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3화. 부딪침 (3)
“그랬단 말이지?”
“예!”
귀창이 저 멀리 후방을 바라보았다.
본래 사령부 야차들이 집결해 있던 야산 봉우리가 보였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이곳에서는 봉우리가 워낙 높아 보였다. 그 너머에 있는 절벽이나 숲 따위 보일 리가 없었다.
‘습격 부대라.’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천상은 호마상단의 전력이 무림의 어지간한 중소 문파 이상이라고 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마상단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했다면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맞다.
게다가 상단 특성상 당연히 정보력도 뛰어날 터. 신교에서 출발한 부대가 복건에 들어왔다는 것을, 거대 상단의 힘이라면 충분히 알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시.’
귀창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양건은 연막탄을 한 번 터트린 후, 또 한 번 푸른 연막탄을 터트렸다.
푸른 연막탄은 본대가 오기 전까지 대기하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적의 정체나 위치, 전력이 모호하여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인책인가.’
귀창은 집단전 경험이 많은 마인이었다.
병력을 이끌어 본 경험도 많고, 당연히 야전 경험도 상당했다.
‘보통 적을 유인할 경우 함정을 파고 산개하여 잡으려 든다. 하지만 만약 놈들이 후미에서 기습을 감행할 목적이었다면, 전방에 함정 따위는 없다. 그렇게까지 조직 전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끝까지 유인하려 할 것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끌어내어, 종렬(縱列)로 늘어선 부대의 밀도를 성글게 만들 생각일 것이다.
밀도가 낮아진 종렬의 부대는 후방이나 측방, 어떤 부분에서의 습격에서도 취약해진다.
귀창의 눈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만약 후방 기습을 염두에 두고 첨병조와 함께 우릴 유인할 생각이라면, 생각보다 까다로운 싸움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부대를 유인하여 상대하겠다는 작전 자체를 실행하기 어렵다.
그것은 부대원의 무력과는 무관한 문제였다. 눈치가 빨라야 하고 서로 짧고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는 방법이 있어야 하며, 당연히 손발도 맞아야 하고, 결정적으로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해야 한다.
그런 것은 한두 해 훈련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한두 번의 경험으로 얻을 수 없는 힘이다.
그것만 봐도 훈련된 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형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이 지형에 딱 알맞은 기습전이다. 만약 후방 기습을 주요 공격선으로 본다면, 혼란에 빠진 사령부가 사방으로 흩어질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귀창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허둥대다가 싸그리 몰살할 판이군.’
물론 적의 기습에 허둥대다 제멋대로 흩어질 만큼 야차들은 만만하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각 조직에서 한 주먹들 한 놈들이지만, 하나의 부대가 되어 움직인 것은 처음이었다.
“알았다. 그럼 일군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그때였다.
퍼어엉!
강렬한 폭음이 메아리가 되어 이곳까지 들려왔다.
야산 봉우리 뒤쪽이었다. 시야에 잡히지 않는 후방에서 터진 폭음은 바로 발경으로 인한 것이었다.
귀창의 눈이 번뜩였다.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자네는 지금 당장 본대로 귀환해라!”
“예!”
주연교는 곧장 조원들을 이끌고 후방으로 움직였다.
귀창이 이군의 선임 조장, 설이전에게 명했다.
“이군 역시 후방으로 물러나라! 야산 봉우리에서 대기해!”
“명을 받듭니다!”
펄럭!
백야차번을 든 설이전이 이군을 이끌고 다시 후방으로 향했다. 인원수가 많아서 주연교가 이끄는 소수조보다 느렸다.
귀창이 외쳤다.
“삼군은 첨병조까지 이동한다! 속도를 높여라!”
중간에 이군을 남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정식 지휘자가 없는 이군을 덩그러니 남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차라리 일군의 예비대 개념으로 붙여 주고, 일군이 위험에 처할 시 함께 싸우도록 전력을 보강하는 것이 나았다.
