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35화
노골적인 줄 세우기 미션.
난 잠시 표정을 지우고 제작진들을 바라봤다.
끽해봐야 여기 모여 있는 인원들 평균 나이는 20대 초반일 거다.
보통은 군대에 있거나, 대학교에 있거나, 잘해봐야 겨우 사회에 첫발 내디뎠을 나이다.
한데 그런 애들한테 꽤 잔혹한 미션을 줬다.
타 그룹의 무대 중 하나를 가져와서 하라니.
‘티가 너무 날 텐데.’
당연히 일대일로 비교가 된다.
컨셉 자체가, 곡 자체가, 편곡 방향이……라는 식의 변명이 먹히지 않는 구조다.
아니지.
이게 얼핏 보면 일대일로 공평하게 비교가 되는 것 같겠지만,
‘후발주자가 무조건 불리하지.’
이미 한번 봤던 무대를 다시 한 번 더 선보이는 거다.
잘한다 한들 충격을 주기 어렵다.
즉,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 정도인 게임인가.’
정말 놀라 뒤집어질 정도로 하지 않는 이상 본전 건지기가 겨우인 게임이란 거다.
전생에서도 이런 게임은 없었다.
이전에도 충분히 독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매운맛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신세 한탄에 시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난 형들을 바라봤다.
형들은 미션 자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건지 다들 멍한 표정이다.
난 형들 대신 전략을 짜보기 시작했다.
일단 후보군이 많은 건 아니다.
끽해봐야 대면식 무대와 1차 경연 무대.
모든 팀들이 총 2개의 무대만 한 상태니 말이다.
즉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총 8개다.
온리원의 대면식 무대와 1차 경연 무대.
블레슈의 대면식 무대와 1차 경연 무대.
원바이원과 루미닌의 대면식 무대와 1차 경연 무대.
한데 솔직히 말해서,
‘루미닌이랑 원바이원은 빼자.’
쟤네 무대 중 가져올 만한 건 없다.
무대 퀄리티를 기준으로 두고 한 가지를 가져오라 한다면 온리원을 가져와야 한다.
다만,
‘온리원보다 잘할 수 있을까.’
무대 좋아 보인다고 쟤네 무대를 덜컥 가져왔다가는 외통수에 몰릴 수 있다.
어떻게 하든 죽을 수밖에 없는 판이 될 수 있단 소리다.
심지어,
‘온리원이 우리를 라이벌 구도로 잡고 가는 건 좋아도, 우리가 그걸 너무 티 나게 유도하면 욕먹을 텐데.’
온리원과 우리 사이에 체급 차이가 너무 난다.
함부로 쟤네 노래 골랐다가 욕먹을 수도 있다.
강현성 머리채 잡고 올라가려 하냐면서.
물론 지금까지도 욕은 푸짐하게 먹은 것 같긴 하다만,
‘여기서 더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니까.’
아직까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존이다.
그러니 이제부턴 온리원이 우릴 도발해야 한다.
“후우우.”
잠시 심호흡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웠다.
어떤 곡을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따오고 싶은 무대를 골라보라면,
‘솔직히, 온리원이긴 하지.’
아주 개인적인 감상으로서 그렇다.
하지만 쉽게 따올 수 있고, 안전하게 이겨먹을 수 있을 만한 팀을 대라면,
‘루미닌이랑 원바이원.’
이쪽들이다.
솔직히 모인 팀들 중 가장 실력이 없다.
전생에서도 얘네는 끝까지 망돌 탈출 못 하고 몰락했을 정도니까.
얘네 꺼 가져와서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꿔놓으면 일대일 비교 게임에서 본전 이상의 이익을 얻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재미는 없겠네.’
시청자들 보기에 그게 과연 무슨 재미일까 싶은 거다.
서바이벌에서 잘하냐 못하냐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재미있냐 재미없냐다.
재미의 면에서 보자면 원바이원이나 루미닌 꺼 가져가면 안 된다.
어딜 가든 만족스러운 선택지가 아닐 거 같은 상황 속.
난 형들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하하, 하하하.”
연훈이 형은 고장 난 듯 웃고 있었고.
“후우우우. 다른 팀 무대는 쉽지 않은데.”
“그러니까. 잘못하면 완전히…….”
도승이 형과 운이 형은 서로 속닥거리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동준이 형은,
“봉태윤이~ 아이디어 없어?”
이리 말하며 은근슬쩍 내 목을 휘감아 안는다.
난 목에 동준이 형을 건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팀들도 미션을 듣고 난 후 고민이 드는 게 많은 건지 각자 토론들을 하고 있다.
그때,
‘뭐야.’
강현성과 시선이 맞았다.
강현성은 팀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를 흘끔 바라봤다.
어쩌다 눈이 맞은 거 같긴 한데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다.
