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32화
윤태형을 만나지 말라고 시스템이 경고했다.
‘아니, 갑자기 왜?’
난 문 앞에 멈춰 선 채 생각했다.
내가 갑자기 멈춰 버린 탓일까.
“태윤아, 안 가?”
“태윤 씨 안 가세요?”
뒤쪽에 있던 연훈이 형도.
승연 씨와 현아 씨도 내게 묻는다.
“아, 그. 어…….”
시스템은 내게 윤태형을 만나지 말라 했다.
하지만 난 지금 윤태형을 만나려고 문을 열었다.
기로에 놓인 거다.
결국 내가 내린 건,
“그, 저희 일단 주차장으로 갈까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다.
“네?”
“팀장님 만나러 가잔 거 아니야?”
“유원동 본부장님이랑 대화 못 나누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거기서 무슨 대화가 오갈 줄 알고 그냥 가?”
형들은 방금 전과는 180도 다른 태도를 보이는 내게 의문을 쏟아낸다.
나 같아도 그럴 거다.
“……그, 어. 이렇게 다 같이 가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되는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두 분이서 일 얘기 나누는 중인데 저희가 갑자기 끼어들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잖아요.”
대충 잘 입을 털었다 싶었는데,
“우리 이야기 나누는 건데 가서 우리가 들어야지.”
도승이 형이 이리 말한다.
“맞아. 가서 뭔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그냥 가.”
동준이 형도 같은 의견을 말한다.
“……난 사실 조금 불안해. 솔직히, 거기서 이상한 이야기 오고 갈까 봐.”
그 착한 운이 형까지 이렇다.
마지막,
“가서 만일 우리한테 뭐라 하면 내가 시킨 거라고 할게. 걱정 마, 태윤아!”
연훈이 형이 책임감에 불타는 얼굴로 이리 말했다.
“……흐음.”
난 다시 한번 생각했다.
방금 전 들었던 미션 내용이 정확히 뭐였는지 말이다.
다시 듣고 싶다 떠올린 것만으로,
[윤태형을 피해 주차장으로 내려간 후 숙소로 돌아가시오.]
[성공 시, 보상 없음.]
[실패 시, 윤태형과의 언쟁.]
미션의 내용이 귓가에 들려왔다.
‘실패 패널티가 치명적인 건 아니네.’
사실 이건 패널티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거다.
왜냐면,
‘언쟁을 하러 가는 게 목적이잖아.’
실패 패널티가 곧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시스템이 하란 대로 해서 손해 본 적은 없다.
해서 이번에도 그 규칙을 따르려 했는데,
“……가보죠.”
패널티가 크지 않은 점.
무엇보다 억지로 형들을 돌려보내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점 탓에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서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거 같으면 공손히 인사만 하고 돌아오자.”
내가 걱정하는 게 보인 건지 운이 형이 어깨를 툭툭 치며 걱정을 덜어줬다.
사실 예의 없어 보일까 걱정한 건 아니지만,
“고마워요…….”
뭐, 날 걱정해 준 거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 * *
JI ENM의 본부장 유원동은 대기실을 나선 후 복도를 걷고 있었다.
크게 인상적이랄 것은 없는 만남이었다.
이 나이 먹고 아이돌을 좋아할 리도 없고.
더군다나 아들뻘 되는 남자 아이들에게 과몰입을 할 리도 없다.
그저 외부 미팅을 나와 거래처 사람들을 만났다.
아니, 거래처가 납품할 품목들을 만났다라는 느낌이었다.
다만,
“본부장님!”
“아, 박 피디. 허허. 왜 뛰어왔어요?”
박수철 피디가 갑자기 달려왔다.
“방금 전에 미팅 끝난 거 아니에요? 우리 더 할 말 남았어요?”
혹시나 또 회식 얘기를 꺼내려나 싶어 지긋지긋해지려는데,
“아까 무대 전에 저랑 대화 나눈 거 기억하시죠?”
“아, 그. WD엔터 쪽 이야기요?”
“네네.”
“설마 잊겠어요, 제가~”
“뭐, 합작회사 실무진 인사야 당연히 본부장님 권한이니 제가 이래라저래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괜히 걱정돼서 한 번 더 와봤습니다.”
“네, 알겠어요. 인사에 참고할게요.”
