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56화
‘대체, 대체, 언제……?’
방금 네 번째 그룹의 무대가 끝났다.
이제 온몸의 기운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몇 시간째지.
무대 하나가 끝나면 세트 제거, 무대 청소, 또 다음 무대 세트 설치까지 해야 하니 소요 시간이 엄청났다.
그걸 걱정하는지 MC가 주기적으로 무대 아래의 팬들과 소통하며 재롱을 떨었다.
왕년 아이돌다웠으나, 소통이고 나발이고 슬슬 집에 가고 싶어지던 찰나였다.
다음 무대의 세트가 설치되고, MC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 무대는, 트웰브의-!”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MC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 라인에서 귀가 찢길 것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를 재해석한 라이트온의 무대!”
“와아아아악!”
MC의 낚시에 제대로 걸려든 트웰브 팬석 라인에서 짜증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라이트온 팬석 쪽에서 함성이 터졌다.
곽덕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는 자신도 꽤 좋아했던 노래다.
‘완전 몽환 분위기인 데다가 고음 엄청 많은…… 어려운 곡.’
무대가 완전히 암전되어서 사람의 형체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명훈이 이 새끼 돈 안 썼기만 해봐라.’
김명훈이 라이트온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인물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는 의외였지만.’
이렇게 타 그룹이 여럿 나오는 경연 무대에서 돈을 안 쓴 티가 난다?
‘그것만큼 눈물 나는 게 없어……!’
곽덕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최소한의 돈은 투자해라, 명훈아!’
사아아-
곧이어 어두운 사이드 무대 쪽에 옅은 빛이 어슴푸레 내려앉았다.
그 빛 속에 앉아 있는 건 차윤재였다.
‘동그란 안경, 미, 미, 미쳤나.’
언뜻 보면 다락방이 연상되는 세트.
책들이 쌓여 있고, 차윤재의 옆엔 꽤 아찔한 높이의 계단이 있다.
무릎에 책을 올려둔 채로 종잇장을 천천히 넘기고 있는 차윤재.
그 순간,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드르륵, 탁, 끼익, 끼익.
마치 오래된 장난감 태엽을 감는 듯한, 기묘한 소리에 차윤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수상하고 기묘한 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온다.
드르륵, 드륵, 끼이이-
책을 내려놓은 차윤재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높디높은 계단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무렵, 계단의 최상층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샤아아아-
‘……무대에 돈을 얼마나 쓴 거지?’
무대는 여전히 어두웠기에, 그 빛이 정말 신비롭게 보일 지경이었다.
차윤재 역시 그 빛을 본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의 가장 윗부분까지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완전히 올라선 순간, 계속해서 들리던 수상한 소리가 일순간 멎어 든다.
곽덕배는 긴장감에 숨도 쉴 수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소리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차윤재가 상체를 빙글 돌려 뒤를 돌아본다.
몸을 반쯤 돌린 차윤재가 공중에 위치한 지미집 카메라와 눈을 마주친 순간-
“……!!”
곽덕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차윤재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굉장한 높이의 계단에서 차윤재가 뒤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스튜디오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X발, X발, X발, 돌았나 봐!’
압도적인 흥분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차윤재가 계단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전광판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I'll invite you to a pleasure place!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원곡의 몽환적인 느낌에 캐치한 신스 사운드가 곁들여져 신비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 현실이 꿈같고 꿈이 현실 같아
이젠 도무지 알 수 없는걸
아직은 어두컴컴한 무대,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작게 노래하는 도입부가 흘러나왔다.
이 깔끔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 이건 분명.
‘……해온아!’
목소리만 듣고도 정체를 유추한 곽덕배가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무대에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멤버가 몸을 전부 감싸는, 얼굴과 몸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동시에 곽덕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노래 분위기가 그새 또 바뀐 건가?’
경쾌한 EDM 딥하우스 분위기로 변주되며, 몽환적이다 못해 섬찟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레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 Ddu Ddu Ru Ru
Ddu Ddu Ru Ru
동시에 무대에 선 두 명의 멤버가 듀엣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전신을 모두 덮을 정도로 길고 화려한 로브가 움직임마다 공중에 펄럭이며 유려한 선을 그렸다.
그뿐이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긴 스틱을 활용한 안무라서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보는 사람도 알 수 있었다.
‘마법, 마법 컨셉이구나!’
마법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신비로움과 경쾌함, 두려움과 설렘 같은 복합적인 느낌이 모두 녹아들어 있는 편곡이었다.
심지어 듀엣 안무는 합이 중요한 법인데, 빠르게 쪼개는 박자 속에서도 둘의 합이 척척 맞아 들었다.
보는 사람이 짜릿해질 정도로.
순간 격한 안무 탓에 둘의 머리에 씐 로브의 모자가 거의 동시에 벗겨졌다.
라이트온의 댄스 라인인 류인과 차윤재, 둘의 손에 쥐어져 있던 금빛 스틱.
그러니까 매직 완드가 맞닿은 순간-
화르륵!
완드의 윗부분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그냥 녹화 현장에서 기절한 오타쿠 타이틀 달아보렵니다.’
곽덕배는 머릿속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류인은 씨익, 미소 짓더니 망설임 없이 불붙은 완드를 옆으로 던졌다.
휘리릭, 탁!
그리고 그것을 사이드 무대에 있던 최승하가 웃는 얼굴로 가볍게 낚아채며 자연스럽게 무대가 연결됐다.
‘어떡해. 애들 무대 너무 잘 써.’
