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7화. 어두운 출정 (2)
양건은 아직 의방에 가지 않았다.
같은 조원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그의 모습은 큰일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오셨습니까.”
양건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그를 보던 이천상이 귀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귀창이 조원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지.”
“아, 예!”
그렇게 두 사람이 사령부 부대 정문 옆 조촐한 바위 앞에 섰다.
“아이쿠, 삭신이야.”
양건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나무에 기대앉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관절이란 관절은 다 삐걱거린다.”
“의방으로 가라.”
“갈 거다, 이놈아.”
투덜대던 양건이 묘한 눈으로 이천상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와 줄 줄은 몰랐다.”
“…….”
“제법 듬직해졌구만.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이천상은 말이 없었다.
양건이 한숨을 쉬었다.
“오해하지 마라.”
“무엇을 말인가.”
“그날, 너와 주연교를 보러 간 건 내 상태를 알리고자 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한번 보고 싶어서 간 거였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오해는 하지 않는다.
왜 굳이 이런 말을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천상은 곧장 알아차렸다. 양건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왜?’
뭐가 부끄러운 거지?
의문이 드는 순간, 또다시 답이 찾아왔다.
‘지인의 손을 빌려 사태를 마무리한 것처럼 보이는 게 싫은 것이다.’
그간 여러 사람이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그와 관련된 비슷한 얘기도 많이 들었다.
이천상은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걸로 부끄러워할까?
부끄럽다는 감정이 사람을 주춤하게 하고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라면,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이천상은 솔직하게 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가?”
순간 양건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어 버렸다. 갑작스레 속내를 찌르고 들어오는 저 투명한 화법, 조금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래, 자존심이 상했다.”
“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끝까지 참고 있었던 거다. 갈 데까지 갔을 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려고.”
이천상은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양건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맞아. 이렇게까지 확실한 마무리는 되지 않았겠지. 오히려 나도 처벌을 받았을 거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랬나.”
“자존심이 상했다니까, 이놈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양건의 표정이 씁쓸했다.
“모양새가 안 좋잖아.”
“그것도 자존심인가?”
“뭐, 비슷하지. 그리고 솔직히 쪽팔리잖냐. 내 문제도 처리 못 해서 남에게 일러바치는 거, 좀 그래.”
“네 문제가 아니라 부대의 문제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너는 이해 못 할 거다.”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머리로는.”
“…….”
“그래서 더더욱 네가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냐.”
“나는 너희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못해. 그래서 모두가 껄끄러워하고 멀리하고 싶어 하지.”
“…….”
“그런 별종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사람을 관찰하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람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야.”
“…….”
“나도 모르는 게 많지만, 적어도 이 사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피해자인 네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미리 상부에 얘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군.”
“알아들었다. 대신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당하는 사람의 정신은 피폐해지기 마련이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그럴 생각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
“그 또한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그렇다.”
“의외인데.”
“하지만 넌 그 정도로 부러지지 않아. 이 사태를 만든 건 그 조장이지만, 조금 더 빨리 해결할 기회를 놓친 것은 분명 너다.”
양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이천상의 과하기까지 한 어조에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장난 좋아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가, 이제는 이천상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식하고는 아는 사이였어.”
“…….”
“딱히 좋은 관계도, 나쁜 관계도 아니었지. 그 자식은 진마대 조장이었고 나는 예비단이었으니까. 애초에 자주 만날 일도 없었고.”
“…….”
“나에게도 몇 번 진마대로 차출될 기회가 있었다. 수석이니 당연했지. 하지만 난 가지 않았어.”
“왜지?”
“그놈 봐서 알잖아? 진마대는 그런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야. 뭐, 적응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정신 사납게 살고 싶진 않았거든.”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던 양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곡헌에게 당한 배에서 강한 통증이 올라온 것이다.
“나도 어지간히 뻣뻣해서 말이야. 아마 한 달도 못 채우고 사고 치거나 죽었을걸?”
“…….”
“곡헌 그놈, 그래도 외지에서 만나서 반갑긴 했던 모양이야. 이렇게 작살을 내 놓은 거 보면.”
물끄러미 양건을 보던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밤이 늦었다. 의방으로 가서 치료부터 받아라.”
양건이 물었다.
“이봐, 일각주님.”
“말해라.”
“…….”
잠시 망설이던 양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 고마웠수다.”
힐끔 양건을 돌아본 이천상이 한마디 던졌다.
“그 말투 안 고치면 나중에 징계받을 수도 있다.”
“싹싹 빌면 용서해 줄 거잖아요?”
“생각은 해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이천상이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이천상의 뒷모습을 보던 양건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제법 상관 티가 나기는 하네.”
그가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보다, 양건은 문득 곡헌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그 병신과 임무를 같이 했다고 들었는데, 맞냐?
- 병신 아닙니다.
- 뭐?
- 그놈 병신 아니라고요.
- 얼씨구? 기어오르네? 왜, 진마대 아니라고 없던 용기라도 생겼냐?
- 정정해 드린 겁니다. 그놈이 병신이면, 그 병신과 같은 직책인 조장님도 병신이라는 거 아닙니까.
- ……?
- 저는 병신을 모시고 싶지 않거든요.
양건이 인상을 찡그리며 뒷덜미를 주물렀다.
“개새끼. 아무리 그래도 날 병신으로 만들 줄은 몰랐네, 시파.”
