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07화
난 핸드폰을 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윤태형.
WD엔터의 진짜 빌런.
언젠가 처리해야 할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전개가 당황스럽진 않다.
저 사람은 일반적인 기준에서의 인간성이 상당히 마모된 인간이니까.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남의 안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긴 하다.
늘 인간은 남의 안위보단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할 테니까.
하지만 뭐든지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윤태형은……. 정도가 없어도 너무 없지.’
이 인간은 내 손가락 베이는 게 싫어서 남을 절벽으로 떨어뜨릴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기에 우리 정산율 좀 후려쳐서 자기 고용 유지하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니지, 오히려 이 정도면 양반인 거다.
아마 대기업이 중간에 끼어 있으니 함부로 후려칠 순 없을 거 같아 나름 몸을 사린 것 같단 느낌도 든다.
그러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저런 인간을 계속 데리고 갈 순 없다.
이제 슬슬 쳐내야 한다.
난 핸드폰 화면 위에 떠오른 한 번호 위에서 잠깐 스크롤을 멈췄다.
처음 WD엔터에 입사하고 난 후 받은 번호.
-WD엔터 김동현 사장.
WD엔터의 세 명의 사장 중 한 사람의 번호다.
입사하며 계약서 쓸 때 대표 번호로 이 사람 번호가 적혀 있어서 냅다 저장해 뒀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당장 전화를 걸 거냐.
그건 아니다.
지금 전화를 걸 사람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승연 님. 혹시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WD엔터의 윤승연이었다.
-……아 태윤 씨? 무슨 일이세요?
윤승연은 내가 이 시간에 전화할 줄은 몰랐는지 꽤 당황한 목소리였다.
“퇴근하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잠깐 급하게 질문드릴 게 있어서요.”
난 한 템포 쉬었다가 입을 뗐다.
“혹시 윤태형 팀장과 최근에 저희에 대한 걸로 회의 나눈 적 없으신가요?”
이게 어쩌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고.
또 예의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한다.
형들과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일 텐데 어거지로 뜯기고 싶진 않다.
만일 승연 씨가 여기서 무언가를 숨기는 눈치를 보인다면 어쩔 수 없다.
바로 현아 씨에게 연락을 해볼 수밖에.
현아 씨마저 무언가 숨기는 느낌이라면,
‘아쉽지만, 바로 사장한테 연락해야지.’
달리 방법이 더 없었다.
사장에게 직접 연락할 수밖에.
다만 이 두 사람이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안다.
그러니 속으로 잠시 기도했다.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기도가 먹힌 걸까.
-……네. 마침 오늘, 회의를 했네요. 하하.
윤승연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만일 세이렌이 더쇼케2 우승할 시 어떤 대응을 할지,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그다음은요?”
-오늘은 회의 첫날이기도 했고, 윤 팀장님이 숙취가 심해서 길게 대화가 이어지진 못했어요. 그냥 어떤 태도로 나갈지 방향만 논의……라기보단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끝났습니다.
“그 통보가 뭐였나요?”
-……하아. 진짜 쪽팔려서 말하기도 싫은데……. 세이렌 인질로 고용 보장해 달라고……. 할 예정이었답니다.
난 듣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리 정산율을 후려친다거나, 뭐 거기까진 이야기가 나오진 않은 거 같다.
아마 정산율에 대한 부분은 후에 추가 회의할 때 나올 안건인가 보다.
난 대충 머릿속에서 상황 정리를 끝냈다.
역시나 현아 씨와 승연 씨는 윤태형의 계획에 크게 동조할 생각이 없나 보다.
미래시에서도 그런 분위기이긴 했기에 얼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귀로 들으니 더 안심이 된다.
그렇다면,
“승연 님. 혹시 저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 진짜 별건 아닌데요.”
난 윤승연에게 이런저런 부탁사항을 말했다.
“어차피 윤태형 팀장, 회사에서 한량처럼 굴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그 증거들만 모아주시면 충분합니다.”
-후우. 알겠어요.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아니에요. 당연한 거죠. 그럼, 전 태윤 씨가 부탁한 거 하나씩 모아둘게요.
“넵. 감사합니다.”
-또 연락할게요.
그렇게 윤승연과의 통화를 마무리 지을 즈음,
띠띠띠띠-
도어락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태유나아~”
“잘 있었어?”
“글은 좀 썼냐? 시간 좀 더 줄까?”
“다시는 밤에 마라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밤에 마라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형들이 단체로 돌아왔다.
아마 집 앞에서 만났나 보다.
