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 174화
내가 진짜 이걸 왜 했지 싶다.
스스로를 또 한 번 조롱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다니.
그와 별개로 팬들의 반응은 좋다.
저게 쪽팔려 하는 나를 위한 다른 의미로의 팬 ‘서비스’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아아.’
지금 난 얼굴이 터질 것 같다.
“하하하! 막내 봉태윤 군의 아주 애교 넘치는 마지막 인사말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역순으로 박동준 군의 마지막 인사말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준 씨? 세일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MC는 이 상황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현장정리를 하며 방송을 이어갔다.
동준이 형은 날 곁눈질로 슬쩍 보더니,
“나도 데뷔했어, 누나! 잘 부탁해! 앞으로 우리 자주 자주 보자!”
“하하하하!”
“동준아아!”
“와…… 박동준…… 대단하네…….”
누나 드립의 2절을 이어간다.
아니 한 번 했으면 됐지 그걸 두 번 하다니.
대체 날 어디까지 몰아붙일 생각인 건가.
이 이상하면 뇌절이 된단 걸 알아설까.
다음 타자인 운이 형부터는 평범한 멘트로 이어갔다.
아니, 평범한 줄 알았다.
“앞으로 더 자주자주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좋은 추억 많이 많이 만들어봐요.”
여기까진 문제없었으나,
“그럼 또 봐요, 누나들.”
마지막에 저놈의 누나가 사라지지 않고 또 기어 나온다.
설마 도승이 형까지 저러겠어 싶은데,
“이거…… 누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흐름인데…….”
왜 그동안 신경도 안 쓰던 흐름을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회성 좋은 사람 아니면서 왜 남의 눈치를 보냔 거다.
내가 매서운 눈초리로 도승이 형을 쳐다보자,
“태윤이가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절 쳐다보니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오히려 그게 트리거가 된 건지 도승이 형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번득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좋은 곡도 많이 만들고, 좋은 무대로도 자주 돌아올게요. 그럼 또 봐요, 누나.”
“…….”
4차 누나다.
이제 누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마지막 타자.
연훈이 형은 이미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저도 진짜…… 누나라고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저 형은 진심 100%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입가가 씰룩대는 게 당장에라도 누나 연발을 해버릴 거 같다.
“세일러들! 오늘부터 우리 진짜 1일이니까 중간에 어디 가지 말고 꼭 옆에 붙어 있어요! 우리도 계속 이 자리에서 기다릴게요. 그럼 내일 또 봐요, 누나!”
연훈이 형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렸던 고백이라도 하듯 박력 있게 멘트를 쳤다.
“꺄아아아!”
공연장엔 팬들의 함성이 넘쳤다.
“하하하! 누나로 완성된 세이렌의 마지막 인사였네요.”
MC는 더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마무리 멘트에 들어갔다.
“그럼 지금까지 시청해 주신 팬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세이렌의 데뷔쇼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방송은 종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공연장을 가득 채웠던 팬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우린 무대 위에 서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팬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무언가 입 모양으로 말을 건네기도 했다.
손을 흔드는 팬에게는 우리도 손을 흔들어줬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건네는 팬에게는 우리도 입 모양으로 대답을 해줬다.
이내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도 대기실로 이동했다.
무대에 더 있었다간 혼선이 빚어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기실로 이동 후.
“고생했어, 얘들아!”
“우리 데뷔했다!”
“호오오!”
“드디어 데뷔다아!”
“으아아아악!”
우린 데뷔쇼를 하는 동안은 보여주지 못한 날것의 탄성을 내질렀다.
난 대기실 곳곳을 마구 돌아다니는 형들을 바라봤다.
“드디어 데뷔야, 태윤아! 데뷔! 데뷔!”
연훈이 형이 내 팔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말한다.
“그러니까요. 드디어 데뷔네요.”
“데뷔쇼 하고 나니까 진짜 확 체감되는 거 같아.”
“다들 수고 많았어요.”
“호오오오!”
“데뷔다아아!”
“오늘 같은 날은 치킨에 맥주!”
“아, 그건 선 넘지, 동준아.”
“……개재미없어.”
형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데뷔의 기쁨을 마구 표출했다.
“우리 데뷔 기념으로 서로에게 한마디씩 하는 시간을 가질까?”