청야차번을 들고 전진하는 귀창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각 안에 싸움이 종료되지 않으면, 우리도 후방으로 가야겠군.’
경험 많은 귀창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천상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실전에서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질 것 같으면 미련 없이 후퇴해야 하네. 자네를 믿겠어.’
* * *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뜯긴 수풀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무차별로 돌진하는 흑호 하나가 잡풀과 함께 날아갔다. 옆구리가 움푹 꺼진 채였다.
팔 척 길이의 철번(鐵幡)은 그 자체로 흉기나 진배없었다. 거기에 금강야차마기가 실리니,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흑호 하나를 날려 버린 이천상이 재차 돌진하며 전방 흑호 둘을 향해 철번을 휘둘렀다.
퍼억! 쩌어엉!
흑호 한 놈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하지만 다른 한 놈은 죽이지 못했다. 허리춤에서 뽑은 두 자루 단검만 부쉈을 뿐이었다.
파아아악!
비틀거리던 흑호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어느새 이천상을 지나친 새로운 삼 조장, 단리우가 흑호의 명치에 철조(鐵爪)를 박아넣은 것이다.
파파파파팡!
퇴로 앞에 진을 치고 있던 흑호들이 일군 본대를 향해 암기를 뿌렸다.
이천상의 안광이 순식간에 암기들을 포착했다.
“건드리지 마라.”
수백 개의 암기는 하나하나가 작고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암기는 그냥 피하거나 차력미기(借力彌氣), 이화접목(移花接木) 등의 수법으로 빗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천상은 그런 신묘한 무리(武理)를 체득하지 못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파라라라라라락!
일 장에 달하는 깃발에 금빛 마력이 깃들었다.
허공을 휘젓는 적야차번, 그 앞에 무시무시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내공을 담아 쏘아 냈지만, 암기들은 하나같이 중량이 가벼웠다. 수백 개의 암기들은 적야차번으로 일으킨 내력의 돌풍으로 인해 대부분 우측방으로 휘어져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퍽! 푸스스스.
돌풍에 휩쓸리지 않은 몇몇 암기가 야차 하나의 몸통에 박혔다.
“컥!”
몸에 박힌 암기가 터지며 시커먼 연기를 풍겼다.
야차의 피부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의 옆에 있던 야차 셋도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풀썩!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퇴로로 향하다가 죽은 흑호들과 똑같은 죽음이었다.
‘…….’
죽은 야차들을 일별한 이천상이 강하게 땅을 밟았다.
퍼엉!
단리우의 눈이 커졌다.
‘빠르다!’
대지를 박차고 튀어 나간 이천상은 어느새 흑호 무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속도가 가히 질풍과도 같았다. 지금껏 이천상이 보여 준 적 없던 경신술이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흑호들조차 이천상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군주님!’
신법에 놀라기도 잠시, 곧바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십의 적이 우글거리는 곳을 향해 대장이 뛰어들었다. 대장이 죽으면 그 부대도 치명타를 입는다.
단리우가 외쳤다.
“몰아붙여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군주님을 따라잡아라!”
이천상의 무지막지한 돌진에 당황하여 몸을 돌린 흑호들은, 갑작스레 증폭되는 살벌한 마기에 놀라서 일군을 돌아보았다.
“……!!”
잔잔했던 흑호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두 눈 가득 귀신 같은 마기(魔氣)를 피워 올리며 달려드는 마인들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들 역시 마교도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마인들은 다소 기괴한 기운을 풍기고만 있을 뿐, 똑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대장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죽여 없애기 위해 작정하고 달려드는 야차들의 몸에서는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지독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기는 살기와 어우러지며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기괴한 역천마기를 몸에 두르고 살기라는 불꽃을 등에 진 채로 달려드는 야차들의 모습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
“죽여!!”
만요는 깜짝 놀랐다.
