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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79화 (79/227)

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79화

마치 재앙이라도 닥친 것 같은 모습들이다.

갑자기 전쟁이 터져서 대피명령이 떨어지게 된다면 이런 풍경이 펼쳐지려나.

“야! 나 칫솔! 치이잇솔!”

“여깄어.”

“우리 씻고 나갈 수 있어?”

“하아. 애매한데.”

형들은 거실 곳곳을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가평 펜션까지 도착 시간은 11시.

현재 우리가 일어난 시각은 오전 9시다.

패닉이 오기에 충분한 기상 시간이었다.

난 아직도 방바닥에 앉아서 멍하니 잠을 떨쳐내는 중이기에 얌전한 거지.

만일 나도 이 잠이 다 떨쳐지고 나면 아마 형들이랑 같이 방방 뛰어다닐지도 모른다.

이 잠기운의 차분함을 빌려 조금만 천천히 생각을 해보려 했다.

우선 핸드폰을 꺼내 가평 펜션 주소를 찍었다.

그러곤 우리 숙소로 출발지를 설정한 후 도착 시간을 내보니,

-1시간 36분.

이렇게 뜬다.

정말 딱 1시간 36분만 걸리면 지각할 일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은 출근 시간대이고, 우리 아파트는 강남에 있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차가 막히는 지역이란 거다.

그렇다면,

“형들!”

“어어?”

“응?”

“왜 그래?”

“우리 그냥 옷만 갈아입고 내려가요!”

“에?”

“안 씻어?”

“밥은?”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딨어요!”

지금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준비해서 차 타고 가야 한단 거다.

잘만 하면 아슬아슬하게 지각하지 않고 도착할지 모른다.

“읍! 내 칫솔!”

“가면서 가글 해요 가글.”

난 동준이 형이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뽑았다.

“운이 형! 코디 고르지 말고 진짜 되는 대로 입어요.”

“아? 으응.”

옷 신경 쓰느라 바쁜 운이 형에게는 매일 입던 트레이닝복을 건네줬다.

“연훈이 형! 지금 씻을 준비할 때가 아니잖아요.”

“아, 나 진짜 금방 씻고 나올게!”

“세수만 빨리해요.”

“이익!”

누가 봐도 샤워할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가려던 연훈이 형을 잡아 세웠다.

그나마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면,

“봉태윤. 이거 캐리어 다섯 개 그냥 내가 싹 들고 지금 내려가 있을게. 네가 멤버들 수습해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라.”

도승이 형이었다.

도승이 형은 대충 아무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캐리어 다섯 개를 들고 가장 먼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난 시간을 허비하려는 형들을 전부 말린 뒤 가볍게 세수만 시킨 후,

“가요!”

그대로 다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가 기상한 시간은 오전 9시.

그리고 형들을 다 끌고 엘리베이터를 탄 시각은 9시 10분이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불꽃 같은 10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승연 씨와 현아 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어! 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어요!”

“우리 8시 30분에는 만나기로 했잖아요!”

승연 씨와 현아 씨는 도착하자마자 말들을 쏟아냈다.

죄인은 우리인지라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합숙 훈련이기에 헤어랑 메이크업을 안 받아도 되니 망정이지.

만일 샵까지 들러야 했다면 이미 지각 확정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바로 출발할게요! 지금 급하게 가면 아마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할 거 같아요!”

우리가 다 차량에 탑승하고 나자 승연 씨가 액셀을 밟았다.

차가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냥 지각하지 않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다행히 도로로 나가보니 강남 차량정체가 예상보단 심각하지 않았고,

“와! 다행이다. 한 5분 여유 두고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와아.”

“후우우.”

“진짜 아슬아슬했네요.”

우린 그제야 지각 걱정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자 승연 씨와 현아 씨가 왜 지각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사실 오늘 지각은 정말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보통 1등으로 일어나 형들을 깨우곤 하다만, 그렇다고 그게 정해진 룰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1등으로 일어나다 보니 형들을 한두 번 깨우곤 했던 거지.

형들은 내가 깨우지 않아도 알람을 듣고 어떻게든 일어났다.

아마,

“……스트레스가 수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그렇긴 하지.”

“하하…….”

단기간에 과도하게 몰아친 스트레스 탓에 형들이 단체로 늦잠을 자버린 게 분명했다.

