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도전생기 외전-93화 (743/774)

외전 93화. 마공(魔功)을 보는 시선 (1)

“백골.”

“오셨는가.”

작은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는 노인이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의 모습은 선풍도골이 따로 없었다.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단정히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과는 달리 숱 많은 눈썹은 검었지만, 목까지 내려온 수염은 또 하얗기만 했다.

인자한 눈빛. 비범하기 그지없는 외양이었다. 심지어 키도 육 척이 훌쩍 넘는지라,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노인, 백골신마가 등을 돌렸다.

정자 밑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있었다. 빼빼 마른 몸, 나른한 눈빛에 강자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광혈신마 백헌이었다.

백골신마가 웃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와서 앉게. 술상을 봐 놨네.”

말없이 백골신마를 보던 백헌이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다.

백헌과는 달리 백골신마의 몸짓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여유와 품격이 묻어난다. 정말이지 외양만 보면 무림의 공포로 불리는 천마신교의 장로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자.”

자리에 앉은 백골신마가 백헌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백헌은 잔을 들지도 않았다. 그래도 잔에는 술이 차고 있었다.

백헌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도 채운 백골신마가 인자한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어째 잔뜩 날이 섰구먼.”

“…….”

“먼저 한잔하겠는가?”

잔을 들어 내미는 백골신마.

눈앞에서 찰랑거리는 술잔을 본 백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술에 독이라도 타 놓았는가?”

“의심병은 여전하구먼.”

“타당하기 그지없는 의심이지. 제 아들과 며느리도 독살해 버린 마귀가 주는 술을 덥석 받아 마실 배포 따위 내게는 없네.”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 몸뚱이에 듣는 독을 찾으려면 못해도 석 달 열흘은 걸릴 걸세.”

“미리 갖고 있던 독일 수도 있지.”

“마시기 싫으면 말게나. 어렵게 구한 산동분주거늘.”

백골신마는 천천히 잔을 비웠다. 마시는 동작조차도 예사롭지 않았다.

“좋구먼.”

백골신마가 빈 잔을 내밀었다.

“안 마실 거면 따라 주게.”

백헌은 말없이 백골신마를 노려보았다.

백골신마가 무안한 듯 입맛을 다셨다.

“못 본 사이에 더 딱딱해졌군.”

다시 자신의 잔을 채우는 백골신마를 보며 백헌이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건가?”

“음?”

백헌이 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 흔들었다.

“내게 이따위 서신을 보낸 저의가 무언가?”

“허허.”

“자네에게 군사부를 주무를 만한 힘이 있는지 몰랐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외전의 한 부대를 안전히 귀교시켰어.”

백골신마가 고개를 저었다.

“멋지게 임무를 성공시켰으니 안전하게 귀교해야지.”

“…….”

“상부의 명령을 잘 이행했어. 상을 주진 못할망정 안전조차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면 안 되지.”

“백골.”

“말씀하시게.”

백헌이 양손으로 탁자의 양 끝을 잡았다.

“빠지게.”

백골이 말없이 잔을 비웠다.

백헌이 말을 이었다.

“자네, 이런 사람 아니었잖나?”

“흠.”

진한 주향을 음미하며, 백골이 물었다.

“날 어떤 사람으로 보았나?”

“그날, 피의 쟁탈전 때도 자네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어. 심지어 교주님께서 도와달라 했을 때도 침묵했지.”

“…….”

“자네가 바랐던 건 중립이자 평화였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든, 십대마왕의 일원으로서 남기를 바랐지.”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이었다.

백헌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우둑!

왼손에 잡힌 탁자 끝이 으스러졌다.

“지금 와서 권력욕이 생겼나?”

“권력?”

백골신마가 손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이미 충분하고도 남는다네.”

“그게 아니면 왜 나서나? 평소처럼 홀로 난을 치든, 시를 읊든, 술을 퍼마시든 멋대로 살면 되지 않나?”

