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4화
“세라복?”
연훈이 형이 되묻는다.
왜 세라복이냐고 묻는 얼굴이다.
연훈이 형의 표정을 면밀히 뜯어보니,
‘연훈이 형은 일단 좋긴 한가 보네.’
세라복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보다.
묘하게 들뜬 것 같은 느낌이니까.
반면,
“……세라복?”
도승이 형은 벌써 살기를 뿜는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이다.
살기등등한 도승이 형과 달리 운이 형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운이 형은 도승이 형 눈치를 슬쩍 보더니 묻는다.
“왜 세라복인 거야, 태윤아?”
늘 이유를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답다.
동준이 형도 운이 형의 질문에 말을 보탰다.
“보통은 컨셉부터 말하지 의상을 먼저 정하는 경우는 없잖아.”
대뜸 세라복이 나왔으니 다들 의아하긴 할 테다.
다만 이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형들에게 설명하긴 어렵다.
적당히 만들 만한 구실은,
“세라복 잘 어울리잖아요.”
이 옷이 우리에게 잘 어울린다는 거다.
도승이 형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과 나를 번갈아 가리킨다.
그 말의 뜻은 너랑 내가 정녕 세라복이 어울리겠냐는 뜻이다.
운이 형이나 동준이 형은 세라복이 꽤 받을 것 같은 외모다.
연훈이 형이야 뭐.
저 얼굴로 안 어울리는 옷이 없겠다만 그중에서도 세라복류의 청량한 옷은 더더욱 잘 받을 거다,
반면 도승이 형과 나는 세라복과는 거리가 꽤 있다.
“잘 어울릴 거예요.”
이런 부분에 있어선 같은 말을 힘주어 반복하는 게 다른 이유를 그럴듯하게 대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특히 연훈이 형이 잘 받을 거거든요.”
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라복은 연훈이 형에게 특히 잘 받을 거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선 충분한 이유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고.
“연훈이 형 잘 받는 의상 하겠다고 세라복을 고른 거야? 그 이유 하나로?”
이런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저 말도 맞다.
‘고작 이유 하나’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 말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말하면 ‘고작 하나짜리’ 이유는 아니게 된다.
“우리 지원 영상에서 연훈이 형 센터에 세워두고 했잖아요. 아마 그룹 색깔이 아직까진 연훈이 형 중심으로 잡혀 있을 거란 말이에요. 시청자분들에게든, 아니면 다른 출연진분들에게든요.”
“그래서 세라복 가자는 거야?”
“네. 연훈이 형이 세라복이 잘 어울리니까, 그룹 색깔 못 박는 느낌으로 가잔 거죠. 아직 방송 초기니까요.”
“흐으음.”
도승이 형은 이해는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소 걱정은 되는 눈치였다.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한 번 청량을 했다가 늘 청량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다만,
“딱 다음 무대까지만 청량 하고 그다음부턴 다른 거 해요.”
청량을 계속 밀고 나갈 생각은 없다.
“……그래?”
도승이 형도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수용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다만 마지막까지도 아쉬운 모양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컨셉이 있을 테니까.
물론 도승이 형이 생각하고 있을 컨셉들도 분명 좋은 컨셉들일 거다.
나보다 훨씬 감 좋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번 무대만큼은 세라복을 가야 한다.
“딱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지금까지 잘했잖아요.”
가불기 느낌이긴 한데 마지막 한 수까지 썼다.
지금까지의 활약을 증거로 내 말 믿어 달란 거다.
“후우. 그래. 알겠다. 세라복 하자.”
도승이 형은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세라복 하면 좋잖아! 우리 이름이 세이렌이기도 하니까!”
연훈이 형은 이때다 싶어 대화에 들어와 분위기를 띄웠다.
“맞네! 세이렌이 세라복 입는 거네!”
“나름 또 맥락은 있네요.”
“그래. 좋을 수도 있겠다.”
다들 세라복에 대한 수용을 빠르게 마쳐서 다행이다.
이제 남은 건,
‘세라복이라…….’
내가 받아들이는 거다.
세라복을 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5년간 방구석 소설가로만 살던 자아를 단번에 버리고 세라복을 입어야만 하는 이 현실이 너무도 냉혹했다.
다만,
‘입자.’
입어야만 한다.
그 참사를 피하기 위해선.
* * *
세이렌 촬영이 끝나고 난 후.
김민영은 더 쇼케이스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건 피로한 얼굴의 박수철 피디였다.