그 스트레스는 당연히 원바이원의 김준혁과 이영준 때문일 거고.

나의 경우엔 어젯밤에 고모와 통화를 한 후 심력 소모가 커서 늦잠을 자버린 거였다.

즉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들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다만 컨디션 관리도 분명 아이돌의 소양이기에,

“다음부턴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수면시간이랑 컨디션 더 잘 관리할게요.”

형들은 이런 대답을 했다.

“아, 그, 이런 반성을 들으려고 여쭤본 건 아니었는데……. 하하.”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해요.”

승연 씨와 현아 씨는 그저 지각한 이유가 궁금했을 뿐인데 대단한 각오를 들어버려서 꽤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근데, 저희 이 몰골로 촬영장 가도 괜찮은 거겠죠?”

그때 운이 형이 대화 주제를 바꾸며 말했다.

운이 형의 말에 따라 다들 본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을 점검했다.

우린 정말 꾸미는 것 하나도 없이 평소에 입던 연습복을 그대로 입고 왔다.

회색 트레이닝 팬츠.

품이 넉넉한 오버사이즈 맨투맨.

길거리에서 산 무채색 모자들.

캐주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승연 씨와 현아 씨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더니.

“에이. 괜찮을 거예요. 오늘 촬영 막 그렇게 빡센 촬영 아니고 MT 가듯 가볍게 오라 했거든요.”

“그쵸?”

“가볍게 오라 했으니…….”

“다행이긴 하다…….”

형들은 가볍게 오라 했다는 말에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너무 빡세게 꾸미고 갔으면 어색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데,

“근데, 보통 MT 갈 때 꾸미고 가지 않아요?”

난 MT라는 말에 집중했다.

물론 내가 대학교를 안 다녀봐서 모른다.

하지만 MT가 대학생들이 가장 기대하는 이벤트 중 하나인 것은 안다.

그런 이벤트인데, 과연 안 꾸밀까?

물론 빡세게 꾸미진 않겠지만,

“그, 뭐지. 꾸안꾸? 그런 거 하지 않을까요?”

다들 꾸민 듯 안 꾸미고 나올 거다.

“아.”

“그, 어, 음.”

우리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승연 씨와 현아 씨가 말이 없어진다.

저 반응은 내 말이 맞다는 반응으로 봐야 할 거다.

“……저, 저희는 꾸안꾸로 보기 어렵겠죠?”

연훈이 형이 간절함을 담아 물었고,

“그냥, 안꾸긴 하죠…….”

승연 씨는 약간 체념에 가까운 말투로 이리 답했다.

차량 내부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그, 그래도 다들 피부도 좋고 그래서 청초해 보이고 좋습니다! 하하. 걱정 마세요!”

“오히려 이런 내추럴함이 더 좋아 보일 수 있어요!”

“다들 옷걸이가 좋아서 안 꾸민 것처럼 안 보여요! 진짜예요!”

승연 씨와 현아 씨는 뒤늦게 수습하려 했지만,

“큰일 났네…….”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 * *

박수철 피디는 평소보다 훨씬 가벼운 차림으로 펜션 앞마당에 서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평소 스튜디오에 갈 때도 옷을 가볍게 입긴 한다만 오늘은 정말 그 이상으로 가볍게 입었다.

위아래 트레이닝복으로 맞춰 입었으니까.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스태프들도 다 이런 느낌의 복장이었다.

그들에겐 가평 펜션이 MT를 위한 공간이 아닌 그저 외근을 나온 파견지일 뿐이니까.

차라리 옷이라도 편한 걸 입고 가는 게 이득이다, 라는 마음이었다.

이 현장에서 유일하게 들뜬 건 박수철 피디였다.

“으아아! 내가 여기서 대학교 때 진짜 죽치고 놀았는데. 옛날 생각난다 진짜.”

“아 진짜 왜 저래.”

“얘들이랑 여기서 족구 하고, 저녁에 삼겹살 구워 먹고, 밤에는 라면에다가 소주 먹고. 아 진짜 그때가 좋았는데.”

“와 어떻게 추억에서 땀 냄새가 나지?”

“반갑다, 가평아.”

“……하아.”

평소에도 텐션이 아주 낮은 피디는 아니다만 오늘은 텐션이 과하게 높은 박수철 피디였다.

