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1화. 검은 악마의 후예 (1)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내뱉던 단리우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졌다.”
“후우.”
땀범벅이 된 유상천이 널브러진 단리우를 내려다보았다.
단리우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하구만. 일대일로는 못 당하겠어.”
집단전 훈련에서 삼 조를 이끌던 단리우가 십 조를 이끄는 유상천에게 패배한 것이다.
유상천이 손을 내밀었다.
단리우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뼈가 다 시리는군. 내공이 엄청난데?”
유상천이 고개를 저었다.
“오 조와 팔 조, 구 조를 상대하고 우리와 붙는 거잖소. 그런 상대에게 진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오.”
“그럴 리가.”
단리우는 유상천 뒤에서 헐떡이는 야차들을 바라보았다.
“받은 지 한 달 된 야차들이 벌써 이 정도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대단한 거야.”
유상천이 조장이 된 후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유상천은 야차사령의 진법을 하나하나 숙달했고, 뒤이어 받은 열 명의 야차들을 완전히 제압, 통솔하는 데 성공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능력이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사람을 이끄는 데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는 듯했다.
유상천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직 부족하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삼 조와 싸우면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소. 십 조는 단결력과 상황 판단이 부족해.”
단리우가 피식 웃었다.
“단결력이야 조장이 알아서 이끌면 되는 문제고 상황 판단은 실전 한 번만 겪어 봐도 빨라지겠지. 노력한다고 다 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여유를 갖게.”
유상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유상천은 단리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디 단리우뿐인가. 한차례 실전을 겪고 절반밖에 살아남지 못한 부대지만, 그 절반이라도 살아남은 이유는 수장인 이천상과 각 조장의 강력한 통솔력 덕분이었다.
이 두 달 동안 유상천은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기존 조장들의 능력을.
그리고 이곳, 살아남은 사령의 일각 야차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연마되어 있는지.
‘고작 한 번의 실전이라고 했다. 그 한 번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인가.’
경험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지만, 그걸 감안해도 수준이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어쩌면 일각이 특별할지도 모르지.’
이각과 삼각의 단독 훈련도 몇 번 봐 왔다.
애초에 구사하는 진법이 워낙 달라서 누가 더 우위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일각 야차들이 보다 더 독하고 신속한 것은 확실했다.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
“그럽시다.”
휘하 야차들을 보낸 뒤 느리게 어깨를 푸는 유상천을 힐끔 본 단리우가 피식 웃었다.
“또 각주님께 가려고?”
“그렇소.”
“징글징글하군.”
“개인의 기량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오.”
“저번에는 얼마나 버텼지?”
유상천이 입맛을 다셨다.
“열두 합을 버텼소.”
“그 정도면 각주님도 작정하고 싸우신 것 같은데, 자네도 그새 발전한 거 아닌가?”
과연 그럴까.
유상천은 일견 타당한 단리우의 칭찬에 짙은 회의를 느꼈다.
분명 지난 두 달간 이천상과 끊임없이 대련했고, 대련 횟수가 늘어나면서 버티는 합 수도 늘어나기는 했다.
처음 실전 같은 싸움을 원했을 때, 유상천은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세 합.
고작 세 합이었다. 세 합 만에 이천상의 양발이 팔을 봉쇄했고, 뒤에서 자신을 안은 이천상의 두 팔이 목을 조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팔에 조금만 힘이 더 들어갔어도 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그 이후 네 합, 다섯 합으로 늘어나더니 일곱 합, 열 합이 되고 종내 열두 합까지 왔다.
자신의 대응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공에 발전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각주님은 나를 관찰하고 계셨다.’
착각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분명 살아 있는 교보재였다.
‘분명해. 각주님은 내 무공을 통해서 뭔가를 얻어 가고 있어.’
기가 막힌 일이었다.
보통 자신보다 하수의 무공을 보고 배우겠다는 생각은 못 한다. 한데 이천상은 그러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왠지 자부심이 들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정작 자신은 이천상의 동작이나 싸움법을 보고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었다.
‘재능의 차이인가? 아니면…….’
그때, 단리우가 말했다.
“생각이 있으면 어서 가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이오?”
“새로 온 십일 조장이 각주님과 한판 붙으러 간다고 하던데? 아마 지금쯤 신나게 붙고 있겠지.”
유상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의복과 떨어진 병장기를 주운 단리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친구, 자네랑 비슷하더군. 말수는 자네보다 적은데, 나머진 아주 판박이야. 저번에 들었는데 몇 번 패배하고도 또 붙자고 각주님을 귀찮게 했다던…….”
단리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유상천이 그를 두고 훌쩍 가 버린 탓이었다.
“참, 힘든 후배들이야.”
* * *
유상천이 일각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퍼어어엉!
시원한 폭음과 함께 누군가가 바닥을 굴렀다.
“콜록콜록!”
엎드려서 밭은기침을 내뱉는데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내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고통은 상당한지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나쁘지 않군.”
건물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이천상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검법이 아주 뛰어나다. 여러 경험을 했다는 게 티가 나는군. 내공은 부족하지만, 이미 자신만의 검도(劍道)를 세우고 있는 듯하다.”
청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유달리 흰 피부에 체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근육은 유연하고 부드러워서 검법을 전개하는 데에 이상적으로 보였다.
“더 하겠나?”
“마지막 한판 부탁드리겠습니다.”
“좋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천상이 유상천을 바라보았다.
짧게 고개를 숙인 유상천이 팔짱을 꼈다.
