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0화. 몰아치는 피바람 속에서 (5)
툭. 투둑.
적미의 얼굴에 허망함이 깃들었다.
한 자루 대검에 가슴이 꿰뚫린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서늘한 안광을 빛내고 있는 마귀도.
율적산이 침을 삼켰다.
‘엄청나시구나.’
적미와 함께 있던 젊은 소림승들을 싹 쓸어 버린 양백호는 순식간에 율적산의 싸움에 개입,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들을 베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악하고 무시무시했는지, 양백호를 믿고 따르는 율적산조차도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끝까지 따라붙는 적미를 기가 막힌 보법으로 희롱하는 한편, 지형지물과 죽은 시체들을 이용하여 절대 덤비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공 이전에, 이는 전투에 지극히 익숙한 전사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싸움법이었다.
적미는 소림승들에게 도망치라고 했지만, 소림승들은 그조차도 못 했다. 중간중간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양백호의 조롱과 도발이 소림승들의 움직임을 봉쇄한 것이다.
‘칼질만 잘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말과 기세만으로 적의 움직임을 마음대로 조종하다니…….’
그간 양백호가 보여 준 적 없던 능력이었다. 율적산은 새삼 양백호가 경험 많은 군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경험이란 건 중요한 법이지.”
양백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 아닌가? 적을 잡아 죽이려면, 내가 죽을 각오도 했어야지.”
적미가 사질들을 데리고 온 것은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불가의 항마기는 마도무림의 마공과 상극이니까.
실제로 적미는 많은 마인과 생사결을 벌여 보았다. 그 모든 마인이 소림의 항마신공 앞에 힘다운 힘도 못 내 보고 패사하였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법. 소림의 무공은 위대했고 무수히 많은 소림승은 마인을 상대하며 불법의 지고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했던 것은 얼치기 마공을 익힌 잡스러운 마귀들이었을 뿐이었다.
신교 정통의 마공을 익힌 진짜 마인들의 힘은 소림과 호각을 이룬다. 천지의 모든 이치에 ‘절대’는 없는 법, 성하고 가라앉길 반복하는 세상사의 흐름을 적미는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물은 불에 상극이나, 압도적인 불은 물을 증발시켜 버릴 수도 있다. 상극이란 그런 것이다.
촤아아악!
잔혹한 행위였다.
가슴에 대검이 꽂힌 채 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던 소림승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좌우로 갈라진 소림승 사이로.
어느새 양백호가 사라졌다.
‘……!’
충격에 휩싸여 있던 적미는 순간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서걱!
“크윽!”
늦었다.
적의 빈틈을 만들고 벼락처럼 약점을 노린 양백호. 그 화려하기 그지없는 대검의 공격에 적미의 왼팔이 날아갔다.
파아악!
물러나는 적미의 뒤에는 어느새 율적산이 있었다.
적미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이 비겁한!!”
쾅!
“컥!”
율적산의 일권에 등판을 맞은 적미가 그 자리에 엎어졌다.
본래 율적산의 주먹에 당할 만큼 만만한 그가 아니었다. 사질들을 다 잃었다는 허망함과 양백호의 기세에 압도당한 마음이 빈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철컹.
양백호가 적미의 목덜미에 대검을 대었다.
적미의 눈이 흔들렸다.
불법무한, 소림 무공의 달인으로 금강의 부동심을 얻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질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적의 기세에 압도당한 그의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만큼이나 연약해졌다.
“하나 묻겠다.”
양백호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차가운 검날, 등 뒤에서 쏟아지는 살벌한 마기에 적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은 소림승이 얼마나 있지?”
적미가 버럭 외쳤다.
“내가 너 같은 마귀 놈에게 굴복할 것 같으냐!”
“그럼 아닌가?”
“이익! 내 비록 수양이 얕아 네놈들에게 패배했지만, 마음만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로 나를……!”
서걱!
적미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깔끔하게 베인 목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양백호가 냉정하게 검을 털어 냈다.
“가자.”
“예.”
단호하기 그지없는 손속이었다. 시간 낭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납검하며 신법을 펼치는 양백호를 뒤따르던 율적산이 물었다.
“아까 저 땡중이 말하기로 계율원주 어쩌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네.”
“계율원주라면 소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자리일 겁니다. 아마 어느 정도의 병력을…….”
“오고 있다.”
“예?!”
양백호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산길 너머, 어렴풋이 연성 거리가 보였다.
“계율원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
“그 기세가 나에 못지않아. 조만간 이곳으로 들이닥칠 테니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듯하다.”
박빙의 이름 모를 소림 고수라면 율적산까지 있는 지금 하나라도 더 잡는 게 이득일 수 있다.
그러나 양백호는 냉철했다.
직접 그 전력을 확인하기에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명백하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면 모르지만, 아직은 모호했다.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지.’
싸운다 해도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무사 대 무사로서의 승부는 환영이지만, 지금의 그는 야차사령부를 이끄는 대장이었다.
‘이미 충분히 시간을 낭비했다.’
하물며 무연향까지 끊겼다. 부하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퇴각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양백호의 눈이 깊어졌다.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쿠르르릉!
산마루를 타고 내려오는 야차일군의 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적 부대를 보며 긴장은 했지만, 특유의 호승심 넘치는 기세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널따란 평야에 늘어선 적을 마주하곤 더더욱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저놈들인가.”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 스스로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귀호대주는 귀호대주였다. 밤송이 같은 수염과 거대한 덩치의 그는 경갑을 입고 장창을 들고 있어서 마치 전장의 장수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소.”
