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39화
분명 구매는 되었을 텐데, 아무런 느낌이 없어 불안한 감정이 불쑥 치솟았다.
‘이거 제대로 된 거 맞나?’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 거라면?
발연기 영상 클립이 온 SNS를 떠돌아다니며 조롱당할 생각을 하니 절로 아득해졌다.
“오늘 주제인 사극으로 연기를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예.”
나는 비장하게 끄덕이며 무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오호라~ 이 친구 즉석 연기에 자신 있어 보입니다! 상황은 뭘로 할까요.”
“참가자들과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때 다수의 사극에서 임팩트 있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한 탓에 ‘왕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심사 위원석의 중년 배우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럼 제가 왕 역할을 하죠.”
예?
그냥 가만히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내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나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환호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임현교 배우님과 함께하게 되셨는데, 해온 군은 긴장이 하나도 안 되나요?”
S+ 정신력 덕에 긴장한 티가 안 나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MC가 너스레를 떨었다.
‘긴장되는 척 좀 해야겠군.’
띠링!
[천상천하(天上天下)]가 발동됩니다!]
“아, 아니요. 저, 저 지금 지, 진짜 기, 긴장되는, 덷, 데요.”
미쳤나?
설마, 이것도 ‘연기’로 인식된 건가.
정신 제대로 나간 미친놈처럼 말이 더듬더듬 나오는 걸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말뿐만 아니라 몸도 달달 떨리고 손까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애초에 긴장되는 척 정도는 나도 알아서 할 수 있었는데 특성이 발동되는 바람에 조금, 아니, 심각하게 과한 반응이 나와 버렸다.
“하하! 긴장 푸셔야 연기를 하죠.”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MC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기합을 넣었다.
“자아! 그럼 임현교 심사 위원님과 성해온 군의 합동 무대~”
타앗!
곧바로 판을 깔아주겠다는 듯 공간이 어둠으로 물들고 무대에만 조명이 들어왔다.
여성 참가자 쪽은 중전을 연기하는 레퍼토리였고, 남성 참가자 쪽 레퍼토리는 대충 이렇다.
[왕이 아끼는 충신인 연기자! 좌의정의 술수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후 곧장 추포되는데……!]
대강 이런 상황에서의 충신 연기를 펼치면 된다.
이렇게 상황만 정해진 상태에서 참가자들이 상상력으로 대사를 창조해 내 즉석 연기가 진행되는 식이다.
착! 착!
그리고 나는 지금 왕 앞에 끌려온 상황이기에 나는 무대 바닥에 무릎을 척척 꿇고 준비를 마쳤다.
“오우~ 제대로시네요. 자, 시작합니다!”
MC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사극에서만 들었던 중후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련했구나! 내 너를 믿고 곁에 뒀던 것이 후회가 돼!”
목소리만 들어도 왕으로 느껴질 만큼 위엄이 느껴지는 발성이었다.
“전하! 도대체 어떤 이의 말을 들으신 겁니까! 지금까지 저를 봐오시지 않-”
내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임현교 배우가 언성을 높였다.
“닥치거라! 듣고 싶지 않다! 여봐라. 이자를 당장-!”
나는 곧바로 소품으로 준비되어 있던 긴 장도를 집어 들고는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대사를 이었다.
“죽이십시오. 당장 저를 죽이십시오! 이 알량한 목숨으로 지존의 심란함이 가신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내놓을 수 있사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동시에 내가 정말 신하라도 된 것처럼,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이 불충한 신하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임현교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리석구나! 진정 어리석어!”
쿵.
쿵.
쿵.
‘신기하군.’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뛴다.
마치 정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간교한 자들이 이 나라 지존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파먹고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하! 지금 그 말은, 내가 그들에게 홀리기라도 하였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임현교 배우와 눈을 마주쳤다.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만…… 예! 그렇사옵니다!”
원래 이렇게 길게 하나? 슬슬 끊어줄 때가 됐는데.
특성 덕분인지 감정 실린 대사가 술술 나오고는 있었지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임현교 배우가 노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흡사 대호와도 같은 기세였다.
“네 녀석이, 기어코!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보구나!”
그 순간, 눈물이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낀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소인도 가족이 있는 몸, 죽음이 두렵사옵니다!”
“하지만 이 알량한 두려움은 저의 몫일 뿐! 소인이 가장 두려운 건 뱀 같은 자들이 전하의 두 눈을 가려 옳은 것을 옳지 않다 하고, 옳지 않은 것을 옳다 하는 것!”
대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나저나 이 특성, 정말 물건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외감, 두려움, 죄책감, 걱정 등의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듯 밀려왔다.
“……부디 전하 곁에 소신이 없더라도 천부당만부당한 자들을 항시 경계하십시오. 또한 전하는 이 조선의 근본이심을 언제나 잊지 말아주시옵소서.”
“…….”
사아아-
잠시 무대에 정적이 흘렀다.
어둑했던 무대에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친구 정말 배우가 아닌가요?”
임현교가 마이크를 들고 진지하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리액션용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어, 이거 참……. 방금은 정말 오랜만에 연기에 빠져들어 봤습니다.”
즉석 연기가 이 정도라니 말도 안 된다며 임현교가 찬사를 늘어놨다.
‘1,500골드, 돈값은 하는군.’
다른 심사 위원들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박수를 치더니 임현교 옆에 앉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 사람은 각본가이자 극작가인 여정민.
원래 유명세가 있었지만 작년에 직접 대본을 쓴 드라마가 메가 히트를 치며 더 유명해졌다.
