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7화
선전포고 영상이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아, 그, 안녕하십니까, 세이렌분들. 온리원의 김시운입니다.
하필이면 첫 시작도 온리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온리원과 우리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걸 모르는 팀은 없을 거다.
똑같은 영상을 찍어 올린 거 때문에 온리원 팬들 사이에서 우리 이미지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니까.
한데 그런 팀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건,
‘조작이네.’
이 방송국 놈들이 온리원한테도 조작을 했다는 거다.
우리한테도 조작한 놈들인데.
뭐 누구한테 못 할까 싶었다.
온리원의 김시운은 쉽게 입을 못 떼고 우물쭈물대고 있었다.
온리원이 강현성 덕에 이 망돌들 사이에선 왕 같은 포지션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얘네도 중소다.
방송 상황에 대한 매너 교육, 멘트 교육 같은 것까지 따로 시켜줬을린 없단 거다.
애초에 그런 교육을 받는다 해도 첫 촬영 땐 떠는 게 당연한 거고.
김시운은 무슨 말을 할지 도저히 못 정하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저, 저희랑 같은 영상 찍은 거 봤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그걸 대놓고 꺼내 버렸다.
현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아무도 웃지도 않았고, 섣불리 말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이게, 우연일지 운명 같은 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김시운은 소년만화 같은 대사를 마지막으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어떻게든 밝게 끝내보려 한 거 같은데 애석하게도 반응이 크게 돌아오진 않았다.
이대로 가면 선전포고 한 사람도 민망해지고 받은 우리는 악마처럼 보일 거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야 방송에 악편은 안 당할 텐데.
섣불리 웃거나 그러기엔 위험하다.
방송엔 그 웃음도 비웃는 걸로 나갈지도 모르니까.
한데,
“하하하하!”
연훈이 형이 웃었다.
아주 해맑게.
방금 그 영상이 매우 재밌었다는 듯.
아니지.
이건 정말 재밌었던 것 같다.
김시운을 보며 호감 가득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맞아요! 진짜 우리 무슨 운명 같은 느낌인 거 같아요!”
연훈이 형은 김시운이 한 말 중 절대 지지 않겠다, 보다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는 말에 더 방점을 찍은 거 같았다.
온리원의 김시운은 구명줄이라도 받은 사람 마냥 연훈이 형의 멘트를 덥석 받았다.
“어, 어쩌면, 사랑, 일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제야 현장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아~ 두 팀 벌써부터 둘 사이에 어떤 시그널이 오가는 것 같네요!”
김영진은 적절한 순간에 멘트를 치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다음 팀은, 온리원 나왔으니 이제 세이렌 나와줘야겠죠? 세이렌분들의 선전포고 영상입니다!”
이어진 영상은 우리의 선전포고 영상.
이건 내가 나오는 거다.
-저희는, 온리원분들을 반드시 이길 겁니다. 질 수가 없습니다. 진심으로요.
초장부터 안 질 거라 못 박고 시작하는 탓에 분위기 한번 거하게 조졌다.
하지만 그 뒤 이어지는 짠내 대잔치는 타 그룹원들을 웃프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석면가루 마시며 춤을 춰보신 적 있으십니까?
“석면가루…….”
“……풉.”
“아이고…….”
다들 입을 가리고 조심스레 웃었다.
-바닥이요, 이 마룻바닥이, 막 끽끽대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끽끽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에 블레슈의 리더는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
저 사람 웃음 참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올해로 열아홉 살인데 벌써 허리가 아픕니다. 왤까요? 연습실에 폼롤러 하나 구비가 안 되어 있거든요.
“어우.”
“어떡해…….”
폼롤러 부분에선 웃음기 없이 진짜 짠내 난단 듯 모두가 우릴 쳐다봤다.
난 당당하다.
나의 이 짠내 과시로 우리 팀 선전포고의 포인트는 기싸움이 아닌 짠내 싸움으로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하아…….”
“우으으으…….”
“진짜 미치겠네.”
“하하하!”
우리 팀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도승이 형은 가오 상한 고딩 마냥 날 노려봤고.
연훈이 형은 얼굴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았으며.
운이 형은 정말 참담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준이 형만 그냥 재밌단 듯 웃고 있었다.
-저희는 온리원분들에게 질 수 없습니다. 진짜 지면 저흰 갈 데가 없어요.
이내 선전포고 영상이 끝나자,
“제가 폼롤러 사드리겠습니다!”
“저희도요!”