난 형들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뭐 하고 있었어?”
“글은 잘 썼어?”
“배 안 고파?”
형들은 소파로 하나둘 모여들더니 날 둥그렇게 둘러쌌다.
“네. 별일 없었어요. 글 잘 쓰고 있었어요.”
“대견하네.”
“내일 아침에는 볼 수 있는 거지?”
“네. 걱정 마세요.”
난 그런 형들에게 태연한 척 말했다.
윤태형에 관한 건,
‘당장은 나만 알고 있자.’
지금 당장은 형들에게 굳이 알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 * *
봉태윤과 통화를 끊은 윤승연은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만 봤다.
팀의 막내이긴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전혀 막내 같지 않다.
아니지,
“애초에 막내 같은 구석이 없긴 하구나.”
그녀가 아는 봉태윤은 원래가 막내다운 구석이 없는 멤버긴 했다.
다만 그건 그거고.
“흐음.”
이런 식으로 급작스레 훅 들어올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와 이현아 둘 다 조만간 눈치 봐서 세이렌에게 현 상황에 대해 공유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들이 생각하기에도 세이렌을 인질 잡고 합작회사로 넘어가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윤태형이 어떤 딜을 걸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그 인간 성격상 세이렌에게 도움 되는 딜을 걸 리가 없다.
즉 세이렌을 등쳐먹을 게 예정된 상황이니 그걸 두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다만 세이렌에게 현 상황을 공유만 해줄 뿐 딱히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진 않을 거 같았는데,
‘……뭐가 있나.’
봉태윤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 생각을 이어가진 않았다.
대신 이현아에게 연락해서 방금 봉태윤과 대화했던 사안들을 공유해 줬다.
-정말요? 태윤 씨가 갑자기 그렇게 물어봤다고요?
“저도 진짜 놀랐어요.”
-일단, 태윤 씨가 해달라는 것들은 준비해 줘야겠네요. 말 들어보니까 따로 생각이 있는 거 같으니까요.
“네. 그래야죠.”
이현아와는 이후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통화를 끊었다.
그러곤 잠시 적막해진 방에 앉아 윤승연은 생각을 이어갔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WD엔터에도 디자인팀 팀원으로 입사했던 그녀다.
한데 막상 그녀가 사회인으로서 처음으로 맡은 것은 아티스트 서포팅이었다.
처음엔 인간적인 도리로서.
그저 재능 있는 아이들이 방치되는 게 안타까워서 맡았던 일이지만,
“……제발 다 잘 됐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세이렌에게 감화된 걸까.
생각 이상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합작회사로의 이직 따위 이젠 바라지도 않다.
그녀가 바라는 건 하나다.
세이렌이 고통받았던 시간만큼 잘 되는 것 말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도 한 사람의 팬으로서 멀리 서서 세이렌을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난 형들에게 완성된 세계관의 내용을 보여줄 수 있었다.
어젯밤에 형들 자고 있을 때 2시간 정도 더 작업해서 완성한 파일이었다.
“각 멤버별로 오리지널 스토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난 형들에게 세계관이 적힌 종이 뭉치들을 하나씩 나눠줬다.
“이게, 진짜, 혼자 쓴 거 맞지……?”
“밤사이에 혼자 만든 거라고? 이게?”
형들은 내가 짜온 세계관의 내용보다 그 양에 더 놀란 거 같다.
그럴 법한 게,
“30페이지잖아, 태윤아…….”
“하룻밤에 30페이지를 써내는 인간이 어디 있어…….”
“이건 그냥 같은 단어를 무지성으로 타이핑하라고 해도 많을 양인데.”
혼자서.
그것도 하룻밤 만에 만들어냈다기엔 양이 꽤 많긴 하다.
그렇다고 영 불가능한 양은 아니었다.
30페이지면 발등에 불 떨어진 대학생들이 간혹 성공시키는 과제량이기도 하니까.
“일단 그 내용부터 봐주세요.”
난 페이지를 하나씩 넘겨가며 형들에게 세계관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다.
큰 틀에서부터 작은 디테일까지.
그리고 각 멤버별 오리지널 스토리까지.
형들은 처음엔 이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표정이었다가,
“오…….”
“이거…… 재밌네…….”
“이 아이디어는 무대로 바로 써도 멋질 것 같은데.”
나중에 가선 꽤 즐기는 상태가 되었다.
특히 연훈이 형은,
“태윤아…….”
“네?”
“이거…… 조금 슬픈데……?”
세계관을 읽다가 울상을 짓기까지 한다.
