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30화 (30/227)

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30화

방청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세이렌 멤버 다섯이 무대 위에 일렬로 서서 관객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처연한 느낌.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닭살이 돋았다.

전광판에 떠오른 커다란 달이 푸른 빛을 사방에 뿌리고.

푸른 도포를 갖춰 입은 멤버들은 흔들림 없는 곧은 눈동자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의 무대들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한복과 달, 이라는 설정 자체에서도 특색이 묻어나오지만,

‘뭐지?’

어딘가 차분하다.

신인들만의 그 부산함이 없다.

긴장은 한 것 같지만 그 긴장이 실력이 부족함에 대한 긴장은 아닌 것 같다.

무대를 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오는 가벼운 긴장.

오히려 무대의 맛을 더 살려주는 정도였다.

이윽고.

-깊고 어둔 밤. 잠 못 이룬 날.

-부드럽게 휘어감아.

-망망한 창공에 푸른 달빛은.

-또 날 거리로 내몰고.

메인보컬 우연훈이 센터로 한 발 나서며 입을 뗐다.

허공을 어루만지는 손이 마치 무언가를 쓰다듬듯 관능적이었다.

우연훈이 팔을 옆으로 촤악 하고 펼치자 뒤에 서 있던 멤버들이 날개를 펼치듯 옆으로 한 발씩 튀어나왔다.

이내 멤버들이 각자 팔을 활처럼 휘며 하늘 높이 쳐들었다.

이어진 팔들이 만들어낸 곡선이 무엇을 형상화하는지는 뻔했다.

‘초승달!’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이다.

초승달이 깨지고.

그 사이로 메인댄서 이운이 나온다.

-아리땁던 그대의 눈빛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그날의 온기

-더 멀어질 수 없던 우리 둘 사이가

제자리에서 걷듯 몸에 가볍게 웨이브를 주는 동작이었는데 마치 물결이라도 치듯 부드럽고 정확한 웨이브였다.

이운 뒤로 박동준이 나오며 파트를 이어 불렀다.

-더 짙어져 가

-이 그리움만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

-그날의 너와 나

부드럽고 고운 음색이 무대 위로 퍼져 나갔다.

잔향이 길게 가는 청아한 음색 뒤로,

-달 아래 피어난 슬픈 꽃처럼

-한밤에 일어난 잔인한 일처럼

-그대 손을 타고 흐르던 선혈 한 줄기가

-뜻하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을.

팀의 막내 봉태윤이 나오며 노래를 이어 불렀다.

곡에 깊이 몰입한 건지 가사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이 실려 있었다.

봉태윤의 파트가 끝나고.

뒤에 숨어 있던 우연훈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멤버들의 대형이 빠르게 바뀐다.

가운데 우연훈을 두고 사방을 에워싼다.

이내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멤버들이 넓게 퍼졌다.

보름달이었다.

동시에 전광판에 푸르게 빛나던 달이 뒤집어지더니,

‘붉은 달?’

분위기가 반전됐다.

-달아 달아 날 쫓지 마라

-도망간 임 찾아

-다시 이 숲을 뒤지고

우연훈이 쓸쓸하면서도 처연한 목소리로 목 놓아 타령을 한다.

-밤아 밤아 다신 오지 마라

-떠나간 임 찾아

-또다시 날.

그 순간 노래가 툭 끊기더니,

-Awoooo-!

늑대 울음소리가 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곡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선비가 연인을 그리워하네,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던 방청객들은 입을 살짝 벌리며 무대를 주시했다.

메인댄서 이운이 앞으로 나오며 후렴구 안무를 시작했다.

-한밤에 쏟아지는 달빛을 피해

-그대가 달아나 버린 그 밤을 피해

-날 피해 달아난 당신을 위해

-이 밤을 겨우 또 견뎌내는

-어여쁜 날 위해.

푸른 도포를 벗어 던지고.

입가에 칠한 붉은 연지를 슥슥 지워내자.

마치 피칠갑이라도 한 듯 분위기가 반전됐다.

선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걸 노래하는 게 아니었다.

선비로 위장한 늑대.

조선판 늑대 수인 이야기였던 셈이었다.

신분 차로 사랑할 수 없게 된 사극 클리셰를 노래하는 줄 알았던 방청객은 입을 벌리며 무대를 바라봤다.

