운 말도 이해하기 쉽게 알려 주었고 복잡한 것은 직관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천상은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양백호의 가르침 이상을 얻어 내고 있었다.
‘확실히 달라.’
양백호가 쌓아 온 무공과 지식, 경험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것을 풀어 내는 역량에 있었다.
무공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무리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도 그걸 풀어 내는 것은 사람의 몸뚱이다.
진법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의 움직임까지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이해하기 쉽다. 한 번 걸러서 생각해야 할 것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후, 몸에 완전히 배게 만드는군.’
확실히 이천상은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번, 세 번 되풀이되는 양백호의 강의를 한 번에 이해한 후, 양백호가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는지까지도 머리에 넣었다.
이천상의 머리는 쉴 새가 없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양백호를 좇았고, 귀는 양백호의 음성에 집중되었다.
팔다리는 명령대로 움직였으며 부족한 조원들의 움직임을 보조하여 완벽에 가까운 진형을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호오.’
양백호라고 이천상을 주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각와 이각, 삼각의 임시 부관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천상이었다.
정확히는, 양백호의 눈에만 잘 띄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면 이천상의 움직임을 부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어설프지만, 내가 말한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군.’
거기다 이해한 것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나 주변을 바라보는 눈이 무척 넓고 예리했다. 조마다 움직임이 천차만별인 와중에 부족한 조가 있으면 일 조 전체를 끌고 가서 보완하고, 일 조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슬그머니 축이 되어 인원을 이끄는 식이었다.
‘몇 번을 보여 주고 말해 줘도 몸에 익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 훈련을 나흘 내내 이어 갈 생각이었거늘.’
이천상은 오늘 배운 것을 완전히 외우고 이해한 것 같았다.
양백호의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감이 좋은 건지, 똑똑한 건지.’
그날의 훈련은 유시(酉時)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첫 훈련, 아직 친하지도 않은 조원들과 부대끼니 정신도 없고 힘도 더 들었을 것이다. 야차들 대다수는 그날 훈련을 마치고 식사 후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은 고되었지만, 양백호의 가르침이 너무나도 이해하기 쉬워서 조원들은 철저히 진법에 매달릴 수 있었다.
즉, 집중도 있는 훈련이 가능했다는 뜻이었다.
집중해서 훈련하니 훈련이 종료되면 굉장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피로를 식사와 수면으로 풀었다.
양백호는 야차들의 수면 시간을 철저하게 보장했다. 많이 움직이는 만큼 많이 쉬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한 주의 마지막 진법 훈련이 끝나고.
양백호는 이천상을 호출했다.
“식사는 했나?”
“아직 식전입니다.”
“씻고 왔군. 그럼 나랑 같이 먹지.”
“알겠습니다.”
하인들이 집무실로 상을 가져왔다.
“편히 먹게. 상관 앞이라고 눈치 보지 말고.”
이천상이 의아한 눈으로 양백호를 보았다.
“물론 그럴 겁니다.”
순간 흠칫한 양백호가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런 놈이었지.’
평범한 놈들과는 성격부터가 다르다. 알고 있는데도 적응이 쉽지 않다.
정말 묘한 놈이었다.
“눈치가 보이지는 않나?”
“예?”
“왠지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이지는 않느냔 말이야.”
이천상이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답했다.
“부르신 이유가 있겠지요. 나머지는 제가 생각할 게 아닙니다.”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임시 부관들을 차례로 부르려 했네. 자네를 먼저 부른 것은 소속이 일각이기 때문이야. 눈치를 봤다면 안심하고, 안 봤다면 계속 먹게.”
“알겠습니다.”
이천상의 식사 속도는 상당히 느릿했다.
젓가락 놀리는 속도는 딱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데, 음식을 지나치게 꼭꼭 씹어 먹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식사하는 모습도 왠지 범상치 않아 보인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양백호가 고기가 담긴 접시를 그 앞에 놓았다.
“많이 고픈 모양이군. 이것도 먹게.”
“알겠습니다.”
또 거부는 안 한다.
새삼, 양백호는 이놈이 정말 신선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후우.”
“다 먹었나?”
“그렇습니다.”
양백호는 하인을 불러 상을 치우게 하였다.
차는 양백호가 직접 우렸다. 고아한 향이 무척이나 깊고 좋았다.
“향이 어떤가?”
“예전 것보다 깊은 느낌입니다.”
“맡을 줄 아는군. 자네 뒷배가 보내온 걸세.”
“그렇군요.”
이천상은 담담히 차를 마셨다.
가만히 그를 보던 양백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이천상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천마신교 외전 야차사령부 소속 일 조 조장으로 임시 부관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 전 소속은…….”
“됐네. 내가 뭘 묻겠나.”
그게 장난이었는지, 대답 회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양백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장무병 부령주와 부관 셋에 대한 처우는 형법당이 맡았네. 들었나?”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락은 따로 안 주는 모양이군.”
“저는 일개 야차입니다. 그때의 만남도 억지로 우겨서 된 거지, 그 사람이 제게 돌아가는 일을 일일이 말해 줄 위치가 아닙니다.”
“……그런가.”
그런 걸 보면 또 대단하다. 공무외가 이놈의 뒤를 봐주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감싸고 도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묘한 관계를 무시하고 형법당에 쳐들어가 직접 만나자고 했으니, 이놈 배포도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 부관을 요청했네. 여기저기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이들이 아닌, 내가 직접 고른 실력자들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둘밖에 구하질 못했네.”
“……?”
“부령주 일이야 당분간 내가 맡으면 된다고 하지만, 부관 일까지는 더 신경 쓸 수가 없어. 노력한다 해도 구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
이천상은 말없이 양백호를 바라보았다.
양백호가 미소를 지었다.
“지나친 고속 승진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부관 앞에 임시라는 글자를 떼어 볼 생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