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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 외전-113화 (763/774)

외전 113화. 배교도(背敎徒) (1)

“……으음.”

천천히 눈을 뜬 노인이 크게 하품했다.

피로가 가득 쌓인 얼굴이었다. 눈곱도 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으며 핏줄 선 흰자위는 온통 누랬다.

광택이 흐르는 비단옷도 다 흘러내려 가슴과 복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갈비뼈가 희미하게 보이는 가슴과 달리 배는 살짝 나왔는데, 전형적인 돈 많은 졸부의 외형이었다.

연신 하품하던 노인이 몇 번 입맛을 다시곤 한옆에 놓인 술병의 마개를 땄다. 주향은 강하지 않았다. 벌벌 떠는 손으로 술병을 입가에 기울였다.

콸콸 쏟아지는 주홍빛 액체가 그대로 노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크흠!”

단번에 술을 반이나 비워 버린 노인이 건성으로 입가를 닦으며 저 멀리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신(臣) 호법원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시게.”

음울하고 늘어지는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몸에서 기운이 빠질 것 같다. 목소리만으로 주변 공기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쿠궁!

문이 열리고 초로의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과 달리 강건한 체구에 의관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스무 개가 넘는 대황촉에 불이 붙어 있음에도 어두웠던 대전이, 사내의 등장으로 인해 확 밝아지는 듯했다.

노인은 사내가 들어오든 말든 다시 입으로 술을 쏟아부었다.

쿵!

문이 닫히자 사내가 공손한 걸음으로 붉은 융단을 걸어왔다.

누가 봐도 노인이 상전이었지만, 사내는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없어서 어떤 상태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태사의 아래, 수많은 계단 앞까지 도착한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다 마신 술병을 아무렇게나 던진 노인이 턱을 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시겠지.”

심드렁한 대꾸에 사내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데 어인 일로 태사의에서 주무셨습니까?”

사적이라면 사적인 질문이었다.

더불어 저 태사의에 앉은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천하 모두가 놀라 자빠질 만한 질문이요, 표정이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어린 여아들 속살에 파묻혀 자지 않아 의외인가?”

“아닙니다. 그저 피로하신 듯 보여서.”

“가끔은 이렇게 혼자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좋지. 자네는 안 그런가?”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대답이 없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노인은 반드시 대답받아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누구라도 불경죄를 물어 형법당에 가둘 수 있을 만큼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른 권력자였다.

하지만 노인이나 사내나 이런 대화가 익숙한 듯 보였다. 가까운 군신 사이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저런 딱딱한 격식까지 빠짐없이 차릴 사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사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가.”

“예.”

“어디에 쥐 굴을 파 놓고 산다던가?”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꼬리를 잡았다는 것은, 그 망할 놈들이 거주하는 곳을 알아냈다는 소리가 아니었나?”

“송구하옵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심각하거나 진지한 모습 따위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우리 호법원주께서는 뭘 보고 꼬리라고 생각하셨는가?”

“그쪽 군사(軍師)가 조직을 벗어나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오호?”

노인의 얼굴에 은근한 흥미가 일었다.

“그쪽에도 군사가 있을 줄은 몰랐군. 하기야, 알음알음 빼먹은 알곡이라도 그 양이 곳간 몇 개는 채울 양인데 관리자 하나 안 두고 썩힐 만큼 머저리들은 아니니까.”

사내, 당금 천마신교의 호법원주 무홍백은 알고 있었다. 저 노인의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걸.

겉으로는 주색잡기에 빠진 타락한 수장 그 자체였지만, 실제로는 신교 내에서 벌어지는 일 대다수를 보고받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신교의 정보력은 여전히 마도무림 최고였다.

적어도 장강 이남 지역에서는 천마신교의 정보력을 따라올 세력이 없다. 그리고 그 정보 중 가장 탐스러운 알곡은 모조리 교주에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조직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모른 척할 뿐.

‘여전하군.’

저것이 바로 노인의 정치였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상대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

어설픈 바보들이 그런다면야 코웃음을 쳐 주겠지만, 놀랍게도 저 노인은 오랜 세월 신교의 사나운 정치판에서 최고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때만 한 열정은 없다지만, 평생을 쌓아 온 정치력과 지식, 그리고 타고난 눈치는 어디 가지 않는다.

무홍백이 입을 열었다.

“지부의 마인들이 각자 정보망을 구축, 도주한 그쪽 군사를 남방으로 몰아가고 있다 합니다.”

“칭찬해 줘야겠군.”

“다만 그쪽에서도 쉬이 놔줄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한지라, 암암리에 최고 수준의 고수들을 파견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첩보라. 대체 어디서 얻은 첩보인가?”

“과거부터 그쪽의 존재를 알아챈 이들을 계속 인근 지방에 깔아 두었습니다. 그 지방 한정으로는 최고 수준의 정보력을 지녔다고 자부합니다.”

이 또한 노인도 다 알고 있는 것이리라. 무홍백은 한 점 거짓 없이 고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최고 수준의 고수라…… 흥미롭군. 누구라던가?”

“아직 그 면면을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만…….”

“…….”

“확신할 수 없으나, 대력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순간 노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무리 그라도 그냥 넘기기 힘든 이름이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그이가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재미있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정말로 몰랐을 것이다.