우이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차일군을 보는 그의 눈에는 강한 분노와 수치심이 깃들어 있었다.
놈들을 끌어내 유인하는 것이 혈호대의 임무였다. 하지만 보란 듯이 역습을 당해 팔 할에 이르는 부대원들을 잃었다.
혈호대 역사에 이처럼 뼈아픈 사건은 없을 것이다.
“얕봐선 안 될 놈들이오.”
“지금껏 귀호대는 적을 맞이함에 있어 단 한 번도 상대를 얕본 적이 없네.”
우이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호대주의 말은 마치 너희가 상대를 얕봤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귀호대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멍청한 놈.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혈호대를 호검단 최고의 부대로 만들겠다며 우쭐대던 우이곤의 행태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능력만큼은 확실했지만,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만심이 눈에 띄게 엿보였다.
‘차라리 잘됐어.’
으스대던 우이곤이 크게 한 방 맞은 것은 분명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호검단의 전력 손실이 너무 컸다. 흑호대는 물론 혈호대까지 당해 버렸으니 이 손실을 메우려면 짧게는 오 년, 길면 십 년을 더 투자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오늘의 패배가 호검단에게는 분명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마음을 다잡는 사이, 산마루를 타고 내려온 적 부대는 백여 장 넘게 떨어진 곳에 멈춰 도열했다.
“한데.”
귀호대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것뿐인가? 오백에 이르는 대(大)부대라고 들었는데.”
“모, 모르겠소. 아마도 후방에 대기하고 있거나 전력을 분산하여…….”
우이곤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작정 도주하느라 바빠서 적의 부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도 읽지 못한 그였다. 애초에 워낙 많은 인원이 당해서 다시 첨병조를 보낼 여유도 없었다.
귀호대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도주하면서도 적의 동태를 제대로 살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자네들의 일이었어.”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한데 혈호대는 그것조차 안 하고 본대인 귀호대까지 쭉 달려온 것이다.
“이번 사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네. 단주님께 보고될 터이니 조금이라도 과(過)를 줄이고 싶다면 이번 전투에서 눈에 띄는 공(功)을 세워야 할 걸세.”
“알……겠소.”
귀호대주가 다시 야차일군을 보았다.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대장 뒤로 도열한 마교도 놈들에게서 무척이나 살벌한 기세가 느껴졌다.
‘과연 보통은 아니군.’
기세도 기세지만, 세 개의 부대로 쪼개어 도열한 모습만 봐도 알겠다. 놈들이 진법을 제대로 연마했음을.
‘우리와는 달라. 튼튼하고 힘이 좋은 건 우리겠지만, 더 빠른 기동성을 자랑하는 것은 저놈들 쪽일 것이다.’
한눈에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는 귀호대주의 안목은 특별한 것이었다.
‘정면 승부를 낸다면 절대 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부대다.
눈에 보이는 적 부대의 숫자는 대략 백오십 정도다. 적의 총 전력이 오백이라면, 그중 삼분지 이가 사라진 것이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나? 아니면 우회?’
우회해서 뒤를 칠 작정이라면 그것도 꽤 문제다.
하지만 귀호대에는 잘 훈련받은 궁사들이 오십 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호검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근접전의 격검(擊劍)에도 능한 고수들이었다.
‘만약 우회하여 후방 기습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적측에 상당한 지략을 지닌 지장(智將)이 있다는 뜻이다.’
진법에 능한 움직임, 거기에 실전에서 부대를 나눌 수 있는 배포와 지혜.
‘혈호대가 그냥 당한 것이 아니야. 상당한 기량을 지닌 부대야.’
어찌 되었든, 이대로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귀호대주가 외쳤다.
“전투 준비!”
치리리리링!
궁수를 제외한 귀호대원 이백오십 검사들이 발검했다.
그들의 검은 평범한 장검보다 더 길고 두꺼웠다. 양백호가 쥐고 휘두르는 대검만은 못했지만, 거친 전장에서 베고 찌르기에 능한 군용검(軍用劍)의 형태였다.
‘일단은 부딪쳐 볼까.’
귀호대주가 창을 들었다.
“전군, 진……!”
그때였다.
쿠르르릉!
돌연 적이 무서운 속도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귀호대주는 깜짝 놀랐다.
백 장이 넘는 거리에 숫자도 많고 궁수까지 있는 부대에게 무작정 달려드는 꼴이라니? 하물며 귀호대에게 이곳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저놈들이 단단히 미쳤군.’
내심 코웃음을 치며, 귀호대주가 외쳤다.
“중진까지 서행 진군이다! 후진 궁사들은……!”
순간 귀호대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뭐야?’
빠르게 달려오는 적 부대.
한데 그중 선두에서 깃발을 휘두르는 한 마교도가, 어느새 오십 장 거리를 통과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심지어 그곳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때, 귀호대주와 이천상의 눈이 먼 거리를 격하고 부딪쳤다.
부리부리한 장수의 눈과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엿보이지 않는 마귀의 눈.
‘……!!’
귀호대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쏴라! 선봉의 기세부터 꺾어라!”
피피피피핑!!
후진에서 쏘아 낸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지워 냈다.
이천상이 야차번을 들었다.
“산개.”
파바바바바바박!!
수십 발의 화살이 이천상의 모습을 지워 냈다.
그 뒤.
세 개에서 어느새 네 개로 분화된 야차일군이 좌우로 찢어져 돌격했다.
카드드드득!
그리고 중앙.
깃발로 화살을 모조리 튕겨 낸 이천상의 몸에서 황금빛 마기가 불타올랐다.
“측방을 물고 늘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