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1화. 부딪침 (1)
귀빈실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청아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복건에 이만큼이나 단단한 기반을 잡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오.”
“과찬이십니다.”
“결코 과찬이 아니오. 북부 무림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소. 무림 문파는 물론 어떤 상단과 상가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상단주께서 이뤄 내셨으니, 이는 일대 쾌거라 할 수 있소이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초로인의 치하에 호상백이 고개를 숙였다.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아가 아직 할 일도 많습니다.”
“허허.”
“용권문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희가 언감생심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습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초로인, 용권문의 대장로 장춘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도와준 게 무에 있소. 그저 잔가지 몇 개 쳐 준 게 전부외다. 오히려 도움이라고 한다면야 숭산에서의 도움이 훨씬 컸소이다.”
웃음기 어린 그의 시선이 옆에 앉은 승려에게 향했다.
중년의 승려는 손톱만큼의 인자함도 느껴지지 않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일견 냉혹함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아무리 무림의 태산북두라지만, 불법을 모시는 승려의 외양이 아니다. 반개한 눈에서는 오욕칠정을 억누른 수행자의 담담함이 아닌, 쓸데없는 감정을 완전하게 배제한 인형과 같은 무심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마주하면 절로 긴장할 만한 외양.
호상백 역시 그러했지만, 장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떻습니까, 적인대사(寂忍大師). 상단의 규모가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렇구려.”
순간 호상백은 움찔했다.
승려, 적인대사의 목소리는 외양만큼이나 차가웠다. 듣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아득함이 느껴지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짧은 시간, 이렇게까지 상업을 키웠으니 그 노고가 대단하오. 능력도 능력이지만 마귀 놈들 앞마당에서 이만큼이나 판을 벌여 놨으니, 그 배포가 참으로 흡족하오.”
묘한 말투였다.
칭찬인데, 이상하게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말투와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허허, 그렇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를 뿐, 호 단주의 배포는 여느 무림 고수 못지않습니다. 이 임무가 얼추 끝이 나면, 훗날 큰일을 맡겨 봐도 괜찮을 사람입니다.”
호상백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어렸다.
큰일을 맡기겠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차후 힘을 키워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일굴 정파 무림에 한 자리를 주겠다는 뜻과 같다.
호상백이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맡을 만한 깜냥은 안 되는 사람입니다. 대장로님께서는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허허허! 능력과 배포가 있는 사람이 겸손까지 안다면, 이는 보통 인재가 아니지요.”
장춘이 적인대사에게 말했다.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복건의 여러 거래처를 독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복건을 장악하면 그 즉시 용권문을 발판 삼아 소림의 권사(拳士)들을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적인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방장 사형의 소관이오.”
“물론 그렇지요. 다만 대사님께서는 계율원주(戒律院主)로서 전 무림은 물론 사내(寺內)에서 크나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분이 아니십니까. 잘 말씀드리면, 방장 어른께서도…….”
“있는 그대로를 보고할 뿐이오.”
적인대사는 딱 잘라 말했다.
민망할 법도 한데, 장춘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크게 웃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굳이 꾸며서 얘기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하셔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부드러운 처세술이었다.
나이로 치면 장춘이 몇 살은 더 많았다. 충분히 무안해할 만한 상황인데도, 장춘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호상백은 어색해했고, 적인대사는 냉담했다. 중간에 장춘이 있어 그런대로 대화가 이어졌지만 그렇게 화기애애한 자리는 아니었다.
“저…….”
때를 잡았음인가.
호상백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엇이오? 말씀하시오.”
호상백이 힐끔 적인대사의 눈치를 보았다.
“어지간해서는 저희 선에서 처리할 것이며 실제로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보고는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교 놈들이 복건으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순간 장춘과 적인대사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마교 놈들이?!”
“그렇습니다.”
“설마 이곳을?”
호상백이 한숨을 쉬었다.
“정보원의 보고로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던 장춘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반면 적인대사의 표정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저 눈빛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호상백이 고개를 숙였다.
“저쪽에서 본 상단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병력의 이동 방향을 보면 이곳일 확률이 지극히 높다고 판단됩니다.”
“확신은 못 하지만 의심은 한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쾅!
호상백이 움찔했다.
탁자를 후려친 장춘의 몸에서 매서운 기운이 뿜어졌다.
“그것을 언제 아셨소?”
“조금 전입니다. 두 귀빈분을 뵙기 전에 보고를 들었습니다. 곧장 조치를 취한 후 오는 길입니다.”
“조치를 취했다?”
“저희 측에서도 병력을 보냈습니다.”
장춘이 인상을 찡그렸다.
“단주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소. 적어도 곁에서 본 나는, 단주가 실수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그리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람이길 포기한 무도하기 그지없는 놈들이기는 하나, 그 능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지.”