무홍백이 더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 외 인물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입니다. 당연히 은밀하게 기동할 터이니, 고수 몇 명만 파견되었다고는 보이지 않고 최소한 전투 부대급 전력 둘 이상이 쫓고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혼자서 천라지망을 펼칠 수 없다. 추적술에 능하지 않으면 일정 거리가 떨어진 이를 쫓기도 힘들다.

어떤 조직의 군사 역을 맡았다는 건, 그 조직의 모든 것을 머리에 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으려 할 것이다. 불가능하면 죽여서라도 입을 봉하려 하겠지.

“재미있구나. 실로 재미있어. 대력……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거늘.”

“…….”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저는 들었던 정보를 전해 드릴 뿐, 모든 판단은 교주님께서 내리시면 됩니다.”

“모든 판단은 내가 내리면 된다……. 허허, 그렇지.”

노인이 태사의의 팔걸이를 짚고 일어났다.

‘…….’

무홍백의 눈이 흔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노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중압감이었다.

우웅.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진동에 대황촉의 불빛들이 철문 방향으로 훅 누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기파를 발산하거나 마공을 끌어 올린 것도 아닌데 그렇다.

‘더 강해졌다.’

하는 일 없이 여자 끼고 술만 퍼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자체도 정치의 일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여색을 밝히고 술을 좋아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천성조차 정치력에 녹일 수 있을 만큼 음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천성을 정확하게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은 더는 천성에 휘둘리지 않는 법이었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기에?’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 순수한 깨달음을 얻어 더 강해진 것일까?

스륵. 스륵.

용포 자락이 계단을 스칠 때마다 나는 소리가 마치 독사의 혓바닥 소리 같았다.

무홍백은 노인이 엎드린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 소름 끼치는 한기를 느꼈다.

“이보게, 홍백.”

호법원주가 아니라 홍백이다.

무홍백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전 외측,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무척 왜소해 보였다.

“말씀하시오.”

엄청난 불경이었다.

신교 최고의 권좌에 앉은 이를 두고 이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억나는가? 과거 이곳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그득한 칼부림이.”

“……기억하오.”

“잊을 수 없겠지. 그날, 본교의 역사가 바뀌었으니까.”

무홍백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소.”

“내가 왜 자네에게 호법원의 수장 자리를 주었는지 아는가?”

“이마왕(二魔王)의 속내를 누가 알겠소.”

이마왕.

그것은 노인이 신좌(神座)에 앉기 전, 속세에서 불렸던 여러 별칭 중 하나였다.

“자네는 그날 내 편에 서지 않았네. 내 적이라 할 만한 사람 곁에서 평생 충성했지.”

“…….”

“사실,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탐이 났다네.”

“그러셨소?”

“출중한 무공과 재능. 끈끈한 충성심은 물론 빠른 일 처리와 독기. 그리고…….”

“…….”

“적당한 탐욕.”

무홍백의 눈이 흔들렸다.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능력 좋은 사람은 많아. 재능 출중한 인재들도 많지. 충성심 깊은 놈도 발에 챌 정도로 많고 일 처리 빠른 놈들은 그보다 더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힘들어.”

“…….”

“하지만 제 분수를 아는 놈은 마른 땅을 전전하는 거북이보다도 찾기 힘들다네. 외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팔푼이들이 대다수야. 그런 놈들을 밑에 두면 인생이 피곤해지지.”

무홍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노인이 천천히 목을 꺾었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자네는 수하로 두기에 그만인 사람이라네. 눈치가 빨라서 존대해야 할 때와 안 해도 될 때를 구분할 정도로.”

“…….”

“이러니 내가 자네를 아낄 수밖에 없지.”

핏발 선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던 무홍백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 끝나셨다면 소신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였다.

파직.

노인의 어깨에서 한 줄기 시퍼런 뇌광(雷光)이 튀었다.

놀란 무홍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직. 파지지직.

번쩍이다 사라진 푸른 뇌광은 점차 그 수를 늘리며 노인의 등판 전체로 퍼져 나갔다.

파지지지지직!!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일순간 튀어 오른 번갯불이 몸 전체를 누비기 시작하고, 시퍼런 광채는 서서히 자색으로 물들어 갔다.

우두둑! 우두두둑!

노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몸 곳곳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이어 굽었던 어깨와 허리가 펴지고 헐렁했던 옷이 점차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아아아악!

수십 개의 자전(紫電)이 바늘처럼 퍼져 나가며 대전 곳곳에 마련된 화등에 적중했다.

순식간에 대전이 밝아졌다. 대전 안에 있는 모든 화등과 대황촉이 화려한 색채를 발했다.

무홍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기공 능력이었다. 극마(極魔)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은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섬세한 내공 운용이었다.

“호법원주.”

“……예, 교주님.”

노인이 몸을 돌렸다.

볼품없이 말랐던 가슴은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였다. 핏발 선 눈에는 뇌광이 일렁였고 축 늘어졌던 피부는 주름 한 점 없었다.

팔순을 코앞에 둔 노인에서, 순식간에 건장한 사십 대 중년으로 돌아온 남자.

당대 천마신교의 교주, 자전신마 조백천이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따위 군사 나부랭이보다 대력부터 잡아 와야 하지 않겠는가?”

“……!!”

“장로들을 부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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