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83화
아무래도 강현성이랑은 전생에 뭐가 있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엮일 수가 없었다,
전생에 원수였든, 아니면 부부였든, 혹은 둘 다 일수도.
일단 머리를 굴렸다.
강현성이 녹화나 녹음은 안 했다지만 확신할 순 없다.
말은 늘 증거 없이 공허할 뿐이니까.
내 불신의 눈초리를 읽은 걸까.
“핸드폰이라도 보여줘요?”
“…….”
“진짜 안 했다니까 믿질 않네.”
“녹음기, 따로 가지고 다니시는 거 없습니까?”
“……?”
“……아닙니다.”
난 당연히 강현성이 녹음기 같은 걸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이거까진 과한 망상이었……
“여기요. 이것도 전원 안 켜뒀어요.”
……긴 개뿔.
강현성 주머니에서 녹음기가 나오긴 했다.
“내가 노래 부른 거 셀프 피드백하려고 들고 다니는 거예요. 아무래도 핸드폰 녹음기는 기능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일단 녹음기에 전원이 안 켜져 있단 것을 확인했다.
강현성은 손수 전원을 켜서 녹음 목록도 보여줬고,
그중 오늘 날짜로 찍힌 목록은 없었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한 가지는,
‘왜 날 덮어주려는 거 같지?’
이제 보니 녹음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녹음기까지 들고 다니는 놈인데.
녹화야 뭐 말할 것도 없었을 거고.
한데 증거물을 남기지 않았다.
이건 의도적으로 날 덮어줬다고밖에 할 수 없다.
왜인가 싶어서 보니,
“이걸로 서로 빚진 거 없는 겁니다.”
“……?”
“가죠. 숙소 구경하러.”
빚진 거 없는 거라고?
뭐 저 자식이 나한테 빚진 게 있었나?
대가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마땅히 나오는 게 없었다.
근데 뭐지 딴엔 빚진 게 있긴 했나 보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김준혁과 이영준은 화장실을 벗어나자마자 입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X발 진짜, 아아악! 그 개X끼 뭔데 진짜!”
화장실 뒤쪽, 스태프들도 잘 다니지 않는 후미진 곳이었기에 맘껏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터뜨릴 순 있었다.
다만 길게 할 수도 없던 것이 어쨌든 야외는 야외다.
반복적으로 고성을 질렀다간 누군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아. X발. 어쩌지 이제.”
김준혁이 이영준에게 물었다.
녹음까지 된 마당에 함부로 행동할 순 없었다.
“사람이 욕 좀 하고 살 수 있는 건데 별걸로 다 지랄이야 그 새끼는.”
김준혁은 결국 넘쳐 흐르는 분기를 어쩌지 못하고 나무 밑동 아무 데나 걷어찼다.
다만 나무가 쓰러질 리는 없으니 발가락만 조금 아프고 끝날 뿐이었다.
그들도 본인들이 그저 욕이나 조금 하고 끝난 수준이 아니었음을 안다.
누군가를 비하했고, 누군가를 위협하려 했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워딩 하나하나가 너무 저질이란 것도.
다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누군가가 자신들의 위에 서서 약점을 잡고 휘두르려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준혁아.”
“뭐!”
“그 새끼 잡아버릴까?”
“뭐?”
“잡아서 X나 팬 다음에 핸드폰에 있는 녹음본 싹 다 삭제하면 되잖아.”
“백업까지 해뒀다잖아.”
“백업이라 해봐야 뭐 채팅방에 옮겨놓거나 클라우드에 올린 거겠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지워.”
“요새 다 지문인식이잖아. 그 새끼 지문으로 잠금 푼 다음에 그냥 지우면 되잖아.”
“……감당 가능?”
“넌 그럼 그 새끼 말 들으면서 살래? 눈에 안 보이는 곳만 잘 골라서 패면 되잖아.”
“아니, 근데.”
김준혁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맘 같아선 그도 이영준의 제안대로 하고 싶다.
잡아서 패고 녹음본 지우고.
하지만 양심, 이라 부르는 것과 윤리, 라고 부르는 것.
아주 쌀톨만 하지만 인간이라면 조금은 갖고 있는 그 감정들이 발목을 잡았다.