“멋대로 살고 있다네. 어제도, 오늘도 그랬지.”

백헌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백골신마가 재차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보게, 광혈.”

“…….”

“자네, 선을 넘었네.”

“선이 어디 있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나이 들었더니 그간의 인생에 죄책감이라도 생겼나?”

“무슨 말인가?”

“이제 와서 머리 깎고 절간에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야, 소림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지 않느냔 말일세.”

부웅! 콰득!

탁자를 정자 밖으로 날려 버린 백헌의 얼굴은 숫제 악귀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소림과 손을 잡았다고?”

“호마상단의 단주에게 뇌물을 받아먹었잖은가.”

“그놈은!”

“소림의 일파인 용권문의 무력을 지원받고 있었다네. 야차사령부는 복건에서 소림 본산의 고수들과도 싸웠어.”

“재미있군. 그래서 내가 소림과 손을 잡았다는 건가?”

“자네도 알다시피 실제로 손을 잡았는지는 문제가 아닐세.”

백골신마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중요한 건 소림의 지원을 받고 있던 상단의 검은돈을 자네가 받아먹고 있었다는 것이지.”

“백골!”

“아직 교주님 귀에 들어가진 않았다네.”

“……!”

“아무리 교주님이라도 이 일을 아시면 자네를 가만 놔두겠는가?”

백헌의 볼이 부르르 떨렸다.

신교 내에서 자신과 권력 싸움이 되는 이들은 몇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중 백골신마는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경쟁자들이라도 감히 소림을 입에 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전쟁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설마하니 백골신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묻어 두겠네.”

백골신마가 바닥에 잔을 놓았다.

그는 끝까지 품위를 잃는 법이 없었다. 도리어 백헌을 보는데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자네가 소림과 붙어먹을 만큼 막 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러나 선을 넘은 것도 분명하지.”

“…….”

“이번 일은 묻어 두도록 하겠네. 그러니 자네도 적당히 하게나.”

“정말 내가 아는 백골이 맞는가 싶군.”

“백골신마 맞네. 십대마왕의 일인,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맞아.”

“…….”

“그러니 자네도 욕심 적당히 부리게. 자네나 나나 평생 신교를 위해 살았어. 살날 얼마 안 남았다고 욕심부리지 말고, 신교의 충신으로서 말년을 보내도록 하게나.”

“자네가 이제는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먼.”

“가르쳐서 들어 먹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까지도 안 하지.”

물끄러미 백골신마를 보던 백헌이 접힌 서신을 바닥에 놓았다.

“여전히 필체가 좋더군.”

“칭찬 고맙네.”

“자네는 이 자리에 만족하는가?”

“물론일세. 나는 죽는 그날까지 십대마왕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걸세.”

“권력에 욕심은 없다?”

백골신마가 정자 밖을 바라보았다.

“본교는 아름다운 곳이야.”

“…….”

“이런 곳에서 권력 다툼이나 하며 살 생각은 없다네. 남은 생은 유유자적하게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 걸세.”

“그렇다면 하나 묻겠네.”

백헌의 눈이 깊어졌다.

“가만히 있던 자네가 왜 굳이 지금 나섰나?”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선을 넘었다고.”

“그래서 나섰다?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보이시는가?”

“무엇이?”

“권력에 미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추한 노인네가 보이느냔 말일세. 난 보이네만.”

백헌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십대마왕의 일원이 소림과 연관이 있는 상단의 돈을 받아먹고 있었네. 만약 이 사실이 교주님의 귀로 들어가면 어찌 되겠나?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사태가 어지러워졌을 걸세.”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을 것이야.”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가게 하려고 충성스러운 마인들 수백을 묻어 버려야겠지.”

“…….”

“그래서 자네가 선을 넘었다는 걸세. 어지간해야 모른 척해 주지, 본교의 힘 그 자체인 마인들을 때려죽이면서까지 뇌물을 받아먹나? 그것도 소림과 연관된 곳에서?”

