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28화
세이렌의 한 팬은 무대 위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루미닌이 무대 위에서 무대 소감 등을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그게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제발, 제발 얘들아…….’
세이렌 무대가 이제 코앞이기 때문이었다.
‘제발 우리 애들 우승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제발 좀!’
사실 무대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던 그녀였다.
온리원이 잘한다 한들 분위기가 세이렌으로 넘어왔다 믿었으니 말이다.
실제 저번 주 방송에서 세이렌이 1등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한데 온리원이 준비한 파이널 무대를 보고 나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거 잘못하면 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들었다.
‘하아. 제발…….’
너무 간절한 마음이 큰 걸까.
무대는 세이렌이 하는 건데 본인이 더 긴장해 버렸다.
스마트워치로 심박 수를 재보니,
-158bpm
‘세상에.’
무슨 마라톤이라도 뛰는 줄 알겠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잡았다.
WD엔터로 돌아가면 세이렌이 데뷔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하다.
오랜 망령 생활 끝에 겨우 마음에 들어온 최애인데 이대로 허망하게 사라지면 안 된다.
그때,
-팬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루미닌의 무대, 잘 봤습니다.
-듣는 내내 마음이 찡해지더라고요.
-그러면 오늘 파이널 무대의 엔딩을 장식할 팀이죠.
-언제나 최고의 퍼포먼스와 노래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세이렌의 무대,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MC 둘이 멘트를 주고받으며 세이렌을 소개했다.
‘온다! 진짜 온다!’
그녀는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그 순간,
탁.
무대가 잠깐 암전되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심장 뛰는 소리만 콩콩 울리는 가운데.
탁.
다시 조명이 켜지자.
‘아.’
세이렌의 팬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대 위에 세이렌이 있었다.
늘 화면으로만 봐왔고, 노래로만 들어왔던 그녀의 아이돌이었다.
그런 아이돌이 실물이 되어 눈앞에 있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가슴 한쪽에 얹힌 듯 남아 있던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걱정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세이렌은 신화에라도 나올 듯 새하얀 의상들을 갖춰 입은 상태였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늘 무대는 정말 좋을 거고, 그녀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말이다.
어쩌면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뇌가 강제로 행복회로를 돌리는 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믿고 싶었다.
세이렌은 오늘 좋은 무대를 하리란 것을 말이다.
때마침,
치지직.
기계음과 스크래치 음이 울려 퍼졌다.
독특한 효과음이었다.
세이렌은 현재 무대 위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전광판에 지미집 카메라로 찍은 그림이 올라왔다.
확실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으로 보니 안무대형이 훨씬 잘 보였다.
‘뭐지?’
서로가 서로의 다리에 머리를 올린 채로 동그랗게 누워 있는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
우연훈 혼자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홀로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치지지직.
스크래치 사운드가 점점 심해지고.
웅크리고 있던 우연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아기 새가 기지개를 켜는 것과도 같은 몸짓이었다.
이내 우연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화면 한가득 잡히자.
“허어업!”
“와, 미친.”
“꺄아아아!”
세이렌의 팬이든 아니든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의상에, 눈 밑에 붙인 글리터 파츠들이 우연훈의 얼굴과 완벽한 합을 이루고 있었다.
얼굴에서 광이라도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찰나,
우연훈이 아무 감정도 안 느껴지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더니,
-hello, world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그 순간 스크래치에 불과하던 사운드들이 하나의 멜로디를 갖춰 나가며 재배열되었고.
누워 있던 세이렌 멤버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메라 또한 클로즈업으로 잡아두고 있던 앵글을 더 넓은 사이즈로 빼면서 멤버들 전원을 프레임에 담았는데,
“와.”
“미친.”
단체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의상에 화려한 메이크업.
그걸 전부 소화해 내는 멤버들의 비주얼까지.
아직 본격적인 무대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된다! 이건 되는 무대다!’
실패할 수 없는 무대라는 것을 말이다.
* * *
-hello, world
이제 귀에 익은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우린 지난 2주간 기계처럼 연습했던 그 동작들을 하나씩 수행해 냈다.
이번 무대는 세계관을 담은 무대이기 전에,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무대이기도 했다.
냅다 세계관만 담은 무대면 파이널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가사에 담은 메시지는 간단했다.
새로운 시작이니 함께 해달라는 거다.
어쩌면 수많은 아이돌들이 본인들 곡에 담았던 메시지이기도 할 거다.
아이돌은 팬이 없는 한 성립할 수 없는 직군이니 말이다.
우리의 세계관 첫 시작에, 팬들을 그곳으로 초대한다는 마음으로 쓴 곡이었다.
연훈이 형이 무대 대형 뒤로 돌아가고.
내가 센터로 나왔다.
그간 매 무대마다 떨었던 나였다.
어떻게든 긴장감을 이겨내고 무대를 했지만 쉬운 무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자신이 있었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객석을 바라봤다.
이것보다 훨씬 작은 무대 앞에서도 떨었는데,
-hello, world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피어나
-꿈꾸던 모든 게 생생히 일어나
-우리 둘만을 위한 이 세상이
-성큼 다가온 건 커다란 축복이야
지금은 두려울 게 없었다.
아마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무대 위에 서 있는 형들의 표정 또한 전에 없이 밝았다.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떨었던 형들인데.
막상 또 올라오니 원래 모습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내가 센터에서 물러나고 동준이 형이 앞으로 나왔다.
-모르겠어 이 행복이 대체 뭔지
-내게 이런 감정이 어울리긴 한지
-맞잡은 두 손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한 걸음씩 발맞춰 걸어볼게
동준이 형의 편안하고 맑은 음색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다시 센터가 바뀌고.
