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2화. 작전 속의 작전 (2)
“준비는 다 되었냐?”
“예.”
유이상이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좀 지치긴 했지만, 다들 한껏 전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납치당한 게 오히려 애들 자존심에 불을 지른 것 같아요.”
“거 쪽팔린 얘기는 안 해도 된다.”
“쪽팔리니까 자꾸 기억해 둬야지요,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이상은 평소 장난기가 넘치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철든 소리를 하고는 했다.
소공은 그 이유를 알았다.
‘아직 멀었다, 이 녀석아.’
저 철든 모습이 바로 유이상의 본모습이었다.
평소 장난기 넘치는 그의 모습은 결함 많은 철 가면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원수의 조직에서 힘을 키우기 어려울 테니까. 온전한 스스로를 잠시 묻어 두어야 지금의 환경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몸은?”
“쌩쌩합니다.”
“이천상 그 녀석, 신기하지?”
느닷없이 던지는 말은 기습과도 같았다.
움찔한 유이상이 소공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녀석이지. 재능도 너에 비해 모자람이 없고 와중에 부하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신뢰받고 있어. 어떤 의미로는 재능보다 대단한 것이 바로 그 신뢰도라고 봐야겠지.”
“…….”
“녀석을 처음 데리고 온 것이 우리다. 솔직히, 마냥 이상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렇게 빨리, 크게 성장할 줄은 몰랐어.”
유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 사람입디다.”
“네 생각에도 그러하냐?”
“예. 재능이나 사람을 관리하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사고력과 집중도가 대단해요.”
“사고력? 집중도?”
“저 망할 노마 잡기 전까지 협곡을 쭉 걸어왔는데,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더군요. 언제 어느 때라도 반응할 수 있게 주변을 살핀 것은 물론, 저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퇴로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도 긴장했던 건가?”
“그건 긴장이 아닙니다.”
유이상의 눈이 깊어졌다.
“그 작자는 긴장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준비할 뿐이었지요. 모든 경우의 수를.”
“음.”
“재능은 타고나는 겁니다.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타고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지.”
“하지만 그자가 보여 준 집중력과 마음가짐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그런 것은 재능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봐야 해요.”
“…….”
“저는 그런 사람을 처음 봅니다. 앞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소공은 알고 있었다. 유이상이 이천상에게 놀랐고, 나아가 진한 승부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그래서 더더욱 놀랐다. 이천상은 유이상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유이상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껏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천재를 두고 질투 없이 승부욕만을 불태우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감이 있는 것이지.’
그렇다. 유이상은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을 봐도 질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그보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과신이 아니라 자신이다. 소공이 유이상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만 세상의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유이상 역시 비슷한 상대를 보고 좌절을 겪지 않을까,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기우였군.’
상대의 대단함을 깨끗하게 인정할 만한 자존감.
소공은 결심을 내렸다.
“가라.”
“예. 슬슬 진군시키겠습니다. 저희가 선두에…….”
“아니, 애들 놔두고 이천상에게 가라.”
유이상이 깜짝 놀라 소공을 바라보았다.
“대주님?”
“난 너의 재능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 봐도 이 정도야. 솔직히 한계가 있기는 한 건지, 있다면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소공의 얼굴은 진지했다. 절친한 유이상이 감히 말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이천상 역시 마찬가지다. 너와는 다르게 ‘기능’하고 있지만, 그 역시 재능이라면 녀석에게도 한계는 없어.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
“재능과 용인술 등의 각종 능력을 총합한다면, 아직까지는 마인(魔人)으로서 녀석이 너보다 위다.”
단정적인 말이었다.
유이상의 얼굴이 미미하게 경직되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소공이 진심으로 자신을 놓으려는 걸 알아서였다.
“너는 흑마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빨리 배웠지. 솔직히 말하면, 더는 네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대주님!”
“돌아가면 어디로든 추천서를 써 주마. 윗선과 얘기해서 너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으로 보내 주도록 하지. 그러니 지금은 이천상에게로 가라. 가서 그의 재능과 너의 재능을 제대로 확인해 보도록 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제가 흑마대를…….”
“왜? 부하들이 마음에 걸리느냐?”
“당연합니다! 저는 아직 조장다운 조장이 되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본교를 없애 버리고 싶다면서.”
“……!”
“그게 불가능하면, 본교를 뿌리부터 바꿔 버리고 싶다면서?”
“대주님.”
“말랑말랑한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스스로에게 제한을 두지 마라. 물론 내 사람들을 챙겨야 할 순간은 있지.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
“우리가 왜 너에게 그 많은 지원을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은 사적인 정에 얽매여 발전 속도를 늦추지 마라. 너는 더 높이, 더 빠르게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신교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도 안심할 수 있다.”
유이상이 마른침을 삼켰다.
소공이 미소를 지었다.
“가라. 가서 녀석에게 하나라도 더 배워라. 그리고 이왕이면 녀석에게도 가르쳐 줘. 우리가 왜 너를 다시 없을 천재라고 부르는지.”
“저 없이 괜찮겠습니까?”
“웃기지 마라. 흑마대는 신교육대 중 하나다. 쪽팔리게 적의 손에 납치나 당했지만, 다시는 그럴 일 없다. 우리가 약했다면 신교육대로 꼽히지도 못했어.”