그때,
“너 온리원분들 무대 하고 싶지?”
“네?”
동준이 형이 내 귀에 대고 이리 속삭였다.
“뭔 소리예요?”
“아까부터 온리원분들 쪽 보던데.”
“뭐 쳐다보면 다 하고 싶은 거예요?”
“티 나게 보니까 그러지.”
내가 티 나게 봤나.
조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그것보단,
‘동준이 형은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온리원 무대 하고 싶어 하는지 시선만으로 알아차리다니.
이 형 앞에서 거짓말하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았다.
그때,
“태윤아 생각 좀 해둔 거 있어?”
연훈이 형이 내게 묻는다.
운이 형과 도승이 형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들은 생각해 둔 거 있으세요?”
“흐음, 사실 어느 분들을 하든 다 쉽지 않을 거 같아서…….”
“무대적으로든, 그 외적인 부분들 때문이든…….”
다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거 같다.
쉽게 가려면 루미닌, 원바이원.
재밌게 가려면 온리원.
몇 번 시선을 주고받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같음을 암묵적으로 확인했다.
“그러면, 일단 다른 팀들 어떻게 하는지부터 지켜볼까요?”
이게 내가 생각하는 현재로서 낼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이다.
“그래 이번엔 한번 흘러가는 거 보고 결정을 해보자.”
“좋아.”
“어렵다, 어려워, 진짜.”
때마침,
“자! 그러면 다섯 팀들 모두 결정을 내렸으리라 믿고! 지금부터 무대 선정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MC 김영진이 그리 말하며 주변을 훑었다.
다른 팀들은 단체로 멘붕에 빠진 듯 김영진을 바라봤다.
딱 봐도 다들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으니까.
어쩌면,
‘일부러 시간 촉박하게 준 건가.’
이게 더 타당할지 모른다.
우왕좌왕하며 선택해야 더 재밌는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러면 선택권은 무대 순위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MC 김영진이 뒤늦게 선택 순서를 말해줬다.
순위대로라면,
‘온리원이랑 우리 둘 중 한 팀이 먼저네?’
우리 아니면 쟤네가 먼저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
남들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결정하려 했는데.
이런 식이면 낭패다.
우린 어색하게 서로 눈을 맞추며 주변을 훑었다.
이걸 어쩌나 싶은데,
“저희가 먼저 해도 될까요?”
온리원 쪽에서 이야기가 나왔다.
손을 들고 말한 건 강현성.
강현성은 그리 말하며 우리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이죠! 온리원분들은 생각해 두신 무대가 있으신가요?”
“네. 있습니다.”
온리원은 비교적 빠르게 무대를 선택했나 보다.
한데,
‘뭐지.’
이상하게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
“세이렌분들 <월야> 하겠습니다.”
……오는 것보다 빠르게 결착이 났다.
“진짜요?”
“저희 무대를요?”
형들이 진심으로 리액션을 뱉는다.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들이다.
아니, 다들 한 번쯤 생각은 했을 거다.
온리원이 우릴 고를 거란 걸.
하지만 이렇게 후진 없이 바로 우리 무대를 픽해 버릴 줄 몰랐겠지.
나도 온리원이 우리 무대를 골라서 놀랐다기보다는 이렇게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골랐다는 게 더 놀라웠다.
애초에 온리원 애들이면 무대가 엉망이 되는 한이 있어도 재미없는 무대는 안 할 거 같긴 했다.
파랑새에서 레전드 독기로 유명한 강현성인데.
무난한 선택지를 고를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우리를 고른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엄청 빠르네.’
마치 처음부터 우리 무대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엄청난 속도다.
그 말은,
‘진짜 라이벌 구도 잡으려고 하는구나.’
강현성이 이미 이쪽으로 노선을 잡았단 거다.
아주 노골적일 정도로.
우리야 좋다.
이제 눈치 안 보고 온리원 잡고 올라갈 수 있다.
난 형들을 바라봤다.
다들 놀랐던 낯빛을 정리한 상태다.
대신 은은한 만족감이 얼굴 위에 떠올라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인정받은 거긴 하니 기분들이 좋은가 보다.
난 작게 입 모양으로 형들에게 물었다.
온리원 대면식으로 픽해도 괜찮냐고.
형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MC가 이제 우리를 가리킨다.
“세이렌분들은 정하셨나요?”
이제 우리가 픽할 차례다.
자연스레 마이크가 내 쪽으로 왔다.
왜 나한테 주나 싶지만 일단 준 거 받긴 했다.
“네. 저희도 정했습니다.”
“어떤 팀으로 하시겠습니까.”
난 형들과 눈을 맞춘 후,
“온리원분들의 대면식 무대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뺏어올 무대를 픽했다.