“아이고. 왔어?”
박수철이 시뻘게진 두 눈을 비비며 말한다.
“이거 먹고 술이나 깨세요.”
벌써 저녁 시간을 향해가는데 아직도 숙취가 있는 모양이다.
김민영은 오는 길에 약국에서 사 온 숙취 해소 세트를 내밀었다.
“고맙다. 민영이밖에 없어.”
박수철은 능숙한 손동작으로 숙취해소제 뚜껑을 따더니 알약들과 함께 단번에 집어삼켰다.
“아아아. 진짜 다신 술 안 마셔어어.”
“어제 그래서 제작비 관련해서는 잘 얘기됐어요?”
“그 삼풍꺼 음료수 회당 3번 이상 노출시키는 걸로 회당 제작비는 얼추 나올 거 같다.”
“다행이네요.”
박수철이 지금 숙취에 찌들어 죽어가는 이유.
방송의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한 나름의 전투를 끝내고 왔기 때문이다.
더쇼케의 경우 워낙에 큰 프로젝트이다 보니 제작비가 늘 문제다.
협찬도 잘 받아야 하고 회사에도 예산 편성을 많이 받아야 하니까.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고맙다. 하필이면 조승운이도 같이 회식 데려가는 바람에. 연출도 없이 수고 많았어.”
여기서 말하는 조승운은 팀의 막내 피디였다.
“됐어요. 승운이 데려가 봐야 짐꾼으로밖에 더 썼겠어요.”
“그 말도 맞네.”
박수철은 그리 말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서 어땠어, 세이렌 촬영은? 하루 만에 촬영 픽스된 거라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일단 바빠지기 전에 한 팀 끝내서 일정에 여유는 확 생기긴 했어요.”
“오케이. 그건 좋고. 본론은?”
“흐음.”
김민영은 박수철에게 보고하기 전에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애초에 박수철과 함께 논의하던 세이렌의 방향과 많이 다르다.
처음엔 그저 온리원 옆에 붙일 악역처럼만 쓸 생각이었다.
또한 방송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짠내를 극대화 시킬 그림으로 쓸 생각이었고.
방송 색깔 흐릿해진다 싶으면 썰렁~ 같은 효과 잔뜩 넣은 세이렌네 숙소나 연습실을 중간중간에 무지성으로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아직 팬덤이 크지 않은 데뷔 안 한 아이돌이기에 이 정도의 강도 높은 편집을 할 수 있다.
다만 막상 보고 온 세이렌은,
“밋밋한 악역으로만 쓰거나, 짠내용으로만 쓰기엔 솔직히 아깝던데요?”
“그래?”
예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외모만 번지르르할 줄 알았는데 실력도 꽤 있어요.”
“그런데 WD 같은 이상한 회사에 있어?”
“뭐, 사정이 있겠죠. 거기도 보니까 관리자급이 한 번 바뀐 거 같더라고요. 그전까진 나름 괜찮았던 거 같던데.”
“그래?”
“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민영은 결정적으로 우연훈 노래가 미쳤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너무 주책일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결정적으로 뭐?”
박수철이 다시 묻자.
“그, 어, 애들 사이가 좋아요.”
“뭐?”
“아니, 애들이 진짜 형제 같고 보기 좋다고요.”
“뭐, 뭐야?”
“뭐가요.”
“왜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뭐가 웃으면서예요.”
“너 지금 말하면서 웃잖아.”
김민영은 본인의 입꼬리를 살폈다.
박수철 말대로 진짜 위로 올라가 있었다.
“미친.”
“하하하!”
박수철이 박장대소하고 김민영은 인상을 구겼다.
“궁금하다. 걔네 어떤 애들일지. 확실히 영 별로인 애들은 아닌가 보네.”
김민영이 한참 떠들었던 그 어떤 말들보다 방금 그 미소 한 번이 박수철에겐 더 중요한 지표였다.
그렇게 첫 촬영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오늘은 <더 쇼케이스2 - 퍼스트 찬스>의 공식적인 첫 촬영날이었다.
‘정말, 하얗게 불태웠네.’
지난 열흘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다.
세라복을 입자는 것 외에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만져야 할 게 한 트럭이었다.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수준.
곡도 찾아야 하고.
안무도 짜야 하고.
의상도 디테일들을 전부 신경 쓰며 구매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돈도 받아내야 했다.
이제부턴 우리가 사비로 때울 수가 없는 부분이다.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승연 씨와 현아 씨가 윤태형에게 가서 법인카드 사용을 요청한 결과, 한참의 씨름 끝에 예산을 받아냈다.
