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6화. 마(魔)와 정(正) (4)
양백호의 생각은 명확했다.
“호마상단 일대의 민간인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침투하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도 말이 안 돼.”
“…….”
“그 앞까지 진군하고, 새벽을 틈타 삼방(三方)에서 기습 침투하는 작전으로 가야겠네.”
율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창이 손을 들었다.
“민간인들이 많습니까?”
“많기도 하지만, 더 문제는 그들의 생계가 호마상단에 달려 있다는 거지.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의 외형만 보면 그렇다고 보네.”
“음.”
“차라리 살기 퍽퍽한 동네라면 또 달리 생각했겠지. 그곳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네. 유동 인구도 많고, 꽤 많은 주루가 자시 넘어서까지 영업하지.”
“활기찬 도시라…….”
“해서 우리가 치고 들어가는 시간은 인시(寅時) 정(正) 정도가 알맞지 않나 싶네.”
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령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희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양백호가 옅게 웃었다.
“상명하복은 좋지만, 더 좋은 생각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 주게. 시간도 없는데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좀 미안하긴 하네만.”
율적산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음?”
“민간인들의 피해 말입니다.”
양백호와 귀창의 눈이 번뜩였다.
율적산이 말을 이었다.
“민간인을 고려해 기습 침투를 감행한다고는 하나, 경우에 따라 피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눈에 거슬린다고 베어 버리거나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싸움이 커지면 그 와중에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다.
일례로 사소한 불똥이 튀어 화재를 일으키거나 적군, 혹은 아군의 암기나 비수가 잘못 날아가 민간인들이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새벽을 노리고 있지만, 그 시간에 깨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도 소수나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율적산이 말하는 피해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해서 해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정말 ‘최소화’를 원하는 건지 묻는 것이다.
“본교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임무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양백호의 입장은 확고했다.
“민간인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 만약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흥분해서 민간인까지 다치게 만드는 놈들이 있다면 내 손으로 찢어 죽일 것이다.”
“…….”
“그러나…… 임무 도중 의도치 않게 민간인이 다치게 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무림인끼리 싸우겠다고 말하는 순간, 그 일대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양백호는 마인이지만, 마인보다는 군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가 뱉은 말은 철저히 군인으로서의 사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율적산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귀창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양백호가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은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군주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가?”
이천상이 고개를 들었다.
“예.”
“말씀하시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따르겠지만, 제 의견을 묻는 거라면…….”
“그래, 기탄없이 말씀하시게.”
“저는 이 작전은 물론 방금 령주님께서 하신 말씀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귀창과 율적산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성격이라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질책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임무 중이었고, 솔직하게 말하라고는 했으나 상관을 능멸할 수도 있는 발언은 용인해선 안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이천상의 성격을 알기도 하거니와, 그의 두뇌가 확실히 비범하다고 느낀 까닭이다.
그것은 양백호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가감 없이 말하라고 한 사람은 그였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계속 말해 보게.”
“작전 이전에,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로 령주님의 의견을 수용하기 힘듭니다.”
“두 가지 이유?”
“첫 번째.”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그곳에 소림의 고수가 남아 있습니다.”
“……!”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하나 이상은 확실히 있겠지요.”
“그래, 확실하네. 계율원주 운운했으니까.”
“호마상단을 중심으로 도시의 경제력이 성장한 와중에, 소림승이 있는 곳에서 민간인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면, 복건의 민심 전체가 술렁일 수 있습니다.”
“음.”
양백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율적산이 말했다.
“물론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우리는 임무 수행 중인 군인이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임무 완수는 물론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이기도 하오.”
“……?!”
모두의 눈빛이 돌변했다.
양백호가 물었다.
“생존이라니?”
“무연향을 제거하는 방법부터 정보를 서슴없이 통제할 줄 아는, 그리고 사후에 그러한 행위를 수습할 수 있을 만한 권력자가 배후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임무를 완수하고 들어가서도, 령주님께서는 발 뻗고 계시기 힘들 겁니다. 그 알 수 없는 권력자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임무에 성공하고 돌아온 야차사령부를 주시하고, 또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
“복건은 본교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고 돌아왔다면, 그걸 빌미 삼아 사령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귀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일군주. 그만한 권력자라면 굳이 민간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정도는…….”
“하지만 민간인 중 누구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면.”
“……?”
“그 사실 자체가 여론을 이용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습니다.”
“뭐……?”
“어떤 권력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 절대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은 본교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교주.
자전신마 조백천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사람이 내린 줄을 타고 오르진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고, 실제로 아는 사람에 의하면 그러기도 합니다.”
즉, 권력자들끼리도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넓게 보면, 민간인의 피해를 감수하고 가는 것보다 이쪽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민간인의 피해를 일으키지 않는 쪽이 좋습니다.”