저 정도로 울상을 짓는 건 오바이긴 하지만 우울한 분위기를 느끼는 건 그럴 수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야기니까, 장르상 필연적으로 슬플 수밖에 없긴 해요.”
내가 잡은 우리 세계관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물론 완전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아니긴 하다.
적당하게 웹소설 감성도 섞고,
이것저것 신화적인 요소나 판타지적인 요소들도 많이 넣었다.
“그럼 세계관도 나왔으니까 이제 곡 짜야 되잖아. 어떤 느낌으로 쓸 거야?”
때마침 도승이 형이 물었다.
“세계관에 입각한 첫 번째 곡이고 첫 번째 무대잖아요.”
난 형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뗐다.
“테마를 ‘새로운 시작’ ‘첫 번째 챕터’ 이런 느낌으로 잡아서 어딘가 청량한 판타지 느낌으로 가보면 좋을 거 같아요.”
“청량한 판타지 느낌?”
“판타지에 너무 방점을 찍지 말고요. 새로운 시작에 좀 더 방점을 찍으면 좋을 거 같아요.”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긴 한데. 이건 가사를 봐야 좀 더 분명해질 거 같은데?”
“그래서 가사도 짜왔습니다.”
“……?”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도승이 형에게 가사지까지 꺼내서 건네줬다.
“어제 세계관 짜고 시간 남길래 러프하게만 잡아봤어요. 곡 나오는 거에 맞춰서 글자 수나 어휘 같은 건 맞춰나갈 거예요.”
도승이 형은 가사지를 멍하니 보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사에 맞춰 리듬을 찍어보는 눈치였다.
그러곤,
“……좋은데?”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본 건지, 꽤 후련한 얼굴로 좋다고 말했다.
“나도 볼래요!”
“봐봐!”
“어떤 가사야?”
동준이 형이랑 연훈이 형, 운이 형이 가사지 앞에 달라붙었다.
난 살짝 물러나서 형들 반응을 살폈다.
다들 가사를 스윽 훑어보더니, 꽤 밝아진 표정을 지었다.
“곡 제목이 좋다.”
“그러니까.”
“진짜 첫 시작 느낌 나는 거 같아.”
형들의 한줄평도 다 긍정적이었다.
이번에 준비한 곡의 제목은 였다.
컴퓨터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에겐 익숙한 문장이기도 하거니와, 곡 제목이랑도 잘 어울리는 문장이었다.
“그럼 이거 가사지에 맞춰서 곡 짜볼까?”
도승이 형이 이리 물었고,
“좋다.”
“그렇게 하자.”
다른 형들도 다 찬성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세계관 곡이자 파이널 무대의 곡은 로 결정되었다.
* * *
더쇼케이스2의 제작진 사무실.
한창 5화 방영분 편집을 하고 있는 박수철은 폐인 같은 몰골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편집 기간만 되면 사람이 정기가 빨려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디님 괜찮으세요?”
“온몸에 힘이 없고 눈이 뻑뻑하고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대는 중이야.”
“……정상이네요.”
“……그렇지.”
편집 기간엔 몸이 축나는 게 정상이긴 했다.
그는 믹스커피를 다발로 뜯어서 텀블러에 넣고 섞었다.
거기에 찬물을 조금 부어서 온도를 맞춘 후 편집실로 다시 비적비적 걸어가려 했다.
그때 김민영 작가가 박수철 피디의 어깨를 잡았다.
“근데 피디님 이거 잠깐 내기해 보고 가시는 거 어떠세요?”
“내기?”
“저희끼리 그냥 재미 삼아 내기하고 있거든요.”
김민영 작가는 그리 말하며 스케치북 한 장을 내밀었다.
-최종 우승팀 내기.
스케치북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피디님은 누가 될 거 같으세요?”
“지금 세이렌이랑 온리원 중에 역배가 어딘데.”
“역배요?”
“난 원래 정배엔 안 걸어.”
“하, 참나.”
김민영은 코웃음을 치곤 온리원과 세이렌 중 누가 더 투표를 받았는지 세기 시작했다.
그러자,
“역배가…… 없는데요?”
꽤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세이렌과 온리원.
어느 쪽이 우세할 거 없이 동일한 표를 받았다.
그러자 장난스럽던 박수철 피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피디님 손에 달린 거 같아요.”
김민영 작가의 말에,
“흐음. 그럼…….”
박수철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세이렌과 온리원 사이.
한참을 방황하던 그의 손이 찍은 곳은,
“의외네요?”
“그래?”
다름 아닌 온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