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4화. 부딪침 (4)
대장이 잡힌 전투는 세 가지 경우로 끝을 맺는다.
적의 투항, 적의 반항, 그리고 적의 자결이다.
흑호들은 그중 두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퍼버버벅! 서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흑호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마지막 발악과 함께 야차일군을 공격했지만, 이미 대장이 잡힌 판국이다. 심지어 너무나도 끔찍한 몰골로 죽어 버렸으니 사기가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아 남은 흑호들이 정리되었다.
“군주님.”
이천상이 고개를 돌렸다.
허필과 일 조원들이 아홉 명의 흑호를 데리고 왔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마혈이 짚여 제압당한 그들의 눈빛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마인들을 향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천상을 향한 공포였다.
“혹시 몰라서 몇몇을 사로잡았습니다. 대장을 제외, 무리를 이끄는 조장 역을 하는 놈들 같았습니다.”
적의 조직력을 파악하지 않았다면 조장 역을 하는 적이 누구인지 알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필의 안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천상이 무감한 눈으로 흑호들을 내려다보았다.
움찔!
이천상과 시선을 마주친 흑호들은 저마다 눈을 피했다. 똑바로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끄러미 그들을 보던 이천상이 담담히 말했다.
“일 조장.”
“예, 군주님.”
“나는 분명, 다 죽이라고 하였다.”
오싹!
이천상의 말을 들은 이들은 적아를 불문, 모두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허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허필이 조원들에게 눈짓했다.
조원들이 도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살 떨리는 소리와 함께 흑호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이천상이 말했다.
“전열을 정비해라. 또 다른 후방 급습 부대가 없는지 확인 후, 삼군 뒤에 붙겠다.”
“존명!”
야차들이 제각기 상처를 돌보며 무기를 점검했다.
어느새 도착한 주연교가 이천상에게 다가왔다.
“삼군주께서 저희를 보냈습니다. 혹시 몰라 이군도 거점으로 보냈습니다.”
“이군에게 가서 다시 삼군에게 붙으라 명해라. 주 조장 역시 이군과 함께 삼군에 붙는다.”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주연교가 조원들을 이끌고 다시 이동했다.
우우웅.
이천상은 금강야차마공을 끌어 올렸다.
‘감각에 걸리진 않는군.’
한참 떨어져서 은신했던 이들의 기척을 읽었다.
지금의 이천상이 갖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예민함이었다. 한데도 그는 한 줄기 기(氣)가 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천상은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이 정도 거리에서 은신한 고수들의 기척을 알아챘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금강야차마공이 안정적으로 칠 성에 안착했다. 분명 높은 경지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진 않아.’
성취는 칠 성이지만, 품고 있는 마기의 질은 팔 성에 이른 진기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기의 밀도가 이룬 성취보다도 높다는 것이다.
기의 질이 높다는 것은 곧 무인으로서 이룬 경지가 높다는 것이다. 한데도 마공이 팔 성에 오르지 않았다는 건 이천상과 마공 사이의 뭔가가 틀어졌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감각이 들쭉날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팔 성에 오르면, 이 정도 기척은 읽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이천상의 두뇌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유추하긴 어렵다.
이천상은 고민을 접었다.
‘지금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일단은 내 감각이 칠 성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감안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때였다.
“군주님.”
삼 조장 단리우가 다가왔다.
“말하라.”
“정비는 끝났습니다. 일군 전체가 즉각 움직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알겠다.”
“그리고…….”
단리우가 머뭇거렸다.
“죽은 야차들은…… 어떻게 할까요?”
이천상이 한옆에 모인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단리우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면, 묻어 주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이천상의 일 처리는 무척이나 빠르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냉정하고 건조하기도 했다.
그런 대장의 모습은 야차들의 존경을 자아냄과 동시에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세웠다.
출중한 실력자이자 믿고 따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장. 진법 훈련 때부터 후방 기습 부대를 반대로 역습한 지금까지, 이천상이 스스로 증명한 그의 위치였다.
단리우가 유독 조심스럽게 묻는 이유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이천상이 말했다.
“옷과 소지품을 모두 벗겨라.”
“예?”
“…….”
“아, 예!”
야차들이 죽은 전우들의 옷과 소지품을 거두었다.
이천상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숲. 이곳을 제외한 사방이 불바다였다.
“태워라.”
야차들이 움찔했다.
명을 내리고 선두로 가려던 이천상은 순간 ‘신뢰’에 대해 생각했다.
삼군의 이동 속도를 보며 감탄하던 허필에게 신뢰의 중요성을 말한 그였다. 그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아들인 지금의 이천상 역시 이전과 같다고 볼 순 없었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죽어서 불의 곁으로 갈 것이다.”
불의 곁.
신교의 상징이자 신(神) 그 자체인 천마(天魔)는 하늘에서 벼락을 끌어오고 지옥에서 겁화를 일으키는 존재라 하였다.
하여 마인들은 유독 불에 친근했다. 다른 지역보다 화장(火葬)에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
“전투에서 내가 죽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너희 할 일을 해라.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 난다면, 나 역시 불에 태워 다오.”
“…….”
“나도 너희를 태워 욕계로 먼저 보내 주겠다. 그것이 임무 중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례다.”
야차들의 얼굴에 숙연함이 어렸다.
단리우가 고개를 숙였다.
“군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야차들이 죽은 전우들을 타오르는 불길에 던졌다.
탐스러운 먹잇감에 신이 난 듯, 불줄기가 넘실거리며 시신을 뒤덮었다.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리는 불길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천상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움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왠지 모를 통증이 느껴졌다.
