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1화. 작전 속의 작전 (1)
이천상이 눈을 뜬 것은 목진강을 사로잡은 지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일어나셨는가.”
“예.”
소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생했네. 유 조장 말이, 자네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거라고 그러더군.”
“자신이 아니었다면 저와 허 조장이 죽었을 거라는 말은 안 한 모양이군요.”
“말이라도 그리 해 줘서 고맙구먼.”
“아닙니다.”
이천상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필이 콜록거리며 말했다.
“저는 멀쩡합니다.”
“다행이군.”
이천상이 허필의 가슴과 복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밟히고도 어디 한 군데 안 부러진 게 용해.”
허필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이천상은 허필이 멀쩡한 이유가 그의 몸 안에 잠재된 힘 덕분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밝힐 내용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소공이 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내 들었다.
“몸은 괜찮은 것 같군. 마음 같아서는 더 쉬게 해 주고 싶지만, 상부에서 지급으로 연락이 와서 별수 없겠어. 받게.”
이천상이 서신을 꺼내 펼쳤다.
잠시 후.
“단독 임무?”
“단독이라기보다는 특수 임무라고 봐야겠지.”
이천상이 소공을 바라보았다.
“대주님께서도 읽으셨습니까.”
“그래.”
소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너무 바쁘게 되었네. 그래도 다행히 자네들 덕분에 우리 체면은 세우게 되었어.”
“잔당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름대로 힘써 봐야지. 다행히 목표물 중 하나는 잡았으니, 나머지도 잡기 어렵지는 않을 걸세.”
“확신하긴 어렵지만, 남은 기관진은 없을 겁니다. 대신 백운산 어딘가에 나름대로 대비하고 숨어 있겠지요.”
“이 일은 우리가 처리토록 하겠네.”
“야차군의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주도해서 하겠네. 자네도 없는데 야차들이 다치면 볼 면목이 없어. 그렇다고 귀환시키자니 선행 명령 때문에 불가능하지. 철저하게 후방 지원으로 빼서 전력 손실이 없도록 조치하겠네.”
“알겠습니다.”
“내용을 보니 한시가 급한 것 같더군. 서둘러 움직이시게.”
“예.”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상은 곧장 주연교에게 갔다.
“군주님!”
“괜찮으십니까?”
조장과 야차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이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나와 몇몇 조장들은 특수 임무를 해결하러 간다.”
“……?!”
“모두를 끌고 갈 수는 없어. 하니, 선임 조장이 이곳에 남아 남은 인원을 이끌도록 한다.”
허필의 눈이 흔들렸다. 야차일군의 선임 조장은 바로 그였다.
“군주님.”
“흑마대주님 말로는 철저하게 후방 지원으로 돌린다고 했으니 직접적인 교전은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나, 한시도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체 무슨 임무이기에…….”
“다녀와서 말해 주도록 하지.”
조장들을 둘러보던 이천상이 유상천과 위찬을 바라보았다.
“십 조장, 십일 조장은 앞으로 나와라.”
“예!”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주연교가 염려 섞인 얼굴로 말했다.
“무슨 임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데려가시지요.”
“이번 지원 임무는 상부에서 공식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조원들의 전력 조율에 능한 조장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피해가 최소화될 것이다.”
말하자면 유상천과 위찬은 뒤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따로 빼 가겠다는 것이었다.
유상천은 입맛을 다셨고 위찬은 말없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허필과 주연교에게 빠르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한 이천상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조장이 조원 조율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자존심 상해할 필요 없다.”
“자존심 안 상합니다.”
“예.”
대답과는 달리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이번 특수 임무는 후방 지원 임무보다 쉬울 수도,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긴장들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이천상이 허필을 바라보았다.
“잘 이끌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출정 전에 말했던 것, 항시 잊지 말도록 하게.”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잠재된 힘을 개방하라는 뜻이었다.
정작 목진강과의 위급한 싸움 앞에서도 자신의 힘을 다 드러내지 않았던 그였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그때는 상관과 함께하는 자리이니 괜찮다. 그러나 부하들을 이끄는 좌장 입장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못해 무의미한 죽음이 속출하게 된다면, 그땐 징계 후 야차사령부에서 쫓아내겠다.”
허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천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유상천, 위찬. 가자.”
“예!”
* * *
느닷없이 받은 특수 임무지만 이천상은 당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 동안 서북쪽으로 이동한 후 야숙하던 이천상은 다시 서신을 꺼내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절강에서 강서로 이동하는 누군가를 사로잡아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호언, 호광, 진요성 세 명이었다.
셋 모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며, 천마신교의 드러나지 않은 적 조직을 빠져나온 중요 인사들이라고 하였다.
다만 적 조직에서 병력을 파견했을 터이니, 지나치게 위험한 상황에서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아와도 괜찮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천상은 이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질 만한 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요인 암살이나 호위에 적합한 흑마대나 호법원에게 더 적합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굳이 자신을 콕 집어 시킨 것은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뜻이리라.
‘공무외.’
형법당주 공무외.
이 임무의 뒤에 누가 있는지 유추할 수 있으니,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당황이라는 감정도 잘 모르지만.
