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 외전-70화 (720/774)

외전 70화. 어두운 출정 (5)

“흐음.”

호상백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그랬단 말이지.”

혀를 쯧쯧 찬 호상백이 한쪽에 정리해 놓은 문서 중 하나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가져다주게.”

사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뭔가?”

“상대는 복건 동부 최대의 상단입니다.”

“우리는 복건 최고의 상단이지.”

“…….”

“건들거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 봐줄 만한 법이야.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냔 말이야. 소개장 하나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지.”

“알겠습니다.”

문서를 품에 갈무리한 사내가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호상백이 피식 웃었다.

“힘 싸움 한번 해 보자는 건가.”

복건에 들어와 서서히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꼴을 수도 없이 봐 왔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슬그머니 사람을 보내 초대장을 전달하는 것. 말이 초대장이지, 성의 표시할 것들 좀 챙겨서 인사나 오라는 것이었다.

꼭 이렇게 어중간한 놈들이 눈치도 없다. 지금 호마상단의 힘 중 삼 할만 뚝 떼서 보내도 동부 최고라는 저 상단 놈들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확 밀어 버리고 싶지만.’

대놓고 선을 넘지 않는 이상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단주님.”

집무실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권문(龍拳門)의 대장로님께서 숭산(崇山)의 귀빈을 모시고 왔습니다.”

“오, 그래?”

호상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금만 기다리시라 해라. 옷을 갈아입고 갈 것이다.”

“예.”

용권문은 본디 소림의 강서분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분타 주변 정세가 워낙 어지러웠고 온갖 사파인들이 득세하여 민심을 흉흉케 한지라, 소림의 속가제자들이 파견되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 무명의 분타에 속가제자들이 모여 하나의 문파로 인정을 받게 되니, 그것이 바로 용권문이었다.

그 역사가 무려 백 년이다. 지금 와서 용권문은 강서 동부를 대표하는 권법 문파로 위세가 상당했다.

그런 용권문의 대장로가 숭산의 귀빈을 모시고 왔단다.

숭산은 중원오악(中原五嶽)의 중악(中嶽)으로 하남성에 위치한 명산이었다.

그리고 그 숭산의 소실봉에는 정파 최고의 명문, 소림사(少林寺)가 있다.

재빨리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호상백이 집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단주님!”

“또 무슨 일이냐?”

“급보입니다.”

복면을 쓴 수하 하나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전했다.

서신을 읽은 호상백의 얼굴에 한 줄기 긴장이 어렸다.

“역시, 알아챈 것인가.”

서신을 접은 그가 수하에게 말했다.

“호검단주(虎劍團主)에게 대비하라 이르거라. 알아서 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참 바쁜 날이다. 얼치기 상단 상대로 인내심 발휘하랴, 용권문 대장로와 숭산 귀빈 모시랴.

나아가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보낸 악귀들까지.

‘차라리 잘되었다. 마침 귀빈께서 오셨으니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겠어.’

* * *

양백호가 말했던 곳까지 이동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 이틀간 이천상과 귀창은 야차들을 쉬게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으니만큼 불필요한 휴식은 사치라는 판단에서였다.

완전히 거점을 확보하고 나서야, 둘은 야차들에게 휴식을 명하곤 야산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넓군.”

귀창의 눈이 예리해졌다.

“령주님께서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신 이유를 알겠어. 오가는 길이 훤히 보인다.”

야산이지만, 저 밑의 분지에서 볼 때는 꽤 높은 산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엄청나게 넓은 분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가만히 분지를 내려다보던 이천상이 손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나도 느꼈네.”

무연향의 미세한 냄새가 느껴진다. 양백호와 율적산이 지나친 곳이었다.

“내일 해가 질 때쯤이면 우리도 이 냄새를 맡기 힘들어질 걸세.”

무연향은 무색무취한 향이었지만, 개용분(開用粉)이라는 가루 한 줌을 흡입하면 향을 맡을 수 있는 기물이었다. 천마신교에서도 내성의 정예 부대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놀라운 물건이지만, 어느 정도의 제약도 분명했다. 이틀에서 사흘이 지나면 개용분을 써도 냄새를 맡지 못하며, 개용분 자체가 독성이 있는 물질이라 한 번 쓰면 사흘에서 나흘 정도 휴지기를 가져야 했다.

무연향의 효과를 생각하면 제약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지만, 그 유의 사항을 무시한 이들 중 꽤 많은 이들이 피를 보았다.

“일단 야차 몇을 추려서 무연향이 끊어지는 지점으로 보내도록 하세.”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이 날래고 암습에 특화된 자라면 좋을 것 같소.”

“마침 어울리는 인재가 하나 있지.”

귀창이 불러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양건이었다.

양건이 씨익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삼군 일 조의 임시 조장인 양건입니다.”

귀창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싹 나았습니다. 령주님께서 신경을 좀 써 주셨어요.”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간 입은 내상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회복되었다. 본래 기량의 구 할은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 조장?”

“그렇습니다.”

“쓸 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네가 조장이 되는 건가?”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귀창이 혀를 찼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 하고, 조원들과 함께 향이 끊어지는 지점까지 가게. 도착하면 조원 하나를 보내도록 하고, 무슨 일이 터지면 곧장 연막탄을 터트리게.”

“명을 받듭니다.”

양건이 조원들과 함께 야산을 내려갔다.