“구경 좀 하겠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청년을 돌아보았다.
유상천보다 서너 살 더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 기세는 상당히 흉흉했다. 그간 뚫고 나온 아수라장이 적지 않은지 자세는 자연스럽게 실전적으로 변했고 눈은 이천상의 빈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유상천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저 양반에게 빈틈 따위가 있었으면 진즉에 한 방 먹였다. 그럴 시간에 달려들어서 칼질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
그는 십일 조장 위찬(威燦)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너무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말수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위찬은 그보다 더했다. 게다가 기본적인 예의 정도는 지키는 자신과 달리 저놈은 위아래도 없는 것 같았다.
‘특히 나한테 말이지.’
어릴 적 신교 말단으로 들어와서 칼 한 자루로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들었는데, 저따위 성질머리로 어찌 지금껏 살아남았나 싶었다.
유상천이 내심 콧방귀를 스무 번 정도 뀌었을 때.
파악!
청년, 위찬이 움직였다.폭발적인 내공은 없었지만 움직임이 굉장히 탄력적이었다. 단숨에 거리를 가로질러 검을 내뻗는 동작은 직선적인 움직임과 달리 부드럽고 날카로웠다.
이천상의 손이 움직였다.
따앙!
손등도 아니고 손가락이다. 중지 아래에 맞닿은 검지가 일순간 튕겨 나가더니 검신을 두들겨 쳐 내었다.
순간적으로 갈 길을 잃은 검. 위찬은 자연스럽게 몸을 회전하여 왼손 손끝으로 이천상의 목을 노렸다.
스륵.
자연스레 그 손을 피해 내며 앞으로 나선 이천상의 무릎이 위찬의 복부를 후려쳤다.
퍼억!
보는 사람이 더 아플 정도로 과격한 일격이었다. 위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허옇게 질렸다.
유상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애송이. 운 좋은 줄 알아라. 각주님이 힘 빼고 친 거야, 그거.’
그때, 뒤로 물러난 위찬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만한 일격을 맞고도 물러나 후속타를 내친다는 것이 대단했다. 육체나 내공 이전에 정신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후방으로 물러나 검을 피한 이천상이 이번엔 위찬의 우측으로 붙었다.
퍽!
이천상의 손날이 위찬의 어깨를 때렸다. 위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빠각!
손날을 내친 팔이 그대로 접히고, 이내 팔꿈치가 위찬의 턱을 강타했다.
벌러덩 뒤로 넘어진 위찬이 이천상을 향해 검을 던졌다. 더 이상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천상이 비검(飛劍)을 피하자 위찬이 반쯤 일어난 자세로 그의 고간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유상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저런 치사한 새끼가?!’
이천상의 주먹이 고간으로 올라오는 위찬의 발등을 찍었다.
퍽!
“크윽!”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는 위찬. 이천상은 그대로 그 발목을 잡곤, 몸을 돌리며 잡아 휘둘렀다.
콰앙
!땅에 떨어진 위찬이 잔기침을 뱉었다.
양팔로 얼굴을 막았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이번에도 내상만 없었을 뿐, 땅에 처박힌 충격으로 인해 시야가 온통 흔들렸다.
이천상이 손을 털며 말했다.
“승부는 끝났다.”
어지러운지 머리를 짚으며 일어난 위찬은, 생각보다 발목을 움직이기가 괜찮다는 사실에 놀랐다.
주먹에 맞은 발등은 부어올랐지만, 잡힌 발목은 괜찮다. 힘을 조절해 준 것이다.
위찬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잘 배웠습니다.”
“살법(殺法)에 능하군.”
“예?”
“검사(劍士)지만,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이런저런 수법을 다 끌고 오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아무런 배경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치사한 수법이라도 써야 했다. 그러고도 실전에서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래선 안 된다.”
“왜 그렇습니까?”
유상천은 위찬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덤벼 놓고도 설명을 바라다니? 그런 건 본인이 알아서 깨달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요리하는 법을 알려 줬으면 떠먹는 것 정도는 자기가 해야 하는 거다.
‘아직 어려서 그래. 양심 없는 놈.’
이천상의 입이 열렸다.
“너는 검에 정통했다. 기본공을 익히면서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이는 보통 재능이 아니야. 단순한 살법은 고등의 무도(武道)를 따라잡지 못해. 패배가 두려워 잡스러운 싸움법을 꺼내 드는 순간, 네가 배우고 익혀 온 검도는 한 걸음씩 물러난다.”
“……!”
“지금부터는 검에 매진해라. 당장 겪은 패배는 뼈아플 수 있어도 미래의 너는 웃을 수 있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위찬이 말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검도는…….”
“내공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도 마환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유상천은 내심 깜짝 놀랐다. 위찬이 별 볼 일 없는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마환공을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신교의 말단 마인들이 익히는 마환공으로 야차사령의 조장까지 될 만한 실력을 쌓았다면 이는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거짓말 아닌가, 저거?’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군. 령주님께서 너희에게 상위 마공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예?!”
위찬은 물론 유상천까지 깜짝 놀라서 이천상을 보았다.
이천상이 유상천에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걸 연마하도록 하게. 이미 팔대마공급의 마학을 연마하고 있으니까. 굳이 배워 왔던 것을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마공을 익힐 필요는 없어.”
“그렇긴 합니다만.”
“마침 오늘 배포하신다고 했다. 다른 조장에게도 전해. 쉬다가 한 시진 뒤에 연무장으로 집합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