“저희 연습실에 폼롤러 많습니다! 하나 드릴게요!”
“색깔별로 맞춰드릴 수도 있습니다!”
곳곳에서 무수한 폼롤러 기부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폼롤러에 꽂힐 줄은 몰랐는데 준다면 받을 예정이다.
“저도, 만일 주소 알려주시면 폼롤러 사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MC 나현도 우릴 보며 그리 말했다.
“저희 정말 괜찮습니다! 저 날 이후로 제가 우리 막내 폼롤러 사줬어요!”
연훈이 형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수습하려 했지만,
“안 사줬습니다.”
내가 정정해 줬다.
진짜로 안 사줬으니까.
“우으으……. 태윤아…….”
연훈이 형이 왜 안 도와주냐며 울먹거리지만,
“안 사줬잖아요, 형.”
안 사준 걸 사줬다 할 순 없다.
우리 대화가 일종의 촌극처럼 보인 건지 타 그룹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초반에 조금 어두워질 뻔했던 분위기가 이젠 분명하게 밝아졌다.
이후로 다른 팀들의 선전포고 영상도 올라왔다.
온리원과 우리가 했을 때보단 말의 수위가 올라가는 영상들도 있었는데 한번 분위기가 풀려서인지 크게 문제 되지 않고 웃으며 넘어갔다.
그렇게 적당히 화기애애하게 선전포고 영상들 보며 촬영을 이어가다가,
“선전포고 영상까지 모두 보고 왔으니, 이젠 각 팀의 120초 대면식 무대, 더 기다릴 순 없겠죠?”
MC 김영진이 그리 말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웃고 떠들던 현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다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대 준비하라는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이토록 급변할 수 있단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만큼 다들 이번 무대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대면식 무대를 어느 팀이 먼저 하게 될지, 무대 순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MC 나현의 말에 맞춰 전광판 위로 순서가 올라왔다.
1 – 루미닌
2 – 원바이원
3 – 블레슈
4 – 온리원
5 – 세이렌
“응?”
“어어?”
올라온 순서는 여러모로 의외였다.
이번 무대 순서는 제작진들이 리허설 무대를 본 후 회의 끝에 정한 순서라고 알고 있다.
난 당연히 온리원이 엔딩일 줄 알았다.
한데.
“우리가 엔딩이야?”
“에?”
온리원이 4등.
우리가 5등이다.
난 우리를 그냥 무매력 악당 엑스트라 1 정도로만 쓸 줄 알았다.
한데 이건 조금 더 우리를 중역으로 쓰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 볼 만하다.
아마도,
‘리허설 보고 피디 생각이 바뀐 거려나.’
박수철 피디가 리허설에서 뭔가 결단을 내린 것이리라.
“좋은 거겠지?”
“그, 그렇지 않을까?”
이걸 마냥 좋다 할 수 있을진 애매했다.
여기서 잘하면 단번에 급상승이겠지만 엉망인 무대를 한다면 역풍이 아주 거셀 거다.
‘피디픽이냐 주작이냐로 욕 잔뜩 먹겠네.’
어쩌면 온리원이랑 똑같은 영상 올린 것도 피디가 나서서 한 주작 아니냐며 쌓아 올린 인지도가 그대로 화살이 되어 꽂힐지도 모른다.
그때,
“루미닌분들 무대 준비해 주세요!”
MC 김영진이 그리 말하며 루미닌을 무대 가운데로 불렀다.
1번으로 무대를 할 루미닌이 위로 올라왔다.
적당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지금부터 더 쇼케이스2 퍼스트 찬스의 대면식 무대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 * *
루미닌을 시작으로 대면식 무대가 이어졌다.
루미닌은 퍼포먼스가 주력인 그룹다운 무대였다.
베이스가 강한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 없이 춤으로만 무대를 전부 꾸몄다.
전문 댄서들끼리 만든 무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문제는,
‘어두워.’
얼굴 식별이 안 된단 거다.
멋있긴 하다.
하지만 누가 어디에서 뭘 추는지가 보이질 않았다.
두 번째 무대는 원바이원이었다.
힙합 그룹답게 당연히 강렬한 808 베이스에 맞춘 곡을 갖고 왔다.
귀에 때려 박히는 래핑과 상반되는 보컬 멜로디 라인들.
잘 부른다.
또 랩도 잘하고.
하지만 남는 감상은,
‘어두워.’
얘네도 어둡다.
곡 분위기 자체도 빡세다 보니 조명도 어두운 걸로 들어갔다.