그때 연훈이 형이 이런 제안을 한다.
“한마디씩이요?”
“갑자기?”
“하면 좋잖아.”
“그렇긴 하죠.”
“욕해도 돼요, 형?”
“동준아, 그건 안 돼.”
“……네.”
그렇게 연훈이 형부터 서로에게 덕담을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이제 막 데뷔했으니까 사고 치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도 말자. 정말 오래오래 함께 활동해야 하잖아. 이 마음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자.”
연훈이 형의 그 말에 분위기가 잠깐 진지해졌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지금 이 마음을 오래 간직해야 한다.
아이돌로 활동한단 게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이 힘들고 짜증 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나쁜 짓에 가담할 수도, 하면 안 될 짓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니까.
더 나아가 연예인이라는 위치는 그런 나쁜 것들에 물들기에 너무 쉬운 위치이기도 하고.
하지만 직업인으로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이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하고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특별히 우리만 힘든 일을 한다는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도, 그런 연민 끝에 우울감에 시달려 나쁜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려면 당연히 이 초심을 오래 간직해야 할 거다.
“저도 연훈이 형이랑 생각 똑같아요. 우리 사실 오래오래 돌아서 데뷔까지 왔잖아요. 다들 연습생 기간 결코 짧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이 팀이랑 팬들에게 창피할 만한 짓은 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봐요.”
운이 형도 이런 말을 얹었다.
연훈이 형이 한 말과 비슷한 맥락의 말들이었다.
“나도 연훈이 형이랑 운이 말에 100프로 동의해요. 오랜 길 돌아온 만큼 행복하려면 이제부터 시작이잖아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구설수 없이 해봐요.”
도승이 형도 이리 말했고,
“정년까지 세이렌 하고 세일러들이랑 디너쇼 열어야죠~ 무조건 저는 한 40년은 하고 은퇴할 거예요.”
동준이 형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리 말을 얹었다.
마지막은 나다.
중요한 말은 형들이 이미 다 했다.
내가 할 말은,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남아요……!”
이 정도뿐이다.
“그게 끝이냐, 봉태윤아.”
“너무 짧다.”
“우우우, 봉태윤 노성의맨.”
“…….”
나름 진심을 담은 건데 이게 성의가 없다니.
“세이렌의 앞날에 누가 되지 않도록, 팬들 보기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옳지.”
“좋다.”
이제야 내 멘트가 맘에 든 건지 형들이 미소를 띤다.
“다 같이 한번 얼싸안을까?”
“아, 그건 좀.”
“그건 오바예요, 형.”
“……알았어.”
연훈이 형은 이 타이밍에 포옹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모두의 완강한 반대로 그건 무산되었다.
대신 내 어깨를 은근슬쩍 휘감으며 치대기 시작한다.
“수고 많았어, 태윤아.”
“네.”
난 그런 연훈이 형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며 대답했다.
때마침 승연 씨와 현아 씨가 대기실로 들어오더니,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
“데뷔 축하해요!”
한 차례 더 데뷔 축하를 해줬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콩그레이츄레이션! 빰빰!”
뒤에 카메라맨이 한 사람 있고, 승연 씨의 손에 데뷔 축하 케이크가 들려 있단 거다.
“허어억!”
“대박!”
“세상에…….”
“이거 케이크 주문 제작한 거예요?”
케이크는 네모난 모양의 주문제작 케이크였는데, 위에 우리들 형상을 딴 모형이 올라가 있었다.
아마 이거 나중에 비하인드 영상으로 올리려고 찍는 거 같은데……. 형들은 그런 거야 아랑곳 않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있든 말든 어쨌든 우릴 위해 케이크를 준비해 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너무 감사해요, 진짜…….”
“와아…….”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이거 케이크……. 진짜 맛있어 보인다…….”
우린 다 같이 모여 앉아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었다.
“맛있어!”
“와, 진짜 부드럽네.”
“이거 승연 씨랑 제가 진짜 발품 엄청 팔면서 찾아온 맛집이에요. 맛있죠?”
“너무 감사해요, 진짜.”
우린 다 같이 마지막으로 데뷔 축하 시간을 보내며 케이크를 먹었다.
데뷔의 맛은…… 역시나 달콤했다.
* * *
데뷔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옷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두꺼운 메이크업은 클렌징 티슈로 1차만 지워냈다.