참가자들이 뭐 건의만 하면 다 받아줄 것처럼 군다.

수학여행 와서 묘하게 들뜬 학생부 선생님 같은 느낌이다.

평소엔 깐깐한데 여행지 와서 유들유들해진 것 같달까.

물론 작가진들이 보기엔 그냥 주책 떠는 아저씨 같았다.

언제까지 이런 아저씨 바이브로 있어야 하나 싶을 때, 멀리서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

드디어 아저씨 바이브 탈출이란 생각에 다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리원의 차량이었다.

차량 문이 열리고, 온리원 멤버들이 걸어 나오자,

“와.”

“진짜 밖에서 보니까 느낌 많이 다르네요.”

“이게 가평이란 공간에 약간 그런 게 있나 봐요. 설레는 게 진짜 있네.”

사방에서 호평이 쏟아진다.

등장만으로 칭찬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온리원은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다들 캐주얼하지만 그렇다고 영 안 꾸미진 않고 왔다.

보면 딱 훈훈한 대학생이 연상되는 의상들이었다.

체육복 상하의 세트로 맞춰 입은 박수철 피디와는 근본부터 다른 사람들이었다.

“온리원분들 오늘 진짜 멋있으시네!”

박수철이 과하게 반응하며 반겨주자 온리원 멤버들은 다소 의아해하며 쭈뼛거렸다.

“감사합니다. 피디님도 멋지십니다, 오늘.”

그나마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인사를 받는 건 강현성 하나였다.

이후 다른 그룹의 차량들도 하나둘 들어왔다.

블레슈.

루미닌.

원바이원.

한 차량이 들어올 때마다 현장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직장 상사와 함께 워크샵 온 것 같은 분위기에서 대학교 동기들과 함께 MT에 온 것 같은 분위기로 말이다.

다들 이번 촬영의 핵심을 알아차린 건지 적당히 꾸민 듯 안 꾸민 채 입고 왔다.

늘 무대의상만 보여주는 촬영을 했으니 하루쯤은 사복을 보여주는 촬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합숙 훈련을 계획한 것도 있긴 했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세이렌뿐이었다.

아직 지각은 아니다만 정각까지 약 10분밖에 안 남아 있었다.

“스읍. 조금 늦네.”

“아직 지각은 아니잖아요.”

스태프들은 그리 말하며 펜션 마당 입구를 계속 노려봤다.

평소에도 세이렌 멤버들은 사복센스가 좋은 걸로 눈도장을 찍은 상태였다.

스튜디오에서 돌아다닐 때 가끔 사복을 입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장 옷을 잘 입는다는 인상이 남는 건 세이렌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옷을 잘 입는다는 그 장점을 오늘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때마침,

“어? 세이렌분들 차 들어오네요.”

정시까지 5분을 남겼을 때.

세이렌 차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세이렌 차량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어떤 사복을 보여줄지 모두의 기대가 모이는 가운데,

드르륵.

차량 문이 열렸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세이렌이 등장했는데,

“……?”

“……응?”

“……뭐야?”

스태프들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가장 사복을 잘 입을 거라 예상했던 팀인데,

“그, 어, 뭐지?”

“진짜, 연습만 할 생각으로 입고 오신 거야?”

세이렌의 의상은 너무 후줄근했다.

문제는 저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른 그룹들 옆에 서니,

“풉!”

“웃지 마!”

“참아.”

체감이 확 된다.

세이렌 멤버들도 본인들 복장이 다른 팀과 많이 다른 걸 아는 건지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질 못하고 있다.

이중 유일하게 기뻐하는 사람은,

“아! 역시 세이렌! 낭만을 아네요, 이 팀이! MT는 이렇게 편하게 입고 가서 찐하게 노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박수철 피디 한 사람뿐이었다.

“아, 하하하.”

“마, 맞죠.”

“감사합니다…….”

세이렌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박수철 피디의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이 중 그나마 당당해 보이는 건,

“태윤 씨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네?”

“원래 표정이 없으시잖아.”

막내 봉태윤뿐이었다.

그렇게,

“자, 그럼 다섯 팀이 다 모인 관계로, 이제 슬슬 오프닝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확실하게 꾸미고 온 네 팀과 확실하게 꾸미지 않고 온 한 팀이 같은 프레임에 담기는 기묘한 오프닝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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