‘공무외는 나를 아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지.’
야차사령부의 대장, 양백호와 줄을 대게 해 준 공로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신임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그 일로 더 경계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임무가 실패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을 배정해 준 것은…….
‘도 대주.’
도헌 덕분일 것이다.
도헌이 청탁을 넣은 것이 아니라, 공무외 스스로 벌인 일일 것이다. 자신이 도헌에게 특별한 인재니까.
‘별수 없지.’
수하들을 놓고 따로 이중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앞으로 신교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도 분명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교를 바꾼다…….’
문득 유이상의 말이 떠올랐다.
- 이 빌어먹을 천마신교를 아예 망하게 하거나, 싹 바꿔 버릴 생각이오.
- 천하를 공포로 물들인 악의 구렁텅이에, 그 살벌한 악을 끄집어내 날려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수가 아니겠소?
신교를 바꾸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자신과 달랐다.
하지만 목표는 같았다. 애초에 유이상 혼자서 천마신교를 무너트릴 수는 없을 테니, 당연히 신교 자체를 바꾸려 들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이상의 재능이 누구보다도 출중해서일까?
아직 신교육대의 조장급에 불과한 인사의 말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그런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신교 개혁을 위해 뜻을 감추고 남들을 속인 채 활동하는 마인들이 꽤 많다고 도헌에게 들었다. 소공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라는 것도.
말하자면 특별한 것 없다는 뜻인데, 왜 그의 말이 머리에 이토록 선명하게 남을까.
‘눈빛 때문인가.’
유이상의 눈빛은 확실히 독특했다.
태양처럼 불타오르면서도 많은 것을 포기한 듯한, 마치 자신의 손에 죽은 양부의 눈빛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아가, 이천상이 보고 분석했던 여러 사람의 행동 양상과도 완전히 달랐다.
당시에 말했듯, 보통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맨정신으로는 신교에서 마공을 배울 수가 없을 것이다. 원수의 조직에서 원수의 무공을 익히다니? 이건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다.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상식적이지 않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러했다.
‘어찌 되었든 일 년 만에 그 정도 수준이면 대단하군.’
이천상은 자신을 뛰어난 사람이 아닌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표현이 더 어울리기도 했다. 무공을 배우기도 전에 상단전과 하단전이 열려 있었고, 중단전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살아온 삶도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러나 유이상은 독특한 걸 넘어 뛰어난 인재였다.
순수 재능이 누구보다도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의가 출신이라 인체에 정통했다고는 해도, 알고 있는 지식을 몸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세상에는 인재가 많군.’
이천상이 서신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때, 유상천이 그를 불렀다.
“군주님. 여기…….”
잘 구운 토끼고기를 건네는 유상천의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육포로 충분하다. 너희가 먹어라.”
“저희가 먹을 양도 충분합니다.”
“안 충분한 거 안다.”
“그래도…….”
“이런 임무가 처음일 테니 심신 양면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너희가 제 몫을 못 해 주면 내가 더 힘들어지니, 영양을 보충하여 체력이라도 온존토록 하라.”
유상천이 헛기침을 뱉고는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조용히 있던 위찬이 물었다.
“임무가 무엇입니까?”
“호언, 호광, 진요성. 이 세 명을 구출하여 본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출 임무로군요.”
“상황 악화로 적과 조우하게 되면, 무리하게 싸우지 말고 퇴각해도 좋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예?”
위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상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그런 임무가 있답니까?”
“상부의 생각을 알 필요는 없다. 그저 내려온 명령을 따르면 그뿐이다.”
“커험.”
물론 이천상은 그러지 않았다. 괜한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두 사람을 관리하기 위해 꺼낸 말일 뿐이었다.
가만히 두 사람을 보던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십 조장.”
“예.”
“조부님은 잘 계신가.”
유상천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졌다.
“잘 계십니다.”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
아무래도 조부인 백골신마에게 말 못 할 감정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천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 말은 해 주고 싶었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제외하면,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좋다.”
유상천의 눈이 깊어졌다.
“혹시, 제 가족사에 대해 아십니까?”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
“그러나 네가 조부님과의 관계 때문에 지닌 재능을 완전히 개방하지 못하고 있다고 짐작한다.”
유상천이 차갑게 웃었다.
“말 그대로 짐작이시군요.”
“그렇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해지기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니까. 제가 익히고 있는 마공도 아는 공부 중 가장 강해서 그렇지, 더 강한 무공이 있었다면 굳이 조부님의 마공을 배우진 않았을 겁니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이천상이었다면, 관계 이전에 조부에게 쫓아가 온갖 배움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상천은 그러지 않았다.
사정이 있었대도 어중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 조부가 싫었다면 애초에 마공을 배우지도 않거나, 배운 마공을 버리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픔.
어설프게 착한 것이 나쁜 것만 못하고, 어설프게 나쁜 사람이 언제나 사고를 친다. 그래서 이천상은 어중간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디 부하들도 하루라도 빨리 어중간함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먹고 푹 자 둬라. 내일 동이 트기 전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