“하아아. 좋다. 피곤한데 좋다.”
형들은 차량에 앉아 좋다, 행복하다, 실감 안 난다, 기쁘다, 와 같은 말을 30초에 한 번씩 말했다.
데뷔를 한단 걸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이렇게 좋아하는 걸 못 하게 됐던 지난 생이 문득 떠올라 가슴이 괜히 먹먹해졌다.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지.’
시스템이 어떤 시비를 걸든 간에 형들을 지켜내야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뮤비 조회 수부터 확인해 볼까.’
난 핸드폰을 들어 이런저런 지표들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타이틀곡 의 뮤직비디오 조회 수는 현재 200만.
시간을 고려해 보면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아마 오늘 밤중에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테니,
‘내일 아침이면 500만까진 늘 수도 있겠네.’
이 정도라면 일주일 안에 뮤직비디오 조회 수 1,000만 회는 어렵지 않게 달성 가능하다.
문제는 초동 50만 장인데,
‘우리 선주문이 30만 장 정도 들어왔다고 했었지 아마.’
첫날에 팔린 사전주문이 30만 장이었다.
아마 첫날 현장 판매까지 합친다면 35만 장쯤은 오늘 안에 팔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보면 50만 장이 쉬울 듯 보이겠으나,
‘이제부터 하루에 만 장에서 이만 장 정도 겨우 팔릴 텐데.’
원래 뭐든지 첫 발매일이 미친 듯 주문량이 많은 법이다.
그다음부터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판매량이 꺾인다.
심지어 요즘은 사전주문이 많아져서 첫날 이후 판매량이 꺾이는 기조가 이전보다 심해졌다.
‘이렇게 되면…… 한 45만 장이 최대일 거야…….’
대충 긍정적으로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50만 장은 되지 않는다.
사실 예상했던 수치였기에 크게 두렵진 않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거지.
“어? 태윤아! 우리 주문한 거 지금 숙소 앞에 왔대!”
“아, 정말요?”
“오, 타이밍 좋다.”
난 초동을 올리기 위해 형들과 몇 가지 준비한 게 있다.
방송 스케줄이나 그런 거야 회사에서 준비해 주는 거라 해도, 그 밖의 소소한 요소들은 우리가 직접 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아이돌 산업이란 절대 다수의 대중에게 어필하는 산업이 아니다.
한 그룹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덤에게 어필해야 하는 산업이다.
동시에 그 팬덤을 잘 챙기기만 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꽤 큰 홍보가 되는 산업이고.
요지는 팬덤에게 얼마나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냐가 관건인 셈이다.
“얼른 숙소 가서 준비하죠.”
“내일 기대된다.”
“다들 좋아해 주시겠지?”
팬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우린 이것저것 준비한 게 꽤 많았다.
* * *
세이렌이 데뷔하고 난 다음 날 새벽.
음악방송 사전녹화가 진행되는 GBS의 라이브 홀 앞에는 세이렌 팬들이 모여 있었다.
6월이기에 겨울 사녹만큼 살을 에는 강추위는 없다만 어쨌든 새벽은 새벽.
결코 이 자리가 편안하진 않을 터였다.
배도 고플 터고, 다리도 아플 것이며,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어제 데뷔쇼 보셨어요, 혹시?”
“당연하죠. 진짜…… 도승이…… 하아…….”
“하하하! 데뷔쇼 봤냐 물어보면 다들 도승이부터 나오더라고요.”
“아 근데 태윤이 누나도 진짜 귀여웠어요. 태윤이 누나라고 할 때만 진짜 막내 같더라고요.”
“애들 다 같이 태윤이 놀리는 것도 진짜 짱 귀여웠는데…….”
세이렌의 팬들은 얼굴을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가벼운 수다도 떨고, 서로 간에 정보들도 공유하며 이 새벽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때,
“……어?”
“……저게 뭐죠?”
저 멀리서 커다란 박스 여러 개가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 박스들의 정체를 알게 됐는데,
“세상에…….”
“미친…….”
세이렌이 준비한 역조공 선물이었다.
중요한 것은 역조공을 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대체…… 이걸 언제 다……? 아니…….”
덕질 몇 년 해봐서 이 바닥 좀 안다는 사람들마저 놀랄 정도인 역조공의 내용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