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7화. 마(魔)와 정(正) (5)
“…….”
호상백의 얼굴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두려움, 분노, 당황, 불신, 경악 등 부정적인 감정을 한데 모아 둔 것 같았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용권문의 대장로, 장춘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호검단의 전력은 대단한 것이야. 말단들의 무공은 별 볼 일 없지만 부대로서는 효율이 무척이나 빼어난 녀석들인데.”
“…….”
“정말 전부 당한 것인가.”
“……예.”
호상백이 이를 악물었다.
“뭔가 수를 쓴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교의 권력자와 선을 대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말이 선이지, 호상백이 철저하게 뇌물을 가져다 바치고 있는 판국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마교 쪽에서 감당키 힘든 부대를 보냈다면, ‘그자’가 미리 연락을 주었을 것이다.
이쪽의 목숨을 걱정해 줄 만큼 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의 돈줄이 끊기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호상백이 분기별로 ‘그자’에게 보내는 뇌물은 상당한 양이었다. 일 년에 가져다 바치는 양이 중소 문파의 일 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 뇌물을 줘도, 호마상단의 운용에는 아무 차질이 없었다. 오히려 ‘그자’에게 그 정도 뇌물을 가져다 바쳤기 때문에 상단이 여기까지 클 수 있었다.
신교 내성의 전투 부대나 그에 육박하는 부대를 보냈다면 무조건 연락을 줬을 것이다.
‘……?!’
현 상황에 초조해하던 호상백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하니, 이제 와서 볼 장 다 봤다고 꼬리를 자르는 것인가?
‘말도 안 돼. 그럴 작자가 아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을 사용할 사람은 아니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꼬리를 자르려 하진 않는다.
하지만 한번 생겨난 불안감은 호상백의 이성을 조금씩,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
“수를 썼든 순수한 실력으로 이겼든, 한순간에 호검단이라는 전력이 통째로 증발해 버렸네.”
장춘이 눈살을 찌푸렸다.
“몇 년을 투자하고 가르친 부대인데, 이제 어쩔 생각이신가?”
호상백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키워야지요.”
“그건 당연한 것이고. 저 미친 마교도들이 곧 이곳으로 들이닥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는 거라네.”
호상백의 눈이 흔들렸다.
“대장로님?”
“아, 오해하지 말게.”
장춘이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데리고 온 권문의 무사들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이네. 소림도 나설 것이고. 내 말은 그놈들의 악랄함을 뜻하는 거라네.”
“예?”
“당연한 것 아닌가? 제 놈들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소림승과 싸우고 호검단과도 싸웠어. 놈들도 피해가 막심했을 거라네.”
장춘의 얼굴에 한 줄기 긴장의 기색이 어렸다.
“눈 돌아간 마교도들을 본 적이 있나?”
“……!”
“그놈들, 도시 외곽에서부터 작정하고 치고 들어올 걸세.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이야.”
“…….”
“모르긴 몰라도, 이 도시를 완전히 묻어 버릴 작정으로 올 거라고 생각하네.”
호상백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 그가 봐 온 마교도들은 누구보다도 잔혹한 놈들이었다. 게다가 크게 당하기도 했으니, 정말 작정하고 이곳을 파괴하려 들지도 몰랐다.
“이곳 연성의 서쪽 도시는 짧은 시간 크게 발전했네. 호마상단 덕분이지. 하지만 호마상단만의 힘이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닐세. 자네 역시 이곳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중앙으로 진출하기 전, 이곳을 호마상단의 지부로 두려는 게 자네 계획이었네. 실제로 그러기 위해 지금껏 많은 준비를 해 왔지.”
“…….”
“만에 하나 이 도시의 삼 할만 파괴되어도 지부의 꿈은 사라지고 말 걸세. 이유인즉, 지부의 운용 전반이 도시의 경제와 정보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야.”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곳 도시가 조금이라도 파괴되는 순간 지부의 꿈은 연 단위로 늦춰지게 된다.
완성만 된다면야 도시의 반이 날아가도 운용될 수 있지만, 지금은 한창 발전 중이었다. 지금 이 도시가 날아가면 그의 꿈과 쌓아 놓은 돈은 물론 투자한 돈까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넓은 도시 전체를 방어하기라도 할 텐가?”
“대장로님을 위시한 권문의 권사들과 소림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지 않네.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 다만 아무 피해도 없이 그 미친놈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호상백은 저도 모르게 짜증 어린 목소리를 뱉었다. 뱉자마자 후회했지만.
장춘이 냉정하게 말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게.”
“……예?”
“건물이야 재건할 수 있지. 신뢰는 어렵지만, 어찌 저찌 다시 쌓을 방도가 있네. 그러나 사람 목숨은 다시 살려 내지 못해.”
“……!!”
“어중이떠중이들은 상관없네. 다만 지부에 영향을 주는 이들이 있을 걸세. 그들만이라도 일단 대피시키도록 하게나.”
“그것은……!”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야. 호검단이 무너졌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그 뒤에 마교도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찾지 못한 판국 아닌가?”
“…….”
“호검단 자체가 정보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만큼, 자네의 두 눈 중 하나는 실명한 거나 다름없네. 예전처럼 연성을 중심으로 복건 서부를 샅샅이 뒤져 볼 수는 없다는 거야.”