더불어,
‘괜히 더 X될 거 같은데.’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할 시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지 체감조차 안 된다.
가령 누군가에게 봉태윤 린치하는 걸 걸리기라도 하게 되면,
‘그건 진짜 고소감이야.’
단순히 논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콩밥 먹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론,
‘X발 무서운데.’
사실, 방금 봉태윤에게 둘이서 같이 덤볐어도 이겼을 것 같단 생각은 안 들었다.
자신은 사람 얼굴이 그토록 무섭게 일그러지는 걸 처음 봤다.
원래도 조금 싸하게 생겼는데 각 잡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솔직히 조금 쫄았다.
무엇보다 피지컬 차이도 극심하고.
키만 해도 약 10센티는 넘게 차이 날 거 같으니까.
“야, X발 안 할 거냐고 그래서. 왜 말을 하다 말아.”
이영준이 대답을 종용했다.
김준혁은 어찌해야 할지 섣불리 입을 떼진 못했다.
잘못했다간 본인들 잘못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프로그램 하차는 물론이거니와, 심하면 팀이 해체될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회사에 돈이 없어서 이번에 제대로 눈도장을 못 찍으면 활동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마당에 녹음본이 풀리거나 폭행 사건으로 고소 되면 그나마 있던 인지도가 그대로 독이 되어 퍼질 거다.
“야, 안 할 거냐니까? 사람 말을 지금 몇 번째 씹는 거야.”
“X신아 생각 중이잖아.”
김준혁은 생각을 마쳤다.
“……패는 건 하지 말자.”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패는 건 안 된다.
더군다나 팬다기보단 처맞을 수도 있을 거 같고.
다만,
“폰은 뺏자. 어때? 그 새끼 자고 있을 때 지문 써서 잠금도 풀어버리고.”
이 정도는 분명히 가능할 것 같았다.
이영준은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나,
“하아. 그래. 그러면 폰만 뺏어서 지문만 어떻게 잘 해보자.”
이게 가장 현실적임을 아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오늘 밤에 행동하는 걸로 정한 뒤 구체적인 작전 따위를 세우기 시작했다.
* * *
강현성과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화장실에서 한바탕 하고 와서 그런 걸까.
지금 이 분위기가 심하게 적응이 안 된다.
“태윤 씨! 이거 봐봐요! 자쿠지, 자쿠지!”
박영호가 내가 들어오자마자 자쿠지로 나를 이끌었다.
자쿠지는 2층 베란다에 설치되어 있었다.
베란다에 자쿠지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부터 사실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베란다에?
그만한 공간이 나와?
라고 생각했는데,
“……미쳤네.”
베란다는 그냥 베란다가 아니었다.
그냥 중간 정원 정도로 부르는 게 적당할 거다.
2층 옆에 딸린 탁 트인 공중 정원이었다.
거기에 자쿠지 3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엔 안마의자가.
그 옆엔 족욕기를 비롯한 스파용품들이.
‘돈 좀 썼구나.’
누군가의 로망이 짙게 가미된 거 같긴 하다만 확실히 돈 쓴 티는 났다.
“이거 오늘 연습 끝나고 다 같이 쓰면 엄청 좋을 거 같지 않아요?”
박영호는 마치 신난 개마냥 방방 뛰고 있었다.
꼬리가 있다면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팽팽 돌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강현성도 이 시설이 꽤 놀라운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다.
“일단, 자쿠지는 자쿠지고, 연습은 연습이니까. 환복하고 와서 연습실로 모이죠.”
다만 너무 여기에 시간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걸 강현성은 아는 눈치였다.
너무 붕 떠 있던 현장 분위기를 잠재운 뒤 연습 준비에 들어가자 했다.
사람들은 아쉬운 눈치였으나 차례로 아래로 내려갔다.
박영호는 못내 아쉬운지 자꾸 뒤를 돌아 자쿠지를 바라봤지만 강현성이 목을 잡고 끌고 내려갔다.
그렇게 연습 준비에 들어갔다.
* * *
각자 캐리어에서 연습복을 꺼내 입은 후 연습실로 모였다.