그때 멀리서 같은 조 조원 둘이 다가왔다. 양건을 부축해 의방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양건이 진저리를 쳤다.
“정신 나간 저 눈빛들 좀 봐. 벌레 하나 죽었다고 겁이란 겁은 다 처먹었네. 어휴, 어디 갑갑해서 살겠냐.”
* * *
이틀 후.
“어허, 요새 너무 바쁜 거 아닌가?”
“그렇게 됐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형법당주 앞에서 손 비비랴, 부대원 관리하랴, 여기저기 술 마시러 다니랴 아주 바빠 죽겠지?”
도헌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속 뒤집히는 소리 그만하고 잔이나 받게.”
소공이 낄낄거리며 잔을 들었다.
“어? 근데 자네…….”
“음?”
“내공이 크게 늘었는데?”
도헌이 슬쩍 눈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소공의 눈이 야릇해졌다.
“오호라, 이것 보게? 이제는 뇌물도 넙죽넙죽 받아드시는가?”
“뇌물 아닐세…… 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뇌물은 뇌물이군.”
“하하하! 알 만하구만. 공 당주 그 사람이 주던가?”
“그랬지.”
“거 사람 참 쪼잔하기 그지없구먼. 나 같으면 자네 정도 되는 인사에게 못해도 사령단 한 알 정도는 떡하니 내놓을 텐데.”
“사령단 맞네.”
“……어?”
“정확히는 반쪽이지만.”
“그게 뭔 소리야?”
도헌은 이천상과 얽혔던 얘기를 담담하게 풀었다.
소공은 혀를 내둘렀다.
“자네 혹시 본교 들어오기 전에 절밥 먹었나?”
“이 사람이 별소리를 다 하는구먼.”
“아니면? 뭔 마음이 그렇게 넓어서 그 얼음 같은 놈에게 사령단까지 쥐여 주려고 했어? 자네 욕심도 없나?”
“나라고 욕심이 없겠나. 다만 그 녀석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꾹 누르고 건넸을 뿐이야.”
“사령단을 자네 위장에 꾹 눌렀어야지! 와, 진짜 답답한 인간일세. 안 아까워, 그거? 듣는 내가 다 혈압이 오르는데?”
“괜찮네. 그보다 더한 걸 받았으니까.”
반으로 쪼갠 이천상의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소공이 픽 웃었다.
“답답하긴 하지만, 참 자네답기도 하네.”
“허허.”
“그렇게 웃지 마. 늙어 빠진 골방 노친네도 아니고.”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소공의 손길이 묘하게 부드러웠다.
“그 녀석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도헌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 자네가 했던 말이 맞았네. 녀석에게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야. 감정을 모르는 거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네.”
“웃기고 계셔. 처음 배달했을 때는 그렇게 떨떠름해하더니만.”
“허허.”
“그렇게 웃는 거 습관이야. 늙는다고.”
실없는 농담을 끝으로 잔을 비운 소공.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눈빛 속에 은근한 부러움이 담겼다.
“여하간 잘 성장하고 있구먼. 축하하네.”
“축하받을 일은 아닐세. 나는 진정 그 녀석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그런 인재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
“정확해.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그래도 그렇게 성장했다면, 차세대의 선봉으로 모자람은 없어 보이는군.”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음?”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도헌이 물었다.
“그나저나 흑마대의 그 녀석은 어떤가?”
“누구? 유이상?”
“그래.”
“유이상…… 유이상이라…….”
말을 길게 끌던 소공이 피식 웃었다.
“조장으로 승격했네.”
도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장이라고? 벌써?!”
“놀랍지?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나? 이천상 그놈, 벌써 사령부의 부관까지 올랐다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흑마대의 조장이라면 강호의 일급살수 이상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네. 배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암살자로서의 재능도 출중하지. 하지만 그게 그 녀석의 전부는 아니야.”
소공의 눈이 깊어졌다.
“그놈, 마공을 연성하는 데에 타고났어.”
“허!”
“어느 순간 탐이 나더라고. 그래서 영약도 몇 개 지원해 줬는데, 정말 무섭게 발전하더구만. 남들이 일 년 배울 걸 며칠 만에 소화해 버리는데, 이런 게 천재구나 싶었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하지. 솔직히, 아직 그 정도 천재를 본 적이 없어.”
소공이 씨익 웃었다.
“의지도 강해서, 앞으로 우리와 함께 잘 나아갈 수 있을 듯하네.”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적당히 키우다가 다른 곳에 보내려고. 나 정도 그릇으로는 품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도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헌만큼은 소공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었다. 나아가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이렇게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절대 많지 않다.
“뭐 어쨌든 순조롭구만. 우리가 뒤봐주는 인재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고난도 많을 걸세. 재능은 출중해도 경험이 적으니까,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싶네.”
“경험이라…….”
소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외전 당주한테 들었는데, 내일 야차사령부가 출정한다면서?”
“그렇다네.”
“빠르기도 해라. 어디로 간대?”
“어디인지는 나도 모르네. 상대가 호마상단(胡馬商團)이라는 건 들었는데.”
순간 소공의 눈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호마상단? 복건성에 있는 그?”
“알고 있나?”
“상부 어디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그건 모르겠네.”
소공이 인상을 찡그렸다.
“……꽤 위험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