임무 중 어떤 일이 발생해도 침묵하는 것이 흑호대의 규율이다. 한데 그 흑호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정신들 차려라!”
그때였다.
퍼어엉!
흑호 하나가 만요의 전면으로 날아왔다.
딱 봐도 알겠다. 이미 저놈은 죽었다.
만요가 거치도(鋸齒刀)를 뽑아 들었다.
카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호의 몸이 양단되었다. 잘린 몸뚱이의 단면이 맹수의 이빨로 물어뜯기기라도 한 양 거칠게 너덜거렸다.
‘뭐야.’
잘린 흑호의 상반신을 본 만요의 눈이 흔들렸다.
후욱!
흑호의 상반신에는 붉은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맨살이 아니다. 옷 위다. 그런데도 붉은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금강야차마공, 야차혈장(夜叉血掌)이었다.
만요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퍼퍽! 퍼엉!
흑호 셋을 튕겨 내며 돌진하는 맹수가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황소 같다. 하지만 그 황소는 두 개의 뿔만이 아니라 늑대의 이빨과 호랑이의 발톱까지 달고 있었다.
만요는 이를 악물었다.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상대의 몸에서 풍기는 무거운 마기가 온몸을 옭아맸다. 마치 바닷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으압!”
쾅!
기합과 함께 진각을 밟는다. 그러자 상대의 기파에 오그라들었던 심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만요가 버럭 외쳤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사술을 쓰는 것이냐!”
이천상이 힘차게 왼 주먹을 휘둘렀다. 문답무용이었다.
펑!
망치처럼 똘똘 뭉친 무형의 바람이 만요에게로 날아들었다.
권풍(拳風)이었다. 전에는 제대로 날려 본 적 없는 권풍의 수법을 자연스레 펼친다. 기가 막힌 완성도였다.
만요가 거치도를 휘둘렀다.
쩌엉!
거칠고도 날카로운 참격이었다.
일격에 권풍이 동강이 나 버렸다. 하지만 권풍을 갈라 버린 만요는 정작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놀랐다.
‘이런!’
훅!
이윽고 만요의 앞에 선 이천상이 순식간에 자세를 낮추었다.
번쩍!
벼락처럼 휘둘러진 거치도가 이천상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만요는 기겁했다.
‘피해?!’
이건 실전이었다. 적의 수장을 보았으니, 힘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만요가 내친 일격은 흑호대섬(黑虎大閃)이라는 비기였다. 알고도 막기 힘든 속도와 바위도 갈라 버리는 절삭력을 지닌 극한의 쾌도(快刀)인 것이다.
그 비기를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피해 냈다. 보고 피한 게 아니라, 휘두르기 직전에 이미 자세를 낮춘 것이다. 마치 흑호대섬의 투로를 미리 읽기라도 한 것처럼.
회심의 일격을 너무 쉽게 피해 낸 상대 앞에서 만요는 극도로 당황했다. 그리고 그의 당황이 순식간에 승패를 갈랐다.
이천상의 좌권이 만요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콰득!
큼직한 주먹이 갈빗대 네 개를 부수고 움푹 들어갔다. 만요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티링!
어떻게든 거치도를 휘둘렀지만, 그 칼은 철번에 막혀 버렸다. 철번을 때린 거치도는 이가 잔뜩 빠져 있었다.
이천상의 무릎이 만요의 복부를 후려쳤다.
빠각!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 곳곳에 박혔다. 만요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콰득!
쓰러지는 만요의 목을 잡아 꺾은 이천상이 그의 몸통에 깃대를 쑤셔 박았다.
주르륵.
만요의 몸통을 꿰뚫은 철번이 두 번째 깃발을 달며 빨갛게 울었다.
이천상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적야차의 깃발과 함께 나부끼는 만요의 몸통이 춤을 추었다.
“……!”
잔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이 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적아의 구분 없이, 모두의 얼굴에 생생한 충격이 떠올랐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기를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