“…….”
“너 하나에 의지해서 굴러가는 부대였다면 해체되는 게 낫다. 그러니 주제 넘는 걱정은 그쯤하고 이만 가 봐.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알겠습니다.”
“길이 엇갈리면 서쪽의 신교 분타들을 이용해라. 정보를 제공해 줄 거다.”
“알고 있습니다.”
유이상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따라가 보겠습니다.”
“죽지 마라.”
“쪽팔리게 지금 죽을 수는 없지요.”
유이상은 그 말을 남기고 곧장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검은 점이 되어 버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공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가 주역이 되든 상관없어. 본교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러나 적어도 네 녀석이 큰 족적을 남겨 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 * *
산길을 넘은 이천상과 두 조장은 문득 저 멀리 작은 마을을 포착했다.
“이상합니다.”
유상천이 위찬을 힐끔거렸다.
“뭐가?”
“…….”
위찬은 말없이 마을을 노려보았다.
유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뭐라 말하진 않았다.
잠시 후.
“제가 잘못 느낀 것 같습니다.”
위찬은 그 말을 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유상천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눈으로 위찬을 바라보았다.
“인마, 왜 그랬는지 말은 해야 할 거 아냐?”
“…….”
“어이, 위찬이.”
“십일 조장입니다.”
위찬의 무뚝뚝한 대답에 유상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십일 조장 위찬이.”
“…….”
“뭔데? 뭐가 그렇게 걸린 건데?”
“모르겠습니다.”
“이 자식이 작전 전에 한판 하자는 거야, 뭐야?”
말수도 별로 없던 유상천이 유독 위찬을 상대로는 툴툴거렸다.
놀랍게도 위찬은 유상천의 시비에 가까운 말투에도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유상천의 툭툭 던지는 날 선 말을 유도할 때도 있었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다.
그때, 이천상이 말했다.
“심상치 않은 고수가 있군.”
두 사람이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동공에 희미한 핏빛이 감돌았다. 대놓고 마기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안력은 극한까지 돋워진 상태였다.
혈화마공의 혈점투심안(血漸透心眼)이었다.
“한 번씩 드러나는 날카로운 기세가 굉장하다. 육대주급 이상, 최소한 우리가 맞닥뜨렸던 그 노마들에 비해 아래가 아니다.”
“……!”
“도검을 소지하고 있다. 예기가 무척이나 뾰족하고 날카로워. 단호함보다는 서늘함이 돋보인다. 검객인 듯하군.”
유상천은 깜짝 놀랐다.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고수의 존재를 알아챈 거라면 십 조장보다 경지가 높아서이고 쥔 병기의 정체를 알아챈 게 의문이라면 혈화마공 덕분이다.”
혈화마공은 적봉이나 포천보다 더 많고 다채로운 공능의 비술들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는 마공보다는 사공(邪功)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혈점투심안은 상단전을 과부하시켜 찢고 파괴하는 혈강수의 구결 몇 개를 따와 만든 것으로, 오히려 시각 능력을 증폭시켜 마기로 내기(內氣)의 강약을 명확히 볼 수 있는 비술이었다.
개인의 기량에 따라 선보일 수 있는 능력은 천차만별이지만, 극에 이르면 주변 환경은 검게 물드는 대신 강력한 기의 흐름이 집중된 이들은 붉고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천상은 아직 극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기세의 형태를 눈으로 포착하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자네들보다 강한 고수가 둘, 나보다 강한 고수가 하나.”
“……!”
“그 외에 일반 조원 수준의 무인은 스물이다.”
이천상의 능력에 놀라서 입을 쩍 벌렸던 유상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너무 많군요.”
“그렇군.”
분타를 통해 정보를 받은 그들은 저 마을에 목표물 중 두 사람이 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 남녀라 했으니 호광과 진요성이리라.
유상천이 힐끔 위찬을 바라보았다.
“설마 군주님이 느끼신 적의 기세를 알아챘던 건가, 위찬이?”
“긴가민가했습니다. 사실 못 느꼈어요. 기분이 조금 이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십일 조장입니다.”
“흐음,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위찬이 자네는 느끼고 왜 나는 못 느꼈지.”
“그거야 선배가 권장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 십일 조장으로 불러 주십시오.”
“제법이군, 위찬이.”
“칭찬 감사합니다, 유 형.”
“이 새끼가.”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스레 찔끔한 유상천과 위찬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자.”
“포기입니까?”
이천상이 의아한 눈으로 유상천을 바라보았다.
“포기라니?”
“예? 상대하기 힘든 적이 있다면 무리하지 말고 돌아와도 괜찮다고…….”
“상대하기 힘든 적인지는 붙어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군주님보다 강한 고수가 있다면서요? 게다가 숫자도…….”
“무공은 강하지. 그래서 그 늙은 마인도 우리보다 약해서 잡을 수 있었던 건가?”
“……!”
“실패는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한 자들이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단어가 아니다.”
유상천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이 검지로 마을 우측을 가리켰다.
“저쪽, 반쯤 허물어진 모옥 옆 숲에서 대기해라. 신호를 주면 곧장 내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도록.”
스륵.
그 말을 끝으로 이천상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