담담히 힐난하던 그가 힘주어 말했다.

“노욕은 적당히 부리게.”

“…….”

“어지간한 건 다 모른 척하겠네. 적당히 빨아먹고 살게나.”

쿵!

주먹으로 정자 바닥을 내리친 백헌이 벌떡 일어나 정자를 내려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백골.”

“말씀하시게.”

“자네 눈에는 본교가 아직도 아름답게 보이는 모양일세.”

“…….”

“나는 본교가 이미 무너졌다고 생각하네.”

“바로 그런 말이 선을 넘었다는 거라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가?”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본교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죄다 끌고 북진해서 속이 풀릴 때까지 정파 놈들을 찢어 죽이고 산화했을 걸세.”

“…….”

“조만간 또 한잔하세나.”

백헌이 성난 코웃음을 치며 사라졌다.

백골신마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유해지기 마련이거늘, 어째 젊을 적보다 더 난폭해진 것 같군. 끌끌, 나이를 헛먹은 게지.”

정자에서 나온 백골신마가 연못 앞에 섰다.

“치우거라.”

“예, 어르신.”

하인들이 바닥에 떨어진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 치우면 공 당주를 데리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신교불패(神敎不敗) 만마앙복(萬魔仰伏). 형법당주 공무외가 백골신마 장로님을 뵙습니다.”

백골신마가 몸을 돌렸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공무외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성심 넘치는 수하 그 자체였다.

“일어나게.”

“예.”

공무외가 공손한 자세로 일어났다.

백골신마가 웃으며 말했다.

“누이는 잘 계시는가?”

공무외가 침을 삼켰다.

“본산으로 온 이후…… 따로 만난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먼.”

“죄송합니다.”

“허허, 뭐가 죄송한가.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자네, 너무 긴장했군.”

백골신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면 누이 건강이 어떤지도 모르겠구먼.”

“예. 술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병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몸으로 용케 아이를 낳았어. 차기 비궁주로 키우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저는 비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백골신마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공씨지만 비궁과는 걷는 길이 다르구먼.”

“예.”

잠시 침묵이 일었다.

“양백호, 그 녀석이 제법 쓸 만한 놈이긴 하지. 뻣뻣하기가 쇠막대 같은 놈인데 용케 자네 사람으로 만들었구먼?”

공무외는 백골신마 앞에서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실은…….”

그는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고했다. 광마대주 도헌을 수하로 둔 것부터 이천상의 존재, 나아가 양백호와 무슨 관계인지도.

“오호? 양백호가 그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개 야차의 설득으로 움직일 만한 자존심이 아니거늘…… 그간 많이 지쳤던 모양이군.”

“그런 듯합니다.”

“그게 아니면…….”

그 일개 야차의 설득이 대단했든지.

백골신마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상단주 놈은 당주께서 처리해 주시게.”

“죽이란 말씀이신지요?”

“그게 그림이 좋지 않겠나? 그래야 광혈도 안심을 하지.”

“명심하겠습니다.”

“자소대마 건도 문제없을 걸세. 자네가 건네준 폭혈의 비급을 언급했더니 그 웃음 많던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군.”

“도움이 되셨다니 영광이옵니다.”

“자네가 준 도움은 결국 자네에게 이득으로 돌아갔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백골신마는 한 번씩 이렇게 해석하기 모호한 말을 하곤 했다. 공무외는 말없이 침을 삼켰다.

“야차사령에 사상자가 제법 났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거기에 내 손자 놈을 보내 주겠네.”

“……예?!”

“그래야 자소대마가 허튼짓을 안 하지 않겠나?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양 령주에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손자 놈은 양백호 재량대로 하라 그러게. 굳이 높은 자리에 앉힐 필요 없어.”

백골신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품을 하는 것이다.

“좀 쉬어야겠네. 조만간 술 한잔하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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