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6화. 마공(魔功)을 보는 시선 (4)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유상천은 당황하고 있었다.
율적산이 손을 흔들었다.
“데려다줬으니까 나는 먼저 가겠네. 적당히들 하고.”
“잘 가시오.”
“어이쿠, 일각주께서 그런 인사도 다 하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수다.”
율적산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천상 옆, 나무에 기대 있던 허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입입니까?”
“그렇다.”
“한데 우리, 신고식이 있었습니까?”
“신고식?”
“앞으로 오라면서요. 한판 붙는 거 아니었습니까?”
“맞다.”
“신고식도 아닌데 갑자기요?”
이천상이 유상천을 바라보았다.
순간 유상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뭐지.’
그는 이천상 같은 작자의 눈을 처음 보았다.
‘뭐가 저렇게…….’
무색투명하다고 해야 하나.
유상천은 지금껏 눈으로 사람의 상태를 살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눈을 가리켜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만, 눈빛만 보고 사람의 속내를 읽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눈빛은 그 사람의 상태 일부분에 불과했다. 눈매, 표정, 목소리, 억양, 나아가 상황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유추하는 것이지, 눈만 보고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상천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의 눈은 정말 풍부한 감정이 깃들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아무 감정이 없다……?’
이천상의 눈은 지금껏 본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담겨야 할 감정이 없었다. 게다가 가만 보니 한번 깜빡이지도 않고 있었다.
지독하게 솜씨 좋은 조각가가 빚어 놓은 가면을 쓴 것 같다고 할까. 어쨌거나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가 싸우고 싶어 하니까. 나로서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허필이 유상천을 힐끔거렸다.
이천상만큼은 아니지만, 저쪽도 어지간히 딱딱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내 눈에는 그냥 긴장한 걸로 보이는데요. 딱히 투기(鬪氣)라고 할 것도 없고.”
허필이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극마지경에 도달한 초고수라면 모를까, 투기도 흘리지 않는 사람의 의지를 읽어 내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천상 역시 전부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유상천은 표정이나 눈빛으로 여러 가지 신호(信號)를 보내는 유형이었다.
적어도 이천상에게는 그러했다.
“나는 준비되었다.”
“…….”
“준비되면 알아서 시작해라.”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유상천이 한옆으로 보따리를 던졌다.
그러곤 천천히 어깨를 움직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등 몸을 풀었다.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꽤 여유로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야차들 몇 명이 눈을 빛냈다.
“움직임이 엄청 유연한데?”
“백골신마 어르신 손자라고 하잖아.”
“헉! 그럼 엄청 강한 거 아니야?”
“그러겠지? 아무래도?”
“시벌, 신입이라고 들어오자마자 우리 찬밥 신세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유상천은 힐끗 야차들을 바라보았다.
되지도 않는 농담을 지껄이면서 낄낄대는 야차들의 모습은 상당히 묘한 것이었다.
자신이 백골신마의 핏줄이라는 걸 아는데도 전혀 어려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신기해하는 것,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낯설고, 동시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준비 끝났나?”
유상천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로 일각 소속이 될 유상천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상천이 돌진했다.
지켜보던 야차들은 내심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유상천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파아앙!
허공을 때리는 유상천의 주먹 끝에서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일었다.
‘저것 봐라?’
허필의 눈이 번뜩였다.
‘권법을 제대로 배웠어.’
유상천의 주먹을 고갯짓 한 번으로 피한 이천상은 곧장 삼 보(三步)를 이동했다.
파파팡!
유상천의 연환 각법이 허공을 연달아 세 번이나 후려쳤다.
무너진 듯, 무너지지 않는 그 기묘한 자세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각법을 펼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허필의 얼굴에도 감탄이 일었다.
‘피했다?’
유상천이 이천상을 돌아보았다.
이천상에게는 딱히 자세랄 것도 없었다. 양손을 늘어트린 채로 유상천을 바라보는데, 마치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멀뚱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역시.’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공격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월하게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었어.’
주먹질 한 번, 발길질 세 번이 전부였지만 더는 상대의 대응을 지켜볼 필요가 없겠다.
우우우웅!
유상천의 몸에서 어두운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딱히 색을 정의하기 힘든 마기였다. 그저 어둡다는 인상이 느껴질 뿐.
‘간다.’
파아아아악!
이전보다 훨씬 더 탄력적인 움직임.
본격적인 승부는 지금부터라는 듯, 굉장한 속도로 파고든 그가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 유상천은 이천상의 눈에서 얼핏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콰아앙! 쿵!
“크윽!”
일직선으로 쭉 날아간 유상천의 몸이 담벼락에 처박혔다.
‘이런!’
순간적으로 호흡이 답답해졌다. 무서운 압력에 횡격막이 확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주먹에서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아프다?’
순간 유상천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콰드드득!
비슷하게 일직선으로 날아온 이천상의 발이 담벼락을 깨부수고 땅에 박혔다.
재빨리 좌측으로 몸을 날린 유상천은 섬뜩함을 느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각법에 맞았다면 어깨가 통째로 끊어져 날아갔을 것이다. 양팔로 막아도 팔뚝이 부러지고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생사결?!’
파아아아앙!
거대한 붉은 장력이 유상천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핏빛으로 물든 그 장력은 어딘지 모르게 귀신의 형상과 닮아 있었다.
금강야차마공의 야차혈장이었다.
유상천은 다급함을 느꼈다.