장춘이 적인대사에게 말했다.
“복건의 상업을 휘어잡은 것만으로도 호마상단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보다 훨씬 더 빨리 치고 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단주의 능력 덕에 늦춰진 거라고 봅니다.”
끝까지 호상백을 두둔하는 그였다.
적인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에 젖은 마귀들의 본능은 상식을 불허하는 면이 있소. 빈말로도 지혜롭다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읽기가 힘들지.”
“허허.”
적인대사가 호상백을 바라보았다.
호상백이 고개를 숙였다. 적인대사의 날카로운 눈빛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적인대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잘 말씀하셨소.”
뜻밖의 말이었다.
“공(功)에 눈이 멀어 정보를 숨기는 이들이 많소. 훗날 감당키 힘들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보다 이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소.”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오. 애초에 그대들의 일도 아니었소.”
왜일까?
호상백은 적인대사의 차가운 목소리에서 한 줄기 뜨거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이었다.
“병력을 보냈다 하셨소?”
“그,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이 되는 이들이오?”
“용권문의 지원 아래 잘 단련이 된 이들입니다. 단순 전력으로는 어지간한 중소 문파급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복건의 지형을 이용한 전투에 능합니다.”
적인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형 전투에 능하다 한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법.”
“…….”
“본사의 무승들을 데리고 왔으니 일이 틀어지면 곧장 보고하시오.”
그 말을 듣고, 호상백은 깨달았다. 적인대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호승심이었다.
적인대사는 마귀 놈들과 싸워보고 싶어 한다. 아니, 직접 죽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이군.’
장춘이 중간에서 잘 풀어 줄 거라고는 믿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실망의 기색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적인대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 잔뜩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
호마상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 정도만 알려 줘도 충분해. 여전히 비밀은 지켜 두는 게 좋겠군.’
솔직히, 마교에서 이리 빨리 병력을 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내도 한참 뒤에야 보낼 줄 알았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마교의 수뇌부 중 하나와 위험한 거래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건 소림과 용권에게 걸려선 안 되었다. 그들은 호마상단이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을 하지 않고도 복건에서 세(勢)를 불린 것으로 알고 있어야만 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호마상단을 위해서.
“당장에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 * *
귀창이 다스리는 삼군, 청기군이 움직였다.
파라라라락!
종렬로 이동하는 삼군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빠르게 줄을 세워 가면서도 전방에 장애물이 나오면 순식간에 흩어져 세 갈래, 네 갈래로 진형을 형성해 돌파한다.
그간 연마한 혈응진이 거의 완벽하게 몸에 배었다. 하지만 단순히 진법을 몸에 배도록 연마했다고 하여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다.
“대단하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허필이 혀를 내둘렀다.
“삼군이 저렇게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나?”
그의 감탄 섞인 의문에 이천상이 답했다.
“조장들의 능력이다.”
“예?”
“삼군주 귀창의 명령 아래, 진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조장들 몇몇이 축이 되어 철저하게 그의 수신호대로 움직이고 있다.”
“……!”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던 이천상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머리로는 쉽다. 중요한 건 머리로 아는 것을 그대로 행동에 녹일 수 있는 단호함이다.”
“조장들의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까?”
“나아가 조장들을 향한 조원들의 확신도 필요하다.”
이천상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어떤 부분에서 유능한지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에 따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람들은 머리로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태를 보일 때가 있다. 쓸데없는 분란은 바로 거기서 생기는 것이다.
이천상이 ‘확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는 타인의 출중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배웠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대와 서로를 신뢰하는 부대의 차이는 크다. 나도 이제야 그것을 배웠다.”
허필이 묘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의 변화 없는 이천상의 옆모습. 굴강하기 그지없는 그 단면에 약간의 ‘인간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한 허필의 착각일는지.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허필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우리도…….”
“잠시.”
“예?”
이천상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오십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삼군이 갔으니, 그들 역시 적당히 거리를 벌려 뒤를 따라야 했다.
하지만.
‘……튀었다.’
우우웅.
이천상의 눈에 은은한 금광이 일었다.
‘분명, 한 줄기 기세가 강하게 튀었는데.’
마기가 아닌, 뭔가 은밀한 기운 하나가 날카롭게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너무 순식간이었다. 착각이라고 넘겨도 무방할 정도였다. 살기 짙은 짐승의 기운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절대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주 조장.”
“예, 군주님.”
“조원들과 함께 삼군주에게 가라.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이천상의 말을 들은 조장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주연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겠습니다.”
파아아아악!
주연교와 휘하 마인들이 그대로 절벽을 뛰어내렸다.
펄럭!
적야차번을 든 이천상이 야차들 중앙으로 걸어갔다.
“모두 조용히, 전투를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