다행히 회식 이야긴 아니었다.
유원동은 그리 말하곤 자리를 뜨려 했다.
이미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났고.
돌아갈 길에 막힐 도로를 생각하면 슬슬 짜증도 났다.
“다음에 또 보죠. 연락해요.”
그리 말하고 다시금 남은 복도를 마저 걸어가려는데,
“아, 좀, 놔봐!”
“다음에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잖아요. 왜 굳이 꼭 오늘…….”
“야! 너네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네가 나 일 안 한다고 자료 모아서 사장한테 찔렀지? X발 지금 그거 때문에 가서 몇 시간을 깨지고 왔는지 알아?”
“아……. 그게.”
“일단 너네 그 건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JI ENM 쪽 사람이랑 만나야겠어. 너네 끝나고 밑에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어. 알았어?”
복도가 꺾어지는 저 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내 30대 남성 하나와 20대 여성 둘이 튀어나온다.
“저게 무슨…….”
유원동은 이게 무슨 그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봤는데,
“음?”
그 남자가 자신과 눈이 맞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말을 걸 것 같은 느낌이라 살짝 뒷걸음질 치려 했는데,
“혹시 JI ENM 쪽 담당자분이신가요?”
유원동이 자리를 피하는 것보다 저 남자가 먼저 말을 거는 게 빨랐다.
한데 복도에서 그리 떠들고 이토록 뻔뻔히 인사를 하러 오다니.
유원동이 복도 너머에서 있었던 소란을 듣지 못했다 판단한 모양이다.
유원동은 어처구니없었지만 그 인사를 받아는 줬다.
“네. JI ENM 유원동 본부장입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20대 여성 둘은 짧게 목례만 하고는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 순간 유원동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사람이 박수철 피디가 말했던 사람.
“이번 프로그램 우승팀인 세이렌의 담당자, WD엔터 윤태형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WD엔터의 윤태형 팀장이란 걸 말이다.
사실 박수철 피디가 말을 했을 당시에는 별로 달갑게 들리진 않았다.
박수철 나름대로는 폭탄을 거르라고 정보를 주는 것일 테지만 유원동 개인으로선 어린놈이 주제넘는 발언을 하는 걸로 밖에 안 들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굳이 얼굴 붉힐 것 없으니 그냥 넘어간 후, 박수철이 한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여기, 제 명함입니다. 가능하면 꼭 한 번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이리 윤태형의 얼굴을 마주하니…….
“아, 네. 윤태형 팀장…… 호오.”
……이상하리만치 짜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늦어져서 더 짜증이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
“흐음.”
유원동은 아이돌판은 몰라도 이런 사람은 아주 잘 알았다.
“시간 될 때 연락 주시면 세이렌 친구들 관련해서 중요한 정보들 공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능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린 케이스.
“또, 그 비즈니스적으로,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 나눌 것들도 꽤 있고요.”
그게 자기 능력인 줄 알고 기고만장해진 케이스.
“그리고, 저희 회사 고용 승계, 라 할까요. 하하. 암튼 인력 충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게 있습니다.”
해서 한번 얻어걸린 행운을 붙잡은 채 어떻게든 온몸을 비틀며 지 편한 길을 찾으려는 놈들이었다.
박수철에게 이야기를 건네받았을 때에도 이런 부류의 인간일 줄 알았는데, 얼굴로 보니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는 말없이 윤태형을 바라봤다.
윤태형은 그런 유원동 앞에서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꽤 오갔다.
아직 유원동 뒤에 서 있던 박수철 피디조차 숨을 죽이고 이 상황을 지켜볼 정도의 침묵이었다.
“이게 명함이군요.”
유원동은 WD엔터 명함을 바라봤다.
대충 윤태형의 명함을 받아채더니, 그는 다른 걸 질문했다.
“사장 명함 있습니까?”
“아, 저희 사장님이요?”
“없나요?”
“아, 네. 제가 사장님들 명함은 따로 없어서요.”
“당신보다 위 직급은 있나요?”
“아뇨.”
“회사 총원이 몇 명인가요?”
“셋입니다.”
“경력은?”
“저는 다른 엔터에서 6년, 나머지 둘은 WD엔터가 처음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유원동은 입소리를 쯧 하고 낸 후 다시 윤태형을 바라봤다.