일 조에서 양건만큼 신법이 날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일 조 조원들 대다수가 근접전에 능한 이들이라 하체의 탄력이 좋았다.

하체가 좋으면 체력이 좋다. 이런 일에 맡기기에는 제격이었다.

“저들만 보내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하군. 오늘 해가 지면 또 한 조를 보내도록 하세.”

“그럽시다.”

이런 경험이 많은지, 부대를 다루는 귀창의 능력은 상당히 치밀하고 날카로웠다.

양백호도 그렇지만, 귀창의 능력도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천상은 지금의 상황과 작전, 지형과 목표 등을 볼 때 귀창의 명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직 이천상에게는 없는 능력. 그래서 그는 배우려 하였다.

“이제부터는 돌아가면서 경계를 서는 게 좋겠군.”

“그럽시다.”

밤이 되었다.

복건의 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 복건이다. 나무들도 많아서 호흡이 무척이나 편했다.

스르륵.

깃발을 깃대에 돌돌 말아 묶은 이천상이 적야차번을 어깨에 걸치곤 보법을 펼쳤다.

마기를 동원한 본격적인 수련은 아니었다. 지금은 작전 중이니 함부로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천상은 충분히 몰입하고 있었다. 굳이 마기를 쏟아붓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움직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군.’

금강야차마공은 맨손 백타술의 무공들을 품고 있었다. 그중 권법이 금강마권(金剛魔拳)이고 장법이 야차혈장(夜叉血掌)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금강야차마공에는 그 마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보법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북천마혜보(北天魔慧步)다.

지금껏 이천상이 구사한 적 없던 보법이었다. 이유인즉, 금강야차마공이 칠 성에 도달하지 않으면 보법 구결에 맞도록 진기를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북천마혜보는 뛰어난 보법임과 동시에 금강야차마공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난해하다.’

워낙에 보통 마공과는 차원이 다른 난해함을 자랑하는 마공이었다.

북천마혜보도 그렇다. 금강마권이나 야차혈장도 보통 무공들은 아니었지만, 이 보법은 마학(魔學)답지 않게 공방일체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난해하지만,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권법이나 장법에는 그 초식에 맞는 보법이 구결 속에 알아서 녹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따로 보법이라 명시된 무공들은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운용만 제대로 하면 신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고, 퇴로를 빠져나가거나 적이 생각지도 못한 방위를 선점해 승부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보법 하나만 제대로 익히면 본신의 기량을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이천상은 단숨에 그것을 알아보았고, 보법 연마에 힘을 썼다.

그렇게 얼마나 수련했을까.

“열심이네요.”

스르륵.

바닥을 부드럽게 쓸며 다가온 발이 길쭉한 타원을 그리며 이천상의 몸을 완벽하게 바로 세웠다.

우아하면서도 멋스러운 동작이었다.

“왔나?”

나타난 사람은 주연교였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경계 근무가 끝나서요.”

“끝났으면 쉬어라.”

“딱히 쉴 생각이 나질 않네요.”

“그래도 쉬어라.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야 힘이 새어 나가지 않는다.”

“그러는 군주님은 웬 수련이에요?”

존대만 할 뿐, 말투는 그대로다. 서로가 선 위치만 다를 뿐, 대하는 것은 똑같단 말이다.

“적측의 위험도를 예상할 수 없는 임무다. 만에 하나를 위해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

“그 무공 하나 연마한다고 본래 실력이 두 배, 세 배 뛰겠어요?”

“세 배는 모르겠지만, 두 배 정도는 가능하다.”

농담처럼 물었는데 진지한 답변이 날아왔다.

주연교는 놀랐지만, 이내 웃어 버렸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단숨에 사령부의 수뇌부가 된 이천상이었다. 이제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는 게 편했다.

“한데 왜 힘들게 야차번까지 들고 수련하세요?”

“깃발이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나는 일군의 대장이다. 대장의 깃발이 꺾이지 않으면 야차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앞으로도 내가 야차번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열거하는 듯, 이천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듣는 주연교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무심했기에 더 강하게 느껴지는 진심이다. 그녀는 새삼 이천상이라는 사람이 갈수록 모호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 정이 갔다.

스르륵. 훅!

무거운 팔 척 깃대를 들고도 움직이는 두 발은 고요하고도 경쾌했다.

‘완전히 달라졌어.’

처음 만났을 때와는 수준이 다른 무(武).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와 같은 성장을 이뤄 낸 걸까.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주연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만 가 볼게요.”

괜히 그의 수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주연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몸을 돌렸다.

이천상은 대답도 하지 않고 보법을 밟아 가며 천천히 깃대를 휘둘렀다. 몰입한 것이다.

‘어렵군.’

깃발을 접어 깃대에 묶어 놓으니 말 그대로 철봉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길고 무거운 철봉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다른 병장기들도 훨씬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질은 해 봤지만 창질은 어설펐다. 범을 찔러 죽일 때 목창(木槍)을 써 보긴 했지만, 숨통을 끊어 내는 마무리용으로 쓴 연장일 뿐 그럴듯한 무공을 구현해 본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무공, 새로운 병기.

이천상은 인식하지 못했다. 제 얼굴에 떠오른 작은 미소를, 두 눈 가득 뿜어지는 강한 열정을.

그리고 가슴을 간지럽게 하는 이것이, 바로 즐거움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퍼엉!

멀리서 연막탄이 터졌다.

양건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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