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5화. 검은 악마의 후예 (5)
“퉤!”
비릿한 피를 뱉은 소공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진짜 돌아 버리겠네.”
특유의 경쾌한 성격이 묻어나는 어조였지만,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외상도 상당한 와중에 내공까지 봉쇄된 상황이었다. 골골 앓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소공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조장 하나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데도 몸을 부르르 떤다. 찌푸려진 인상, 안색이 창백했다.
“이봐, 사 조장.”
당연히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공은 한 번 더 외쳤다.
“사 조장! 목장백!”
순간 쓰러진 사내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몸이 반응했을 뿐,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중일 것이다.
‘제기랄.’
소공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컴컴한 뇌옥에는 달빛만 조금 들어왔다. 냄새는 퀴퀴하고 짚단에서는 벌레들이 들끓고 있었다.
애초에 죄인을 가두는 곳이니만큼 청결한 상태를 유지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형법당 최악의 뇌옥에 비하면 엄청나게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습하지만 않았어도.’
한층 심하게 몸을 떠는 목장백을 바라보던 소공이 입술을 깨물었다.
좋지 않은 환경, 거기에 높은 습도. 바닥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솔솔 올라온다.
아픈 사람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특히나 전신에 자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환자에게는 더더욱.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
내공으로 탁기를 몰아내고 상처를 봉합하지 않는 이상 죽은 목숨이다. 흑마대 소속 마인의 육신은 상당한 독에도 내성을 갖도록 연마되었지만, 그래 봤자 닷새를 넘기기 힘들 것이다.
‘빌어먹을, 내 잘못이다.’
소공은 이를 악물며 자책했다.
도주한 전대 노마들은 현역 복귀가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상들을 입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용케 형법당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마인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결국 노마들의 탈출을 도운 마인들은 전원 참수되었으나, 정작 노마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숨었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것이 삼십여 년 전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삼십 년이라면 현역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마인이 목숨을 잃을 수도, 혹은 기연을 얻어 예전보다 더 강해졌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보고서에 적힌 몸 상태가 사실이라면, 회복은 절대 불가능했다.
절대 불가능. 소공은 세상에 절대라는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어떠했나.
진짜로 그들이 복귀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런 식으로 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수다. 변명이 필요치 않아.’
하나의 얼굴을 갖고 태어났지만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살았다.
거기에서 오는 피로가 굉장했다. 내심 버겁다고 여겼지만 자존심에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버텨 왔는데, 기어이 이런 순간에 치명적인 실수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다 변명이고 핑계였지만, 새삼 뼈아팠다.
소공이 한참 동안 말없이 자책할 때.
“흐아암!”
구석빼기에서 쿨쿨 잘도 자던 청년 하나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소공이 청년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청년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안 주무셨습니까?”
상황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소공은 청년의 그 말투에 도리어 피식 웃어 버렸다.
“너는 진짜 속도 좋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더냐?”
“흑마대원이 되는 순간 오늘 밤에라도 죽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마음을 안고 살아야만이 진정한 흑마대원이요, 마인이라 할 수 있다.”
“…….”
“이거 대주님이 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랬지.”
“지금까지 목숨 내던지고 살아왔습니다. 이 정도는 우습죠.”
소공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말이 옳다. 이제 보니 너야말로 진정한 마인이었군.”
청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마(魔)를 죽여 버리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똑같은 마라면, 저는 누구보다도 진한 마귀가 될 겁니다.”
“그러냐.”
“뭐…… 그러기 전에.”
청년이 피식 웃었다.
“일단 이곳부터 빠져나가야겠지요.”
소공이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저 원래 이상한 놈이잖아요.”
“너 말고 나. 제기랄, 흑마대에 입대한 지 일 년도 안 된 놈에게 용기나 얻는 걸 보면 역시 나도 누구 위에 있을 만한 그릇은 아니야.”
“그 일 년도 안 된 놈이 반년 만에 조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보통 천재가 아니지요.”
“자화자찬만큼은 극마의 수준이구나.”
“이것도 다 대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피식피식 웃었다.
어쨌든 실없는 대화라도 하자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막상 힘이 나도 현실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게 미칠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힘없이 고개나 숙이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난 소공이 목장백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호흡은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소공의 안색이 흐려졌다
.“어떻게든 닷새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 이대로라면 사흘도 넘기기 힘들겠어.”
“그렇습니까.”
청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목장백에 대한 걱정 따위는 요만큼도 없는 듯했다.
도리어 그는 일어나서 벽면을 더듬거리거나 툭툭 건드리는 등 이해 못 할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소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냐?”
청년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어디가 제일 약한지 보려고요. 아, 여기다.”
쿵. 쿵.
주먹으로 벽을 치자, 확실히 울림이 달랐다.
“으음.”
청년이 벽에 귀를 대며 눈을 감았다.
소공은 괜히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놈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도헌에게 듣기로 이천상의 성취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였다. 확실히 무공 한 줌 배운 적 없던 놈이 일 년도 안 되어 야차사령의 각주가 되었다면, 가히 고금을 논할 재능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치자면 청년, 삼 조장 유이상이 더 대단했다.