연습실은 각 건물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원래 연습실로 만들어진 곳은 아니고 노래방이나 당구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요즘 나오는 프리미엄 풀빌라에는 노래방과 당구장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경우는 흔하니까.
다만 지금은 당구대와 노래방 기계가 탈거된 후 텅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연습하기 딱 좋을 정도의 너비와 시설이었다.
“스피커 성능이 의외로 좋네요?”
“노래방으로도 썼던 곳이잖아요.”
사람들은 연습실 파악을 끝낸 후 연습에 돌입했다.
사실 이제 안무는 다 외웠고, 디테일을 더하는 수준이었다.
편곡 작업도 곧 마무리될 테니 사실상 이 팀은 안정권에 들어섰다 말할 수 있다.
한데,
[1등 확률 : 65%]
1등 확률은 좀체 오르지 않고 있었다.
안무 디테일이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센터로서 무언가를 못 해서일까?
다만 난 통찰까지 써가며 안무를 외웠다.
센터로서의 소양도 이미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상태다.
뭐가 문제인 건가 싶었다가,
‘이젠 내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이 1등 확률이란 건 나만 잘해서 오르는 게 아니다.
형들도 다 고르게 높은 점수를 받아야 우리 팀의 최종 1등이 가능하다.
3차 경연은 개인전으로 점수를 받은 후 그룹별로 개인 점수를 모아 평균값을 내는 게 룰이니까.
그 평균값을 높이려면 모두가 잘해야 한다.
김준혁과 이영준을 잡았으니 조금씩이라도 이 확률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뭐지.’
계속 정체되어 있다.
이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남는다.
내가 정말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김준혁과 이영준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거나.
형들이 못하고 있으리란 선택지는 없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이미 데뷔하고도 남았어야 할 사람들이다.
실제로 다들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 기회가 왔거나, 혹은 데뷔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이니까.
김준혁과 이영준을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싶은 순간,
지이잉.
구석에 놓여 있던 누군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인은 강현성이었다.
“잠깐만 쉬었다 하죠.”
강현성은 음악을 멈춘 후 핸드폰을 가지러 갔다.
이내,
‘뭐야?’
내용을 읽은 강현성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이거 공유해 드릴게요. 다들 확인해 봐요.”
문자 내용을 단체 채팅방에 그대로 올렸다.
내용은,
-그냥 연습만 한다면 합숙의 맛이 안 살죠! 각 팀별 중간점검 형식의 경쟁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1시간 뒤에 중앙 마당에 모여 그간 여러분들이 준비한 무대를 보여주세요.
-각 무대에 대해 경쟁 팀들의 날 선 비판이 쏟아질 예정입니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중간점검의 탈을 쓴 앞담화 시간을 가지자는 거였다.
“다들 확인했죠?”
강현성이 묻는다.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 이벤트를 크게 반기는 사람은 일단 우리 팀엔 없어 보인다.
완성 안 된 무대를 보여준다는 것은 연습생들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만,
‘김준혁, 이영준이 어떻게 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
내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다만 나 외에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서린다.
강현성도 이걸 눈치챈 걸까.
“일단 이렇게 하죠.”
이 이벤트를 채워나갈 해결방안을 내놓으려 한다.
“우리, 굳이 우리가 준비한 무대 그대로 다 보여줘서 밑천 털릴 필요는 없잖아요.”
강현성은 팀원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하려는 모양이었다.
“편곡 버전 말고 편곡 전 버전으로 하죠. 전력을 다하진 말잔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거면 아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게 되기도 하거니와,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니 비판을 조금 듣더라도 내부적으로 쉴드를 칠 수 있다.
이 정도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리고, 태윤 씨.”
“네.”
“이번엔 센터 제가 설게요.”
“네?”
갑자기 센터를 바꾸잔다.
이 자식이 이제 와서 센터 욕심을 내나.
역시 너무 퍼주기만 했다 싶었는데,
“태윤 씨가 무대 핵심인데, 굳이 패를 다 보여줄 필요 없잖아요. 오늘은 뒤에 서요.”
“……?”
영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보고 배워요.”
심지어 저기서 끝이 아니었다.
뭘 보고 배우란 거지?
“센터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줄 테니까.”
“……?”
……너무 오만방자한 말을 자기 입으로 뱉으니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