물론 그 예산이랄게 너무 짜서 뭘 해볼 수가 없는 정도였으나,
‘일단 받아내긴 했으니까.’
조금일지라도 예산을 받아냈다.
그 돈으로 우리 의상도 맞췄고.
예산으로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싼티 안 나는 해군 세라복으로 샀다.
남들은 다 팀별로 스타일리스트가 붙어서 의상 코디해 주겠지만 우린 그런 거 없이 서로가 의상을 직접 피팅해 줬다.
그리고 지금은,
“진짜 샵 가는 거야?”
“이야.”
“WD 돈 없을 텐데.”
첫 촬영을 위해 샵을 가는 길이다.
이 샵 구하는 것도 애를 많이 먹었다.
예산으로 갈 수 있는 샵이 거의 존재하질 않았다.
애초에 이 돈으로 샵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기란 불가능한 수준.
차라리 예산 내로 진행할 수 있는 저렴한 거래처를 새로 뚫는 게 더 빠를 수준이었다.
다만 이 금액으로 새벽 노동을 해줄 전문인력이 과연 존재하는가가 문제였지.
그때 WD엔터의 이현아가 인맥을 발휘했다.
본인 사촌 언니가 강북 어딘가에서 작게 샵을 운영한다며 그쪽에 전화를 하더니 결국 일을 성사시켰다.
비록 진짜 연예인들이 가는 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가 손에 머리랑 얼굴 한번 맡기고 방송에 임할 수는 있게 된 거다.
오늘 촬영은 오전 9시부터 이뤄진다.
다만 촬영지가 경기도에 있는 스튜디오고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해야 하니 결국 새벽에 기상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기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룹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온갖 불가능을 뚫고 여기까지 왔으니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 1층으로 내려가니 승합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건 WD엔터의 디자인팀 윤승연이다.
“다들 타세요!”
“새벽에 일어나느라 고생 많았어요!”
조수석에는 경영지원팀 이현아가 타고 있었다.
“진짜 벤이네.”
“신기하다.”
“뭔가, 진짜 뭔가 되는 느낌이야.”
우린 다 같이 차량에 탑승했다.
이 차량도 회사 주차장에 장기간 방치되어 있던 걸 다시 끌고 나온 거다.
분명 열흘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름 구색은 맞췄네.’
샵부터 시작해 의상과 차량까지.
얼추 엔터 같은 꼴은 갖췄다.
“자! 출발합니다!”
우린 그대로 강북에 있는 이현아 사촌 언니의 미용실로 향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현아네 회사 연습생분들이시죠?”
도착한 미용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영세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왜 이렇게 크나 싶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곳이었지.
연예인 헤어와 메이크업만 안 할 뿐 동네에서 머리 잘 만지기로 소문난 미용실인 모양이었다.
메이크업 담당자도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외적인 준비까지 끝내고.
의상까지 걸친 후.
우린 경기도에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로 가는 길.
“잘할 수 있지 애들아?”
연훈이 형이 사기를 끌어올리려는 건지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 팀인사도 다들 숙지했고?”
참고로 지난 열흘간 팀인사도 따로 만들었다.
“다 숙지했으니까 걱정 마요.”
“오늘 촬영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떨지 마세요, 형.”
“연습 많이 했으니까 가서 즐기기만 하죠. 형 완전 멋있어요, 오늘.”
분명 연훈이 형은 팀을 걱정해서 입을 뗐는데 오히려 본인이 멤버들에게 둥가둥가를 받았다.
“어, 어어! 그래! 맞아! 나 오늘 멋있어!”
막상 본인은 이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고 해맑게 웃고만 있다.
난 창 너머를 바라봤다.
‘오늘부터 시작이네.’
열흘간 나름 준비한답시고 갖은 고생은 다 했는데.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이번에 준비한 무대.
안 중요한 무대가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나 중요한 무대다.
‘한 번은 뒤집어야지.’
제작진들이 만들어뒀던 그 판을 이젠 뒤집어야 하니까.
나 홀로 남들보다 2배쯤 더 비장한 마음을 품고 창밖을 바라봤다.
약 1시간쯤 달리고 나자.
“자! 도착했습니다!”
우린 오늘 촬영이 이뤄질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끄아아아!”
“뻐근하다, 뻐근해!”
“내리자.”
우린 롱패딩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차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은,
“응?”
온리원의 차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