무대에 100% 몰입한 곽덕배는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 널 볼 수 있는 Dream Dream Dream
깨고 싶지 않은 Dream Dream Dream
무대가 총 3개인 세트장답게 최승하는 완드를 잡자마자 중앙 무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불까지 붙은 기다란 완드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최승하의 모습에 객석에서 비명 같은 함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최승하는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큰 보폭으로 빠르게 중앙 무대로 향했다.
정신 나간 연출에 혼이 반쯤 빠져 있던 곽덕배는 조명이 켜진 중앙 무대 위에 선 멤버들을 마주하자마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의상이, X발.’
마치 마법학교의 교복 같은 생김새였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 의상에 케이프, 그리고 밑단 등을 장식하고 있는 금빛 자수까지.
어느새 중앙 무대에 당도한 최승하가 남색 로브를 벗어 던지며 군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들은 고난이도 동작을 이어갔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무가 맞아 들어갔다.
‘연습,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곽덕배는 여러 아이돌을 봐왔지만, ……이렇게 고난이도의 군무를 마치 한 몸이 된 듯 소화하는 광경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은 동작이어도 단체 군무는 조금씩 어긋나는 법이니까.’
그들의 합이 맞을 때마다, 곽덕배도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
그 순간, 곽덕배의 눈이 커다래졌다.
- 시간이 됐어 눈을 감아 너를 그려
성해온의 파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허공에 손을 뻗은 성해온의 청량한 목소리가 어우러지자, 말 그대로 귀가 녹는 기분이었다.
‘진짜 기절할 것 같다…….’
솔직히 오늘 가장 돋보이는 멤버를 꼽으라면, 성해온이다.
몽환 컨셉은 퍼포먼스도 중요하지만, 그에 맞는 보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웬만해선 소화해 내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성해온의 보컬은……
‘……솔직히 원곡보다 더 좋지 않나?’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보컬 멤버는 아주 귀해서, 얼굴이 아쉬운 경우가 태반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성해온은!
얼굴이 그럭저럭 괜찮다, 라는 정도를 넘어서 진짜 잘생겼다.
특유의 덤덤한 얼굴에, 독보적인 음색.
또 자연스럽게 주접으로 생각이 넘어간 곽덕배는 고개를 작게 털어냈다.
지금은 무대에 집중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원곡에선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며 꿈에서 그린다는 의미의 슬픈 느낌의 가사지만, 통통 튀는 신스 사운드가 곁들여진 경쾌한 멜로디로 편곡한 덕분에 완전히 다른 느낌이 되었다.
듣는 사람들도 마법 세계로 빨려들어 간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신비로웠고, 또 경쾌했다.
‘……어떻게 이 노래가, 이렇게 신날 수가 있지?’
그러면서도 원곡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아예 잃은 건 아니었다.
베이스로 낮게 깔려 있는 한 스푼의 몽환 덕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제대로 났다.
는 계속되는 고음으로도 유명한 곡, 성해온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한다.
‘……오히려 원곡보다 더.’
곽덕배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무대에 집중했다.
- 내 하늘엔 너만이 Shining light
성해온의 쭉 뻗은 고음을 신유하가 자연스레 이어받는다.
- 내 세계 속엔 너만이 Shining dream n dreaming
둘은 등을 맞댄 채 목소리의 합을 맞춘다.
‘보컬 라인 미쳤냐.’
그리고 파트가 끝남과 동시에, 둘은 등을 맞댄 채로 각자 손을 폈다.
파아앗-!
그 순간, 그들의 손에서 각각 하얀 장미 꽃잎과 붉은 장미 꽃잎이 가득 휘날렸다.
무대에 바람 효과를 주는 장치를 설치한 건지, 꽃잎은 정말 드라마틱할 정도로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무대 암전.
“…….”
곽덕배는 실시간으로 본인의 이마를 퍼버벅, 때렸다.
경쾌했던 멜로디는 후렴구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주된다.
몽환의 비중이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 내 세계 속 유일한 등장인물은 너야 Dream Dream Dream
류인의 매력적인 중저음은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바로 그때.
중앙 무대에 위치한 거대한 전광판이 켜진다.
사아아아-
어두운 무대 위, 오로라가 세상을 뒤엎을 듯 쏟아내리니 가히 황홀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얽히고설킨 그림자.
……멤버들이었다.
아득할 정도로 어두운 공간 속에서 별빛을 가득 담은 오로라만이 홀로 빛을 뿜어내니, 그 아래에 있는 이들은 그저 검은 인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다.
그리고 다시금 태엽이 돌아가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가 노래에 섞여들기 시작했다.
- Ddu Ddu Ru Ru
Ddu Ddu Ru Ru
분명 1절에선 밝은 분위기를 내던 이 가사가, 이번엔 어둡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두웠던 무대에, 드디어 푸른색의 스포트라이트가 옅게 들어왔다.
멤버들은 기괴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데 뭉쳐 있었다.
‘……얼굴도 안 보여.’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얽혀 있는 팔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아, 원곡의 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왔구나.’
바로 그 순간, 관객석에 있던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
천장에서 조명을 쐈는지, 뭔지는 몰라도 멤버들이 얽혀 있는 무대 바닥에 거대한, 정말 거대한 보랏빛의 마법진이 펼쳐진 거다.
슈우우-
멤버들을 뒤덮은 마법진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마법이 시작되거나, 아니면 끝나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차윤재가 그 사이에서 고개를 든다.
아까까진 분명 즐거운 소년의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텅 빈 얼굴로 마지막 파트를 소화한다.
- 널 볼 수 있는 Dream Dream Dream
깨고 싶지 않은 Dream Dream Dream
뚝.
음악이 끊김과 조명은 다시금 암전되었고, 동시에 스튜디오를 뚫을 기세로 함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와, 아아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