호상백의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어렸다.
장춘이 미소를 지었다.
“살다 보면 이 정도 위기는 언제라도 겪을 수 있다네. 그렇게 걱정만 하지 말고 일단은 움직이는 게 중요하네.”
“……맞는 말씀입니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쳐들어올 수 있는 놈들이야. 시간이 없네. 서신을 써 놓을 테니, 최고로 중요한 인적 자원들만 추려서 본문으로 보내도록 하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들을 어디로 보내겠는가? 목적 없이 어느 야산에 묶어 두기라도 할 참인가?”
“…….”
“이유는 알아서 만들도록 하게. 알겠나?”
물끄러미 장춘을 보던 호상백이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장춘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런 인사는 접어 두도록 하게.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지. 본문도 자네 덕분에 형편이 좋아지지 않았는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명단부터 짜서 모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호상백이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갔다.
자애로웠던 장춘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깃들었다.
‘답답한 놈 같으니라고.’
호마상단은 용권문의 좋은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을 마교도 놈들 때문에 잃을 수는 없었다.
딱 그 정도였다. 좋은 기반이 되는 정도.
아닌 말로 호마상단이 없어져도 용권문은 어떻게든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다. 다만 그 기간이 길어질 뿐이었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호상백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튀어나올까 싶어 표정 관리에 애를 써야 했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까지처럼 재롱만 잘 떨어 준다면, 본문도 굳이 너를 버릴 일은 없을 것이야.’
장춘이 뒷짐을 지곤 방을 나섰다.
그는 문득 저 멀리 객당을 바라보았다. 귀빈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처음이었다.’
장춘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처음 봤어, 계율원주께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은.’
그럴 만도 했다. 아끼는 사제이자 부원주는 물론 다음 세대 나한들로 키우려던 사질들을 잃지 않았는가.
‘미친 마교도 놈들. 너희가 누굴 건드렸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적인의 무공은 적자 배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엄청났다.
적자 배 최강이자 소림 역사상 손에 꼽히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적송대사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인 역시 소림이 인정한 재능. 어설픈 마교도 몇에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서 왔으면 좋겠군.’
장춘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어렸다.
‘소림 본산의 무공이 실전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자아내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기회로다.’
장춘은 흥얼거리며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이곳 호마상단에서 가장 마음 편한 사람이 그였다.
* * *
“후우.”
숨을 몰아쉰 율적산이 주먹을 매만졌다.
그의 옆에는 양건이 이끄는 삼군 일 조와 설이전이 이끄는 이군 일 조가 있었다.
귀창이 물었다.
“몸은 어떤가?”
“아주 좋지.”
“어리다고는 해도 소림승들과 싸웠는데, 그 내상이 다 나았나?”
“조금이지만 아직 남았네.”
율적산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더 괜찮아. 적당한 긴장감이 좋거든. 언제든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 감각, 나는 좋아하네.”
귀창이 피식 웃었다.
“둔탱이처럼 움직이다가 걸리지나 말게.”
“걱정하지 마. 몸뚱이는 커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거 잘하니까.”
그건 누구보다도 귀창이 잘 아는 바였다.
그가 양건을 바라보았다.
“일 조장.”
“예, 군주님.”
“이번 임무에 유독 고생이 많네.”
양건이 미소를 지었다.
“쓰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돌아가면 조원들과 술 한잔하세나.”
“영광입니다.”
그렇게 귀창이 양건을 챙겨 주고 있을 때.
뜻밖에도 설이전 앞에는 이천상이 있었다.
“신법은 돌파에 능하고 궁술은 힘보다 기교에 능하더군.”
이군 야차들의 궁술은 상당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설이전은 유독 명중률이 높았다.
“이군주를 따라붙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설 조장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주변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 내는 것이다.”
“네!”
이천상이 품에서 잘 접은 약봉 몇 개를 꺼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만든 독이다.”
“독이요?!”
“야차들 정도만 되어도 통할 독은 아니야. 하지만 곱게 가루를 내서, 공기 중에 퍼트리기 좋지.”
“효능이……?”
“상처로 침투하면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과 비슷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반드시 상처, 즉 혈액에 닿아야 제대로 작용하는 독이다.”
“……!!”
“직접적으로 목숨에 위협을 주는 독은 아니야. 그러나 싸움 중에 이 독에 당한 놈들은 평소처럼 싸우긴 힘들 것이다. 만약 싸움이 힘들어지면, 적절한 때에 터트리길 바란다.”
이천상이 살짝 그을려 놓은 약봉을 가리켰다.
“그건 해독제다. 놈들에게 독을 쓰기 전에 한데 뭉쳐서 흡입해라.”
“어떻게 이런 걸 제조하셨어요?”
“항상 하던 거니까.”
설이전은 묘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이 힐끔 율적산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고수는 이군주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근접전의 고수인 만큼, 적에게 흑색탄이나 적색탄을 쓸 수도 없을 거다. 반드시 그 독을 써라.”
“예.”
“나중에 보지.”
몸을 돌린 이천상을 향해 설이전이 말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저희한테 술 한잔 사 주실래요?”
걸음을 멈춘 이천상이 설이전과 그녀의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이천상을 보는 눈에 흠모의 빛이 가득했다.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한번 고려해 보도록 하지.”
“어떤 조건이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한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전원 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