육체는 아픔을 호소하지 않는데, 왜 그것을 통증이라고 인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가슴을 쓰다듬은 이천상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길을 헤치고 나아간다.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파아악!
적야차번을 든 그가 몸을 날리고, 충성스러운 야차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 * *
파앙!
거점에서 올라온 연막에 귀창이 눈을 빛냈다.
‘이리로 오는군.’
적의 전력이 감당키 힘들어 후퇴하는 중이었다면 이군도 거점에서 더 후방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해결됐다는 뜻.’
적을 물리쳤는지, 아니면 쫓아만 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리로 붙겠다는 것은 저쪽 상황이 잘 해결됐음을 뜻한다.
그렇게 믿고 가야 했다. 전투란 그런 것이다.
귀창이 청야차번을 들었다.
“속도를 올려라.”
파아아악!
우거진 숲을 헤치며 올라간 귀창의 눈에, 저 멀리 대기하고 있는 일 조와 삼 조가 보였다.
파바바박!
삼군 전체가 힘차게 신법을 펼쳤다. 아군이 무사한 것을 보았으니,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군주님.”
양건이 고개를 숙였다.
귀창이 물었다.
“상황은?”
“아무리 봐도 적의 유인책 같습니다.”
“결과를 내기 이전에 상황을 설명해라.”
양건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짧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 기습으로 우리를 노리려던 게 맞군.”
“역시 그랬군요.”
“음?”
귀창이 묘한 눈으로 양건을 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양건이 혼잣말을 우르르 쏟아 냈다.
“치고 빠지는 게 너무 묘했어. 앞에 함정을 깔아 두었다고 보기에는 진지함이 결여된 느낌…… 철저하게 우릴 노릴 생각이었다면 훨씬 더 역동적으로 상대했겠지.”
“그게 무슨 말인가?”
“예?”
양건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저는 놈들이 앞에 함정을 깔아 두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정쩡했습니다. 진짜 함정이라면, 한두 번의 교전은 일어났어야 정상이었지요.”
“……?”
“놈들의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말하자면 끌고 오는 것보다 이곳에 묶어 두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창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어렸다.
‘이 녀석 봐라?’
감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괜히 이놈을 첨병조로 보냈겠는가.
하지만 적의 대응을 보고 한 수 앞을 넘어 두 수 앞을 생각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경험이 있어도 어렵다.
“일 조장 양건.”
“예, 군주님.”
“이번 전투, 자네가 임시로 선임 조장을 맡는다.”
양건은 깜짝 놀랐다.
“제, 제가요?”
“반문은 허락하지 않겠다. 만에 하나 내게 문제가 생기면, 네가 이들을 이끌도록 한다. 알겠나?”
“명을 받듭니다.”
고개 숙여 대답하면서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귀창은 생각했다.
‘나는 아직 조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나하나의 능력을 전부 파악하진 못했다. 그건 양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임시’라는 조건을 단 것이다.
만약 이번 임무에서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면, 정식으로 선임 조장을 맡겨도 될 듯했다.
귀창이 야차들에게 지시했다.
“일군과 이군이 올 때까지 대기토록 한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대열을 유지한 채 휴식하라. 긴장은 풀지 말도록.”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펄럭!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 소리가 유독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오셨는가.”
마침내 일군과 이군이 도착했다.
귀창이 물었다.
“상황은?”
“일백에 이르는 후방 기습 부대와 교전했소.”
“역시 그랬군. 결과는?”
“섬멸했소.”
귀창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휴식은 더 취하지 않아도 되겠나?”
“임무 중이오.”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싸워야 할 땐 싸운다는 뜻이다.
살짝 웃으며 말을 이으려던 귀창은 문득 일군을 돌아보았다.
‘…….’
전체 수를 생각하면 지극히 일부만 떨어져 나간 셈이다. 그러나 언제나 함께 진법 훈련을 했던 귀창은 눈대중만으로 일군에 사망자가 생겼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귀창이 이천상을 보며 물었다.
“괜찮은가?”
“무엇이 말이오?”
무심하기 그지없는 표정, 그리고 목소리.
물끄러미 그를 보던 귀창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앞에 적이 있다고 하네. 함정을 판 건 아닌 걸로 보이네.”
“우리의 뒤를 쳐서 이곳에 묶어 두려는 것이 놈들의 계획 같소.”
“역시 똑똑하군.”
“어떻게 하시겠소?”
잠시 생각에 잠긴 귀창이 툭 던지듯 물었다.
“평지가 낫겠지?”
“물론이오.”
“령주님과 이군주가 향한 방향 그대로 진군하지. 지도상으로는 이곳에 평야가 나온다네. 이곳에서 대기하면 될 것 같군.”
“그곳까지 진군하는 걸로 합시다.”
“좋네.”
그렇게 야차사령부가 하나 되어 진군했다.
이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강한 긴장감, 비로소 적지에 도달했음을 피부로 느끼는 그들이었다.
일군, 이군, 삼군의 순서로 진군하던 사령부.
이변이 생겼음을 인식한 건 행군한 지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전군 정지.”
적야차번을 들고 야차들을 정지시킨 이천상.
저 멀리 협곡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유독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귀창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살기요.”
기감을 증폭한 귀창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그렇군.”
“한데 문제가 있소.”
“문제?”
“무연향이 끊겼소.”
“……!!”
귀창의 눈이 흔들렸다.
“……령주님.”
이천상이 무심하게 말했다.
“뚫고 갈 것인가, 이곳에 대기해야 하는가 판단을 내려야 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