세 번째 순서인 블레슈는 지원 영상에서 보여줬던 친근한 이미지는 어디 가고 갑자기 크럼핑 무대를 준비해 왔다.
기존에 유명했던 아이돌의 컨셉츄얼하고 빡센 곡을 들고 왔는데 역시나 열심히 하고 잘한다.
문제는,
‘제일 어둡네.’
어둡다.
시선이 자꾸만 분산된다.
1, 2, 3번까지의 무대 감상을 정리하자면 검은색 옷 입은 남정네들이 떼거지로 나와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쁘게 팔다리를 놀린 다음 고음 한번 빡 지르고 끝났다, 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건 나만의 감상이긴 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후한 반응을 보인다.
“와, 진짜 멋있어!”
“대박!”
“춤 진짜 다들 엄청 잘 추시네.”
“엄청 이 갈고 나온 게 보이신다.”
자기네들 보기엔 멋있겠지.
또 실제 육안으로 직접 보는 거니 더 멋있어 보일 테고.
노래라는 건 라이브로 듣는 것보다 음원으로 듣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지만 춤은 거의 100의 확률로 실제로 봤을 때 더 멋진 분야다.
하지만 티브이 앞에서 이걸 보고 있을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잘한다, 정도의 감상에서 끝나겠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주고받는 후한 감상은 남지 않을 터였다.
이제 남은 건 온리원의 무대.
3번 무대였던 블레슈 사람들은 방금 막 엔딩 포즈를 촬영한 후 좌석으로 돌아왔다.
어찌나 격하게 췄는지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을 헥헥댔다.
“진짜 멋있었어요!”
“와, 크럼핑 느낌 살리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진짜 잘 맞추셨네요.”
“약간 락킹 동작도 보이던데 장르 두 개 섞으신 거죠?”
“아, 맞아요!”
“역시,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네요.”
운이 형과 연훈이 형, 도승이 형은 블레슈와 친목을 쌓으며 무대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반면 난 블레슈엔 신경도 안 쓰고 눈앞의 무대만 바라봤다.
지금까지 무대에 잘한다, 멋있다, 어쩌니 했던 본인들이 부끄러워질 순서가 오고 있으니까.
“블레슈의 파이팅 넘치는 무대! 잘 봤습니다! 지원 영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블레슈만의 새로운 매력이네요!”
MC의 의례적인 멘트가 지나간 후,
“그러면 이제 다음 무대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리원분들! 무대 위로 올라와주세요!”
온리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묘하게 장내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다들 이전 무대들보다 더 집중해서 온리원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인 이벤트 같은 거네.’
아마 모든 팀이 온리원을 의식하고 있었을 거다.
강현성이 속한 그룹이니 말이다.
지금이야 우리랑 같이 망돌 모아서 하는 더쇼케2에 나오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1군이던 사람이다.
셀유돌을 통해 데뷔한 1년짜리 프로젝트 그룹 유어스는 활동 당시 다른 1군들이 죄다 휴식기를 가진 상태였던지라 더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그랬던 그룹의 메인 멤버 중 한 사람.
셀유돌을 통해 이미 입증된 실력까지.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는 캐릭터다.
난 온리원이 무대 위에 자세를 잡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검은색 테크웨어에 허리춤에 칼집을 차고 있다.
칼집엔 어떤 칼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의상만 보면 대충 사이버 펑크를 연상시킨다.
이때, 방송이 나가고 난 후에 돌판 팬들 사이 여론이 어떻게 잡혔었는지를 잠시 떠올렸다.
아마,
‘중소는 중소인 이유가 있고, 강현성은 강현성인 이유가 있다 였나.’
겉으로 보면 온리원도 다른 그룹과 크게 차이 나진 않는다.
같은 검은색 의상에 베이스 둥둥 하는 음악이니까.
하지만 어떤 장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하냐가 더 중요한 거지.
이내,
두웅-
묵직한 베이스음이 들려왔다.
조명이 꺼지고 붉은색 핀조명이 떨어지며 온리원을 비춘다.
그 순간.
끼기기긱-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전자음이 울려 퍼지더니,
탁.
강현성이 계단처럼 도열한 멤버들의 등을 밟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마치 짠 것처럼 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며.
-We will TAKE OVER! HOOK!
-내 걸음에 발맞춰!
곡의 훅이 터져 나왔다.
1초라도 틀어졌다간 나올 수 없는 장면.
그 절묘한 타이밍에,
“와.”
“미친.”
장내에 있던 모두가 탄성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