이내 방긋하고 웃으며 윤태형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고생했어요. 여기까지 오느라. 조심히 가요.”
윤태형을 지나쳐 복도를 마저 걸어갔다.
윤태형은 멀어지는 유원동을 쳐다만 봤다.
동시에,
‘명함을 못 받았네?’
본인의 명함은 줬지만, 유원동의 명함은 못 받았단 걸 깨달았다.
* * *
시스템이 왜 가지 말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형들을 이끌고 승연 씨 현아 씨와 함께 유원동 본부장을 찾아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진짜 유원동과 윤태형이 같이 있는 걸 보게 됐는데,
“고생했어요. 여기까지 오느라. 조심히 가요.”
유원동이 윤태형을 두고 복도를 빠져나가는 걸 보게 됐다.
방금 전 유원동은 윤태형의 명함을 받은 뒤, 본인 명함은 안 주고 그대로 지나쳤다.
직장을 안 다녀봐도 저게 무슨 의미일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락 안 하겠단 거 아니야?’
윤태형을 깐 거다.
분명 아까 회식 안 시켜준다 했을 땐 유원동에 대한 평가가 하향조정되었는데,
‘……생각보다 쓸 만한 아저씨인가.’
방금 그 모습에선 평가가 상향조정 되었다.
박수철 피디님께 따로 부탁도 드리는 등 나름 윤태형의 고용 승계를 막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그게 실제로 이어질지는 몰랐는데,
‘이게 되네.’
다행이었다.
이거, 나가봐도 되는 건가?
막상 대기실을 나설 땐 가서 뭐라도 말을 하려 했던 형들이지만 막상 앞에 오니 머뭇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가 봐도 윤태형과 유원동 사이에 긍정적인 시그널들이 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끼었다가 안 그래도 갑분싸인 분위기 더 싸하게 만들지 몰랐다.
해서 복도 뒤에 서서 나가지 않는 거였는데,
아, 미친.
방금 윤태형이랑 눈 맞았다.
원래는 이대로 바로 뒷걸음질 쳐서 대기실로 돌아가는 게 계획이었다.
그러곤 5분 내로 짐 챙겨서 승합차 타고 빠져나가는 게 목표였고.
한데 눈이 마주친 이상,
[미션 실패]
[윤태형과의 언쟁이 시작됩니다.]
윤태형과의 언쟁을 피할 수는 없게 됐다.
“너네 지금 여기 모여서 뭐 하냐…….”
윤태형은 누가 봐도 짜증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윤태형이 몹쓸 짓을 한 거라 판단한 건가.
“팀장님! 그, JI ENM 사람이랑은 대화 잘 나누셨나요?”
“저희 그 밑에 주차장 내려가려는 길이었거든요. 같이 가면 되겠다 그쵸?”
현아 씨와 승연 씨가 먼저 나서서 윤태형을 커버치려 했다.
한데,
“잠깐만 나와봐.”
윤태형은 가볍게 윤승연과 이현아를 지나치더니,
“봉태윤. 너 이리로 와봐.”
내 쪽으로 다가와 갑자기 눈을 부라린다.
아니, 방금 유원동 앞에서는 그렇게 착하게 눈을 뜨더니.
날 보니까 무슨 뒷골목 양아치처럼 군다.
“너 잠깐 뒤로 따라 나와봐, 가서 얘기 좀 하자. 네가 오늘 무슨 짓거리 한 줄 알기나 해? 김동현 사장님한테 오늘 내가 얼마나 까였는지 알아?”
내가 무슨 짓거릴 한 건지 알기나 하냐니.
형들이랑 같이 더쇼케2를 우승해 내는 일을 했다.
아주 자랑스러운 걸 해냈지.
한데 저 자식은 우리가 우승한 건 하등 신경 안 쓰고 내가 자기 엿 먹인 것만 신경 쓰이나 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는데,
“아니, 팀장님, 왜 그래요?”
“뭐야. 무섭게 왜 눈을 그렇게 떠요.”
“아니, 저희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태윤이 따로 불러서 뭐 하게요? 팰라고요?”
나보다 우리 형들이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그간 어디 가서든 늘 착하게만 굴던 형들인데,
“……음?”
갑자기 전투력을 불태우며 윤태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