이천상은 사령단 반 알과 고급 마공이라도 익혔지, 유이상은 그런 것도 없었다. 물론 잡혀 올 때부터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곤 있었지만, 그 또한 마공은 아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흑마대의 마공을 익히며 반년 만에 모든 살법을 몸에 붙인 채로 조장이 되었다. 반년밖에 안 된 애송이가 조장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원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소공이 보기에 유이상은 이천상보다도 더한 천재였다.
더 자세히 말하면, 마공(魔功)을 익히는 데에 타고난 천재였다.
그렇다고 마공 성취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워낙 다방면으로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났으니, 잘만 키우면 단시일 내로 초절정고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이상을 보며, 소공은 결심했다.
‘내가 죽어도 저놈만큼은 살려야 해.’
유이상은 단순히 흑마대의 조장이 아니었다.
도헌에게 이천상이 있듯, 소공에게는 유이상이 있었다.
이미 유이상을 윗선에다가도 소개시켜 주었다. 분명 큰일을 낼 인재이니 절대 죽게 놔둘 수 없었다.
“됐습니다.”
“음? 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유이상이 벽면을 가리켰다.
“두께가 다른 곳의 절반밖에 되지 않아요. 아래에서부터 저기 천장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사다리처럼 밟고 올라가는 구조로 설계가 되었나 봅니다.”
소공의 눈이 반짝였다.
“첨탑 같은 건가?”
“그렇겠지요.”
“……기묘하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유이상이 힐끔 창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 심지어 크기도 작지 않았다.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보통 뇌옥에는 창을 아예 내지 않거나 아니면 손바닥만큼 작게 낸다.
촘촘히 철창을 둘렀기 때문에 내공 없이 맨손으로 부수거나 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인간적인 뇌옥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내공까지 봉쇄당한 우리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네가 말한 벽면의 두께는 얇지만, 얇다 해도 맨주먹으로 부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두께가 아니야.”
“그렇지요.”
유이상이 팔짱을 꼈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뭔데?”
“왜 놈들은 우리의 내공을 봉인해 두었을까요?”
“엉? 그럼 그걸 그냥 놔둬?”
“살려 둬서 써먹을 곳이 있다거나 아니면 만에 하나 신교와의 싸움이 벌어질 때 우리를 내세워 인질극이라도 벌이겠다, 뭐 그런 생각이라면 이해합니다. 다만, 단전을 폐하고 말지 뭐 하러 봉인만 해 뒀을까요?”
소공이 쓰게 웃었다.
“단전이 파괴당한 마인을 어디다 써먹겠느냐? 인질로 잡아 두려 해도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그럼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
“솔직히 말해서 천마신교에 인질이 통하기나 합니까?”
“……?!”
“처음 잡혔을 때부터 이상했습니다. 천마신교는 절대 인질을 두고 협상하지 않아요. 차라리 인질까지 싹 죽여 버리고 말겠지요. 하물며…….”
유이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당대 교주가 치세하는 천마신교라면 더더욱이요.”
“유이상.”
소공의 얼굴에 엄한 기색이 어렸다.
“입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유이상이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상하다, 이거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공을 봉인시켜 둔 채로 우리를 잡아 둘 이유는 없습니다.”
“한데, 지금 와서 그게 중요하냐?”
“중요하지요.”
유이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걸 알아야 이곳을 부수고 나갈 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감이 올 테니까요.”
소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수고 나간다고?”
“예.”
“어떻게?”
“힘으로요.”
“맨주먹으로 벽돌 더미를 부술 수 있을 만큼 단련했어? 나 몰래?”
“그럴 리가요. 내공으로 부숴야지요. 물론 안전하게 귀교하면 돌주먹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할 생각입니다만.”
“내공 봉쇄당했잖아?”
그때였다.
푸스스.
소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이상의 손에서 익숙한 흑영마기(黑影魔氣)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분명 흑영마기였다.
“너…… 어떻게?”
“흑영마공을 익히기 전에 연마한 본가 비전의 무공이 바로 이혈강신공(移穴康身功)입니다.”
이혈강신공이 극에 이르면 자의적인 혈도 개폐(開閉)는 물론 혈도의 위치까지 바꿔 버릴 수 있다.
무림에서 통할 만한 강한 내공을 연성할 수는 없지만, 무공의 이름처럼 혈도의 이동과 개폐로 온갖 탁기(濁氣)를 뽑아낼 수 있는 무공이 이혈강신공이었다.
“하지만 그 무공은…… 마공과 같이 익힐 수 없다면서? 너 설마 나 속였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혈강신공은 마공과 같이 익힐 수 없어요.”
“그런데?!”
“같이 익힐 수 없으면, 같이 익힐 수 있게 만들어야지요.”
“……?!”
“신교의 기본공들과 본가의 의술, 그리고 이혈강신공의 구결을 토대로 이산공(移山功)이라는 걸 만들어 봤습니다. 이동시킨 혈도의 강한 압축으로 진기의 폭발을 유도해 보는 건데……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요.”
소공이 입을 쩍 벌렸다.
유이상이 킬킬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반나절 정도 지나면 모든 내공이 다 풀릴 겁니다. 그때까지 저 망할 늙은이들이 왜 우리를 잡아 뒀는지 답을 찾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