“와아! 두 팀이 서로를 지목한 상태군요?”
MC 김영진이 이 구도를 빠르게 알아차리곤 굳히기에 들어간다.
확실하게 방송의 방향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블레슈나 원바이원, 루미닌을 보니,
‘다들 표정이 좋진 않네.’
온리원과 우리 중심으로 굴러가는 판이 마음에 들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MC는 우리를 중심으로 추가 멘트를 이어갔다.
“온리원분들은 왜 세이렌분들 <월야>를 선택하셨나요?”
당연히 들어갈 만한 질문이다.
강현성은 마이크를 쥐고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을 이었다.
“우선 무대 자체를 굉장히 감명 깊게 봤고요, 무엇보다 자작곡이라는 점 등등도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강현성은 우리 무대에 대한 칭찬을 시작했다.
“좋은 무대라 생각했고, 그래서 더 도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세이렌분들의 오리지널 무대만큼 좋은 무대를 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석 같은 답변이었다.
하긴.
너네랑 라이벌 구도 잡고 싶어서 도전했다, 라는 식의 대답보다는 이게 더 방송용 그림이긴 하다.
무엇보다 좋은 무대에 대한 아티스트적 도전 의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만일 무대가 다소 실망스럽게 나오더라도 쉬운 길 선택 안 하고 어려운 길로 직접 간 도전적인 무대라는 방향으로 포장이 가능하니까.
“그러면 세이렌분들은 왜 온리원분들의 대면식 무대를 선택하셨나요?”
이번엔 우리가 답할 차례.
난 마이크를 들고 형들을 바라봤다.
형들은 나보고 대답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대면식 무대에서 사이버 펑크적인 요소들을 차용해 오신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직 우리가 그런 식의 강한 사운드의 음악이나 컨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색다른 걸 해보는 것도 좋은 도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습니다.”
나도 강현성이 한 말과 비슷한 결로 했다.
우리에게도 이는 힘든 도전이겠지만 아티스트적인 도전 의식으로서 해보는 도박수다, 라는 느낌의 멘트였다.
결국 온리원이나 우리나 비슷한 느낌의 대답을 한 셈이었다.
“두 그룹 모두 좋은 무대 보여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다음 순위인 블레슈분들의 무대 뺏기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순서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블레슈, 원바이원, 루미닌.
이 세 팀은 적당히 서로의 무대를 가져가며 끝이 났다.
웃긴 건 끝까지 원바이원의 조폭 컨셉 무대는 팔리지 않았다는 거다.
여러모로 안타까운 무대였던 거 같다.
그렇게 각자 뺏어올 무대를 정한 후.
“이제 2차 경연의 주제도 전부 정해지게 되었는데요, 모두 열심히 무대 준비하여 좋은 결과 가져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MC 나현의 클로징 멘트를 끝으로 공식적인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더 쇼케이스2 퍼스트 찬스의 구호를 외치는 걸 끝으로 촬영 장비들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튜디오엔 각 잡힌 신인들의 인사가 울려 퍼졌다.
블레슈와 원바이원, 루미닌이 스튜디오를 벗어나고 나자,
“온리원분들 세이렌분들 스튜디오에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제작진이 그리 말하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려는 우리를 막았다.
“응?”
“뭐지?”
우린 뭔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온리원 멤버들은 스튜디오에 그대로 남아 익숙한 일이란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뭔가 싶어 보니,
“지금부터 1위 팀 특전인 무대 순서 정하기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맞네.”
1위 특전을 사용할 시간이었나 보다.
우린 온리원 앞에 가서 앉았다.
어느새 무대 위론 순서판과 몇 가지 소품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때,
“자! 그러면 지금부터 두 팀분들 자유롭게 무대 순서 정하시면 됩니다.”
제작진 한 사람이 다가와 그리 말하고는 카메라를 조금씩 뒤로 빼기 시작했다.
“촬영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만 남기고 다 철수할 테니까 정말 편하게 하세요!”
“네?”
뜬금없이 제작진들이 스튜디오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촬영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만 남기고 제작진들이 모두 철수한다는 것.
그 말은 곧,
‘뭐 여기서 싸우라고?’
판을 깔아준 거나 다름없다.
우리 아무도 안 볼 테니까 너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알아서 분량 뽑아보라고.
다만 안 볼 거면 진짜 보질 말던가 굳이 카메라 몇 대는 남겨두고 간다.
노골적으로 나쁜 놈들이었다.
난 고개를 들어 온리원을 바라봤다.
온리원 멤버들도 우릴 빤히 쳐다봤다.
그래 뭐 이렇게 판 깔아주는 것도 한 컷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니 좋다.
다만 문제는,
‘어색해 죽겠네.’
라이벌이고 나발이고,
사실 우리 쟤네랑 안 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