“음.”
“또한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순 있지만, 이 싸움에 민간인이 피해를 보게 되면 소림 쪽 인사가 본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부풀릴 수도 있습니다.”
“……!”
“정파 무림이 이미 본교를 악의 화신이라고 생각한다지만, 민심은 또 다릅니다. 그들이 선동으로 인해 등을 돌린다면 본교는 큰 타격을 입을 겁니다.”
율적산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모두가 그렇진 않을 거요. 중요한 건 정국이고 시류요.”
이천상은 대뜸 위험한 말을 꺼냈다.
“본교는 시시각각 쇠퇴하는 중이지.”
“……!!”
“그런 상황에서 정파 무림의 선동에 민심까지 떠나게 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오. 이미 많이 떠났다고도 들었지만.”
위험천만한 말이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모닥불을 보던 양백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즉, 자네 말은 본교를 위해서는 물론 우리를 위해서도 절대 민간인이 피해를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군.”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르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작전은 그저 시간에 쫓겨서 더 빠르고, 편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까.”
“…….”
“민간인과 무림인은 다른 세상에서 삽니다. 하지만 같은 땅에 서서, 서로 같이 말을 나눕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같으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약자의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역시 창칼을 들고 무림 일에 끼어들지 않는 이상.”
“…….”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상적이네.”
양백호의 눈이 깊어졌다.
“너무나도 이상적이야. 진부한 말이지만, 세상은 결코 이상대로 돌아가지 않네.”
“알고 있습니다.”
양백호가 팔짱을 꼈다.
“자네는 작전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네.”
“그렇습니다.”
“달리 생각한 작전이 있는가?”
“위험하지만, 있습니다.”
“그 작전이 민간인에게 조금의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가?”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해 보게.”
이천상이 다시 나뭇가지를 들어 땅에 그림을 그렸다.
“이곳이 호마상단이라면, 이쪽 정도에서 소림과 싸움을 벌이셨습니까?”
“그렇다네.”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선 안 되지만, 적의 상태를 봐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령주님께서 소림승들을 죽이셨으니, 그곳에서 소림을 끌어내도록 합니다.”
세 사람의 눈이 번쩍였다.
“소림을 끌어낸다고?”
“도시로 들어가서요.”
양백호의 눈이 흔들렸다.
“도시로 들어가라니? 민간인들 한복판 아닌가?”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부대원 대부분을 끌고 가서 소림승은 물론 호마상단의 모든 전력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동격서(聲東擊西).”
이천상이 호마상단의 후방을 가리켰다.
“삼방(三方)이 아니라 이방(二方)입니다. 그곳으로 소림, 혹은 소림과 호마상단의 남은 병력이 모조리 향하게 되면 그 즉시 소수의 침투 부대가 반대쪽에서 호마상단으로 들어갑니다.”
“……!!”
“령주님께서 정찰 나가 소림승과 싸웠던 그 선택을, 역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포석으로 만드는 겁니다.”
양백호의 눈이 흔들렸다.
귀창이 조심스레 말했다.
“통하겠는가?”
“통할 걸세.”
양백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율원의 부원주는 물론 그의 사질 놈들도 다 죽였네. 원수인 데다가 본교를 혐오하는 놈들이니 무조건 나올 걸세. 하물며…….”
“대(大)부대를 이끌고 갔으니까요.”
“허!”
율적산이 물었다.
“침투 부대를 소수로 운용해도 괜찮은 건가?”
“오히려 소수로 해야만 하오. 우리가 민간인의 피해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호마상단으로 치고 들어가기 때문이오. 인원수를 열 명으로만 줄여도 민간인들이 눈치채기도 전에 호마상단 앞마당까지 치고 들어갈 수 있소.”
율적산이 탄성을 터트렸다.
“절대적인 숫자! 그걸 생각 못 했군.”
귀창이 물었다.
“만에 하나, 놈들이 호마상단에 고수를 배치해 뒀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소수의 믿을 만한 고수들을 배치한다면?”
“거기까지는 침투 부대가 돌파해야 하오. 아마 최소 병력을 둔다 해도 침투가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최소 병력과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호마상단의 수뇌부들을 끌고 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네. 정신없는 와중에 그들을 일일이 납치해서 데려올 수가 있나?”
“데려오지 않소.”
“그게 무슨 말인가?”
이천상이 땅에 그려진 호마상단 내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침투 부대는 호마상단을 장악, 점거할 것이오.”
“……!!”
“적진 점검 후, 상단 내 주요 인물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사람을 묶어 둘 것이오. 그 후 절반은 남고 절반은 소림과의 싸움에 참전하오.”
세 사람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이천상이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수뇌부를 이송하는 건, 그쪽 전력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난 이후가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