‘신분 차가 아니라 종족 차였던 거야?’

이미 한복에 사극풍 노래 들고 온 것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달의 푸른빛만 가져온 게 아니라 거기에 늑대 수인 컨셉까지 곁들였다.

누구는 과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무대 위에 그 요소들이 적절하게 조화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컨셉츄얼한 소스들이 마치 조작이라도 한 듯 한데 모여 있자,

“으아아아악!”

진심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취향저격.

이 말이 그냥 만들어진 단순한 유행어일 줄 알았는데.

지금 그녀는 정말 누가 저격한 총에 맞기라도 한 듯 정신이 얼얼했다.

* * *

박수철 피디는 생각보다 뜨거운 현장 분위기에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크게 벌어진 입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더니 그대로 미소가 되었다.

파안대소라는 말을 따다 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이렌의 리허설을 볼 때에도 잘한다 싶었다.

대면식 곡부터 이번 곡까지 전부 자작곡이라는 걸 왜 처음부터 알리지 않았나 싶어 짜증이 났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였다.

한데 리허설보다 본 무대가 훨씬 좋다.

관객들이 있으면 보통 더 긴장하게 마련인데,

‘더 날아다니네.’

멤버들 하나하나가 훨씬 무대를 잘 소화하고 있다.

무대를 쓰는 스케일만 봐도 차이가 보인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여유 있게 사용 중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동작이 작아지고 동선도 짧아진다.

한데 세이렌의 경우엔 마음의 여유가 넘치는 만큼 동작도 정확하고 동선도 큼직하다.

그러니 무대를 보는 관객들 입장에서 더 볼 맛이 나는 거다.

특히 압권은,

“어어어어!”

“뭐?”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아!”

저 무대가 선비들의 무대가 아닌 늑대인간들의 무대라는 게 밝혀지던 순간이었다.

그간 의례적으로만 환호하고 박수 치던 관객들이 진심으로 환호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체감됐다.

이걸 어떻게 편집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편파적이라는 말을 안 들을지.

그 생각을 하며 박수철 피디는 무대를 계속 바라봤다.

* * *

-달아, 달아

-푸른 달아

-끝내 못 전한 이 내 마음

-이 밤에 묻고 난 이제 가련다

무대가 끝이 났다.

방청객은 멍하니 무대 위의 세이렌 멤버들 다섯을 바라봤다.

그녀만 멍할 뿐 현장 분위기는 아직도 뜨겁다.

멍한 이유는 너무 소리를 질러 대서 금세 힘이 빠진 거였다.

마지막 아웃트로를 장식한 건 래퍼 강도승이었다.

강도승이 아웃트로를 부른 후 이운이 다시 무대 센터로 나왔다.

그대로 엔딩 포즈까지 이어진다.

이운이 아마 이번 무대 센터였던 모양이다.

다만 그런 거야 아무 상관 없다.

아니지.

이운이 센터인 건 중요한 요소다.

이운의 그 유려한 춤선과 어딘가 은은하게 돌아 있는 것 같은 눈빛이 무대의 맛을 더 살려줬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거였어.’

그녀가 드디어 한 그룹에게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단 거였다.

그간 케이팝 덕질하며 오랜 기간 설렘이나 떨림 같은 걸 잘 못 느꼈다.

어느 순간부턴 관성적으로 유명한 무대들 챙겨보고 그랬던 것 같다.

한참 덕질하던 최애가 온갖 문제들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몰락하고.

그 과정에 탑티어 홈마들이나 팬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걸 보다 보니 본인도 지친 모양이었다.

다만 케이팝을 사랑했던 시간이 길다 보니 그저 망령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기웃대고 있었다.

잘생긴 아이돌도 많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아이돌도 많은데.

이상하게 마음은 잘 안 갔다.

눈은 즐겁지만 진심으로 행복하진 않은 느낌이었는데,

‘너무 좋아!’

오늘은 아니었다.

망돌 모아둔 프로그램에서 진짜 새오빠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아직 무대 하나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이게 레전드 무대였을 수도 있고.

앞으로는 이만한 무대가 안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거야 상관없다.