“라이트온이 배우 소속사라 그런가요? 회사에서 배웠어요? 이 질문 당연히 편집될 건 알지만 너무 궁금해서요.”
내가 고개를 젓자, 여정민이 눈을 빛냈다.
“와 정말요? 근데 웬만한 배우들보다도 연기를 더 잘하는 거 같아! 이 정도면 바로 스크린 데뷔해도 되겠는데!”
나는 가식적인 낯짝을 걸치고 그 정도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 * *
“해온 군!”
녹화가 끝나기 무섭게 임현교 배우가 나를 찾아왔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는 곧바로 비즈니스용 미소를 장착한 채 몸을 빙글 돌렸다.
“예! 괜찮습니다!”
“내가 가수 출신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라고나 할까, 그런 게 있었는데 그게 괜한 거였다는 걸 오늘 깨달았어. 오랜만에 연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다니까.”
“저도 존경하던 배우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큰 영광이었습니다!”
실제로 좋아하던 영화에 자주 나오던 분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폴더 인사를 하자, 임현교 배우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유찬식 감독이랑 영화 하나 들어가게 됐는데, 자네 이야기 좀 해볼까?”
엄청난 제안에 일순 숨이 멎었다.
유찬식 감독은 자타 공인 킹메이커.
크랭크인에 들어가기만 하면 천만 타이틀은 기본이고, 그 감독의 작품에서 두각을 드러내 탑 지위에 오른 배우들이 여럿이다.
오늘 세 명의 심사 위원 중 한 명이자, 현재 우리 소속사 간판 배우인 서유현.
서유현도 신인 시절부터 유찬식 감독 작품에 주조연으로 캐스팅되었다가 그대로 대박 난 케이스였지.
그런 배우가 왜 제 발로 MH에 들어왔는지는 의문이지만.
원래도 이름값이 있던 MH는 서유현이 들어오고 난 뒤론 입지를 굳히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 정상급 배우들도 유찬식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인데, 나를?
‘정말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빌어먹을.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좋은 제안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곧 사라질 연기력이거든요…….
“허어, 이 친구 좀 보게! 자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자신의 부족함을 운운하며 거절하는 겸손한 모습이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임현교는 다음에 또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남기고 사라졌다.
당장에라도 저 배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냈다.
지금의 나로서는 과유불급인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혼자만 있는 상황이라 천만다행이지.’
여기에 매니저라도 있었으면 내 입을 꿰매고 당장 소개시켜 달라며 매달릴 게 뻔했다.
그렇게 배역까지 따내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분명 엄청난 연기를 펼쳐 캐스팅했는데, 갑자기 삐그덕대며 발연기라도 시전하는 날엔 평생 먹을 욕 다 먹을걸.
나는 텅 빈 복도를 바라보다 곧장 등을 돌려 대기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최승하가 눈을 반짝였다.
등 뒤에서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착각이 일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최승하가 내 손을 붙잡았다.
“형, 혹시 배우 연습생이었어요……? 배우 연습생 하다가 갑자기 아이돌을 하게 된 그런 읍, 읍-”
녀석의 입을 대기실에 굴러다니는 초콜릿 과자로 틀어막았다.
“으브으브!”
“진짜 놀랐어. 너무 잘하던데. 정말 바로 작품 들어가도 되겠던데.”
류인이 거들자 다른 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휙.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무시한 채 상체를 빙글 돌린 나는 누군가를 응시했다.
나름 화창한 분위기의 대기실 속에서, 우중충함을 내뿜는 놈이 있었다.
샵에서만 해도 멀쩡하던 한수현의 기분이 몹시 안 좋아 보인 것이다.
‘음, 혹시 자기가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그건 아니니까 걱정 집어넣으라고 전해줍니다!]
그럼 그냥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군.
나는 미련 없이 시선을 회수했다.
그때, 문이 열린 대기실 사이로 머쓱한 얼굴의 매니저가 들어왔다.
“……이거 너희 분량 긴급 대본 나온 거, 점심시간에 줬어야 하는데 내가 실수로…… 주려고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어 버려서. 아이고. 하하하.”
범인이 이 새끼였군.
진짜 얼굴에 주먹이라도 내다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매니저 손에 있는 대본을 가져가 읽기 시작했다.
진행자가 애드립을 많이 섞긴 했지만 대부분 대본과 일치했다.
[MC : 오늘은 특별한 게스트가 있습니다.]
[MC : 이번 여름을 시원하게 해줄 노래로 찾아온 친구들입니다. 라이트온!]
쭉 읽어 내리다가 끝에 있는 글자에서 멈칫했다.
[※ 불가능하시다면 녹화 시작 전 알려주시면 됩니다.]
‘……진짜 장난하나?’
내 골드 돌려내.
돌려내, 미친놈아.
장난치는 거 아니다.
“야~ 그래도 해온이 메소드 연기 무섭던데? 넌 배우 해도 되겠어!”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칭찬으로 얼버무리려는 게 더 열받았다.
“회사엔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어쨌든 잘 끝났으니까~”
나는 서슬퍼래진 눈빛을 감추려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하하. 잘 끝나긴 했죠?”
내 피 같은 골드 덕에 말이야…….
매니저가 친한 척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역시, 형은 해온이 믿는다니까~ 이런 걸 보고 그, 사자성어로 어부지리라고 하나? 이러다가 너 캐스팅 들어오는 거 아니야?”
경직된 뒷목 근육이 팽팽하게 저려왔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저 인간을 한 대 치면 골드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합니다!]
퍽!
……대기실에 작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