프리 코러스 부분에서 도승이 형이 앞으로 나왔다.
-낮과 밤이 사라져가
-너와 내가 그려나갈
-이 세계가 아직 뭔지
-나조차도 모르지만
하이라이트 구간 전에 가볍게 분위기를 띄울 만한 랩이 지나가고.
운이 형이 무대 센터로 나오며 후렴구의 첫 번째 벌스를 내뱉었다.
-hello, world
-새로운 세상이야
-맞잡은 두 손 놓지 않게
-더 꽉 잡아 저 너머로
-우리가 닿을 그 너머의 세계로
우리가 하던 기본 안무들과는 다른, 운이 형만의 단독 안무가 들어간 동작들이 터져 나왔다.
가볍고 쫀득한 운이 형의 춤선이 두드러지는 안무 끝.
후렴구의 두 번째 벌스를 위해 연훈이 형이 센터로 나왔다.
얼굴이 화면에라도 잡힌 걸까.
연훈이 형이 등장하자마자 객석에서 갑작스레 탄성이 터져 나왔다.
-Don't let go
-내 손을 더 꽉 잡아
-open your eyes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에
-hello, world
-수줍게 인사를 건네
곡의 하이라이트가 이어질 차례다.
-hello, world
-새로운 세상이야
-hello, world
-꿈꿔왔던 그 너머로
-hello, world
-우리들의 세계에게
-hello, world
-인사를 건네
우린 마치 악수라도 하듯 객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고 그대로 잡아끌 듯이 당겨오는 게 이번 하이라이트 안무였다.
한데 분명 허공에 손을 내민 것임에도 불구하고,
‘……뭐야.’
누군가가 손을 잡아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라는 생각은 속으로만 삼킨 채.
난 객석을 바라보며 무대를 마저 이어갔다.
저곳에 팬들이 앉아 있을 거란 그 사실이 별것 없는 당연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좋네.’
어딘가 든든했다.
* * *
세이렌의 한 팬은 무대를 보며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사실 이번 미션 자체가 세이렌에게 불리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다른 팀들은 그간 오리지널 곡을 하지 않았기에 그 팀만의 오리지널리티 자체가 신선한 소스다.
하지만 세이렌은 늘 오리지널 곡으로만 무대를 했으니 세이렌만의 오리지널리티는 이미 파악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해서 이전 무대들보다 눈에 띄게 좋은 무대를 하지 않는 이상 기대 이하라는 평을 받기 쉬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데,
‘미쳤어……. 진짜 얘네 정체가 뭐야.’
기대 이상의 곡과 기대 이상의 의상.
또 기대 이상의 안무였다.
이번 안무들은 전체적으로 ‘연결’이 강조되는 안무였다.
초반에 누워 있던 안무 대형에서도 모두가 다 서로의 다리에 머리를 댄 채 누워 있었고.
하이라이트 구간에서도 마치 손을 잡아끄는 듯한 동작들이 있었다.
곡 내용도 새로운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한다는 내용이고.
이건 굴러가면서 들어도 세계관에 관련된 곡이고, 또 팬들에게 주는 팬송이었다.
앞으로 나올 앨범 세계관을 파이널 무대에서 푸는 것에 심장이 거세게 뜀과 동시에.
거기에 팬송 소스까지 섞은 것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게 과연 정말 망돌이고, 또 초소형 회사에서 나온 데뷔조가 맞나 싶었다.
세상엔 가끔 받아들일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는데,
‘이게 기적이지 진짜…….’
저 코딱지만 한 회사에 저만한 인재들이 다섯이나 모여 있었다는 게 기적이다.
그녀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무대를 바라봤다.
곡은 3절로 넘어가기 전 브릿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줄곧 밝고 몽환적이던 곡 분위기가 반전되더니 다소 우울하게 바뀌었다.
-오늘 이 세계가 무너진대도
-누군가 우릴 찾아낸대도
우연훈이 센터로 나오더니 고음을 올리며 음을 길게 늘였다.
라이브 영상을 수도 없이 보며 얘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미쳤네 그냥.’
현장에서 들으니 입에서 무슨 레이저라도 나가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엄청 저렇게 또렷하고 맑게 귀에 때려 박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잡은 손 절대 놓지 말아줘
-내가 널 꼭 다시 찾을게
이내 브릿지 파트가 끝나고.
잠깐 반주가 뮤트되는가 싶더니.
다시 그 밝고 몽환적인 사운드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오더니 후렴구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hello, world
-새로운 세상이야
-hello, world
-꿈꿔왔던 그 너머로
-hello, world
-우리들의 세계에게
-hello, world
-인사를 건네
세이렌 멤버들은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군무를 선보이며 마지막 3절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그에 맞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터지더니 공중 위로 흩날렸다.
파이널 엔딩 무대에, 벅찬 사운드의 후렴구 멜로디가 반복되는 와중, 하늘 위로 가볍게 나부끼는 분홍빛 꽃가루는,
‘……미친.’
커다란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더없이 충분했다.
그녀는 흩날리는 꽃가루와 무대 위의 세이렌을 멍하니 바라봤다.
-드디어 만난 너에게.
-hello, world
-손을 내밀게
이내 마지막 아웃트로까지 곡이 이어졌고.
손을 내미는 동작을 끝으로 세이렌은 엔딩을 장식했다.
맘 같아선 그 손을 확 잡아채고 싶을 정도의 충동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꾹 눌렀다.
감정이 벅차오르는 게 조금 심하다.
성인 되고 나선 울어본 적이 거의 없는 그녀인데,
“아……. 진짜…….”
남들이 보면 주책맞다 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남이 볼 새라 급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았다.
세이렌이 보여준 무대가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최고야 진짜.’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그 어떤 무대보다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