이미 이 순간만큼은 세이렌이 마음에 꽉 들어왔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사라져 버릴 마음이라 해도 이 순간만큼은 충실하게 즐기고 싶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두 눈 가득 담아도 보고 싶은 느낌.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하게 다가오는 순간.

너무 오랜 기간 덕질을 쉬어서일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이 마음은 과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참았던 만큼 폭주 중인 것일 테니까.

이제 엔딩요정 컷을 찍는 걸까.

무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이 한 자세로 서서 카메라를 노려봤다.

방청객은 각 멤버들이 어떤 눈빛으로 엔딩 표정을 잡는지 하나씩 지켜봤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이운이었다.

메인댄서의 소양에는 표정도 포함되어 있는 법이다.

결연하고 차분하면서도 벅차오른 듯한 느낌.

이번 무대를 잘 압축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운이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는데,

‘어?’

이상하게 시선이 이운 옆의 멤버로 간다.

마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뭔가 하고 봤는데,

‘봉태윤?’

팀의 막내다.

잘생기긴 했다만 본인 취향은 아니었다.

그녀는 좀 더 맑고 청순한 타입을 좋아하니까.

한데 이상하게 봉태윤에게 시선이 자꾸 갔다.

봉태윤의 눈빛이 마치,

‘뭐야 저거.’

날 봐! 라고 외치는 듯했으니까.

이운이 선비와 새벽이라는 느낌이 잘 살아 있는 표정이었다면 봉태윤은 늑대 수인 느낌이 잘 살아 있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늑대상이니 그런 컨셉츄얼한 표정을 잘 살릴 수 있을 거 같긴 했는데,

‘오…….’

그 이상으로 무언가 있는 것 같다.

본인 취향은 이운이다.

한데 취향을 박살 내고 자꾸 막내가 눈에 들어온다.

이게 비단 본인만의 일이 아닌 걸까,

“와아…….”

“표정 대박인데……?”

곳곳에서 이런 말이 들려온다.

묘한 감정에 갈팡질팡할 무렵,

-감사합니다! 세이렌이었습니다!

무대가 끝이 났다.

“아.”

탁 하고 맥이 풀렸다.

본인도 모르게 과하게 집중 중이었나 보다.

“와아아아아아아!”

때마침 사방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 * *

무대의 끝.

엔딩 포즈를 잡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다.

오늘 무대를 잘 끝냈다.

다행이다.

생각했던 만큼 딱 좋게 나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한데,

‘흐음.’

엔딩용 클로즈업 카메라 불빛이 들어오자 아까 운이 형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눈빛을 조금 더 사용해 보라고.

무대 하는 동안엔 잊고 있었는데, 막바지에 다시 떠올랐다.

괜히 했다가 흑역사 되는 거 아닌가 싶어 참으려 했는데,

지이잉-

‘뭐?’

내 의사와 상관없는 순간이 이어졌다.

‘통찰’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거다.

지금 이건 난감하다.

하지만 난감하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아.’

무대 위에서 어떻게 눈빛을 써야 하는지.

이 컨셉과 무대에 어울리는 표정이 무엇인지.

그게 너무도 명쾌하게 느껴졌다.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근육이 풀어지는 것과 표정이 바뀌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젠 에라 모르겠단 마음이었다.

해서 통찰을 통해 만들어낸 그 표정을 지은 채 카메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와아…….”

“표정 대박인데……?”

무대 아래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괜히 부끄럽지만 이제 와 표정을 풀 순 없었다.

이후 카메라 불빛이 꺼지고 나자,

탁.

자연스레 통찰도 끝났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형들과 눈을 맞췄다.

다들 무대에 만족한 걸까.

표정들이 밝다.

“감사합니다! 세이렌이었습니다!”

우린 다 같이 인사했다.

이제 내려가려는데,

“와아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150명이 만들어낸 함성이라기엔 꽤 크다.

그 탓일까.

“헉!”

“세상에.”

“흐읍!”

우린 자리에서 잠시 굳어버렸다.

그러곤 동시에 다들 한 지점을 바라봤다.

대상은 연훈이 형.

아마 연훈이 형 성격상 이런 함성을 듣는다면,

“흐으읍……! 우으으…….”

감격할 게 뻔하다.

“어어어어!”

“형!”

“울지 마요!”

연훈이 형의 수도꼭지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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