위력은 낮지만, 범위가 넓어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막는 수밖에 없는데, 상대의 다음 공격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익!’
그렇다고 온전히 맞아 줄 수는 없는 노릇. 유상천은 한껏 끌어 올린 마공으로 장력의 중앙을 후려쳤다.
쾅!
공기가 요동을 쳤다.
흩어진 장력 너머, 이천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퍼억!
유상천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좌하단 대퇴부를 노린 각법이었다. 재빨리 움직이느라 제대로 마기를 싣지 못했지만, 통증을 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파파파팡!
이 악물고 고통을 참은 유상천의 주먹이 이천상의 상반신을 향해 쏟아졌다.
이천상의 양손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유상천의 공격을 모조리 쳐 냈다.
마치 눈앞에서 윙윙대는 파리를 귀찮다고 쳐 내는 듯했다. 유상천은 짧게 혀를 차며 속도를 올렸다.
파파파파팡! 파파팡!
짧은 순간 두 배로 늘어난 주먹, 상당한 쾌공이었다.
허필은 유상천의 권법을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강권, 쾌권, 유권…… 권법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군. 저거 걸물인데?’
봉인된 힘을 풀어 내지 않으면 지금의 자신과 박빙의 대결을 벌일 수 있을 정도였다. 나이도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실로 대단한 재능이었다.
더 대단한 건 이천상이었다.
저 빠른 주먹을 무표정한 얼굴로 모조리 쳐 내더니, 이내 빈틈을 발견한 듯 발을 휘둘렀다.
퍼억!
“커헉!”
복부를 파고든 일격이었다. 유상천이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물러났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감각이 좋군.’
맞는 그 순간에 허리를 빼서 충격을 최소화했다.
보고 반응한 게 아니었다. 공기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피해 낸 것이다.
구사하는 무공은 격식 있는 정통 마공 종류 같은데, 신체의 감각은 야생의 맹수를 보는 것 같았다.
‘덩치 큰 고양이와 싸우는 것 같군.’
쿵!
진각과 함께 우장을 떨쳤다.
야차혈장의 거대한 장력이 유상천을 향해 밀려들었다.
일부러 진각을 때린 것도, 장력의 위력을 줄이고 풍성하게 만든 것도 알아서 피하라는 의도가 배 있었다.
어쨌든 일각 야차로 들어오는 녀석이다. 훈련 비무라면 몰라도 첫날부터 병신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콰앙!
야차혈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돌진하여 후속타를 날리려던 이천상은, 순간 부서진 장력 뒤에서 휘몰아치는 진한 마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장법?’
훅!
파리해진 안색으로 다가오는 유상천.
그의 오른손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뿜어내는 마기는 어두웠는데, 손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기는 하얀 연기를 피워 내며 기이한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백골?’
이천상의 주먹에 강력한 마기가 실렸다.
콰아앙! 우둑!
“크으윽!”
매서운 충격파와 함께 유상천이 삼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이천상의 권력(拳力)은 아직 유상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파괴력이 넘쳤다.
주르륵.
유상천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권장(拳掌)이 부딪친 충격파로 인해 약간의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천상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더 하겠나?”
“쿨럭!”
밭은기침을 뱉던 유상천이 이천상을 쏘아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천상이 북천마혜보를 펼쳤다.
훅!
유상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이천상이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그가 본능적으로 무릎을 쳐올리려 할 때.
퍼억!
이천상의 손바닥이 유상천의 턱을 올려 쳤다.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붕 날아간 유상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천상이 양손을 털었다. 승부가 난 것이다.
허필이 고개를 저었다.
“굉장한 녀석이 들어왔구만.”
그때였다.
“으윽.”
유상천이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그를 지켜보던 야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일격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들어간 타격이었다. 물론 이천상이 작정하고 힘을 발휘했다면 머리통이 날아갔겠지만, 저렇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대충 후려친 공격도 아니었다.
“콜록콜록!”
앉은 채로 기침을 한 유상천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격 순간 고개를 들어 잔여 충격을 해소했군.”
“……그렇습니다.”
“괜찮은 감각이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유상천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랍군요. 저보다 강하다는 건 보자마자 알았지만, 설마 천마백골수(天魔白骨手)를 정면으로 밀어 낼 만큼 막강한 마공을 익히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하얀 마기로 치는 무공이 천마백골수인가?”
“그렇습니다.”
천마백골수는 그 이름답게 백골신마의 진신절기였다.
유상천이 눈을 감았다.
“흑고루마공(黑骷髏魔功)은 물론 백골수까지 정면으로 받아 내는 고수가 제 상관이로군요.”
“…….”
“손속에 사정을 둬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배를 인정해서일까. 이전의 딱딱했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기괴한 마공이다.’
이천상은 유상천이 말한 흑고루마공과 천마백골수를 떠올렸다.
‘기괴하지만, 배울 점이 있어.’
말없이 유상천을 보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이전 임무로 십 조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
“인원을 계속 받을 테니, 이제부터 네가 십 조를 맡아라.”
유상천의 눈이 흔들렸다.
“조장이란 말씀입니까?”
“싫나?”
“아, 아닙니다.”
이천상이 한옆에 놓은 상의를 어깨에 두르곤 일각으로 들어갔다.
“일 조장.”
“예.”
“거처를 안내해 준 후 생활 전반에 대한 지식과 규율까지 전부 가르쳐라.”
허필이 입맛을 다셨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