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60화
“……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되묻는 물음에 제작진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자기네들이 생각해도 조금 어이없겠지.
오늘은 2차 경연의 주제를 듣는 날이다.
소속사로 찾아와 촬영한다기에 약간의 쎄함을 느꼈으나, 1차 경연에서 트레이드로 출연자들에게 엿을 먹인 만큼 이번에는 정상적인 주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이 프로그램 시즌 1은 정상적인 주제만 하기도 했었고.
……트레이드와 빌어먹을 가챠 같은 거 없이 말이다!
“여기서 하나를 뽑아주시면 됩니다!”
우리가 멍한 얼굴을 하니, 막내 정도로 보이는 제작진 하나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통을 내밀었다.
스으윽-
통에는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등등 색색의 기다란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때 한수현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제 봐도 놀라운 아이돌 자아였다.
“이 종이에 각기 다른 곡이 적혀 있고, 그대로 2차 경연을 준비하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여기 종이엔 다 다른 곡들이 적혀 있어요.”
사아아아-
확인 사살에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카메라를 흘겨보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한 어투로 멘트를 쳤다.
아마 이런 반응을 바라는 거겠지.
“하하, 긴, 긴장되는데요.”
내가 멤버들을 힐끗 쳐다보자 멤버들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겼다.
나는 싱긋 웃으며 속으로 말을 쏟아냈다.
‘위대하신 선생님들, 무슨 색이 나아 보이시나요?’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필요할 때만 찾냐고 깐족거립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유심히 내려다봅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분홍색을 지정합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나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는 통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주변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몇 멤버들은 아예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종이를 하나 뽑았다.
작가가 스케치북을 들었다.
[왜 그 종이를 뽑았는지 멘트]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자는 핑크죠.”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의 선택에 흡족해합니다!]
내 말에 멤버들은 물론, 제작진들도 웃음이 터졌다.
“맞아요~ 저희는! 핑크죠!”
최승하가 한마디 거들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보자.”
나는 류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종이를 열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시 접었다.
착! 착! 착!
“……?”
“뭐야, 형. 왜 접어요!”
“……안에 뭐라고 써 있는데요?”
“궁금합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보채는 멤버들 사이에서 나는 웃는 낯짝으로 욕을 짓씹었다.
이런 정신 나간 성좌 같으니라고.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당신의 막말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진짜 재수 없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합니다!]
사라져라, 스팸 메시지.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뒷목을 부여잡습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200골드를 후원합니다!]
쯧, 골드는 받아주지.
“……형, 뭐 나왔는지 얼른 봐봐요. 궁금하다!”
다들 카메라를 의식해 웃고 있지만 내 반응을 보고 X됐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동시에 카메라가 이 장면을 찍으려는 듯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들어왔다.
“……어, 어!”
“……어. 아~ 아, 아아. 오.”
애써 웃으며 입을 벙긋대는 멤버들의 얼굴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
우리가 뽑은 건…….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뽑은 건 혼자였다고 정정합니다!]
그래. X발, 내가 뽑은 건.
이 노래의 원곡자는 에스더블비.
SBB, 참고로 Sexy Bomb Boys의 약자다.
정신 나간 그룹명만 봐도 느껴지지만, 이 그룹은 육체의 섹시미를 추구하는…….
에스더블비의 노래 중에서도 극강의 섹시를 자랑하는 곡이다.
단언컨대 최악을 뽑아버린 거다.
블랙보이즈라면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만, 우린 아니다.
……정말 주인을 잘 못 찾아온 곡이다.
종이 속에 적혀진 제목을 본 멤버들의 안색이 볼만했다.
“저흰 이제 철수하겠습니다. 며칠 뒤에 또 보겠지만요. 허허.”
나는 당장에라도 남은 종이 다 까뒤집어 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걸 애써 눌렀다.
저 종이들에 다 똑같은 곡 적어놨을지 누가 알아.
촬영팀이 떠나고, 회의실에 남은 멤버들의 얼굴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거 음악 방송에서 나오면 안 되지 않아요?”
최승하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우린 지금 무대 영상을 보고 있다.
“유두 한쪽은 될걸. 두 쪽은 심의에 걸려.”
내가 곧바로 대답하자, 최승하가 처음 아는 사실이라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뭐 그런 요상한 심의가, 그나저나 형은 그런 걸 어떻게?”
최승하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화면 속 남성들은 정말 헐벗고 있었다.
어느 정도 헐벗고 있냐 하면, 바지만 입고 상체는 그냥 벗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 달빛이 서린 밤
moon light its alright
- 하나 되는 그 순간
turn off the light
- 더 깊이 더 깊이
그럴수록 널 더 원하게 돼
……가사만 봐도 절로 아득해졌다.
편곡을 할 때도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 한다.
아예 대놓고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1차 경연 도 신비롭고 유쾌한 분위기를 섞었지만, 기본적으로 원곡의 몽환 베이스를 깔고 간 것처럼.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으음, 저희가 이런 섹시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안 어울려요. 저희랑.”
“사실 저희가 이런 안무 추는 게, 상상이 잘…….”
차윤재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나조차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무대도 좀 볼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1시간 뒤, 멤버들의 낯짝이 더 흐려졌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겠는 한숨이 연이어 들려왔다.
약간의 섹시면 모르겠으나, 정말 대놓고 육체적인 어필을 하는 분위기의 노래다.
이런 육체적인 어필은 일단 다부진 몸도 중요하다.
블랙보이즈처럼 근육질이거나, 누구 하나 복근을 대놓고 까야 하는…….
음. 까야 한다면, 아무래도?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양심을 챙기라고 전해줍니다!]
“뭐야, 형 눈빛이 이상해요!”
“……해온아, 나한테 할 말 있어?”
둘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온갖 욕망이 타오르는 것 같은 무대를 저희가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요.”
차윤재의 중얼거림을 듣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욕망?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인 키워드에 나는 널브러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물론 멤버들에겐 입도 벙끗하지 않았지만.
* * *
다음 날, 곧바로 강찬혁의 작업실을 찾았다.
물론 혼자.
멤버들에겐 그냥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프로듀서님!”
“아, 해온 씨. 오셨어요!”
“ 편곡 너무 좋았습니다.”
“……아닙니다. 가수분이 소화를 잘하신 거죠.”
나는 강찬혁의 눈을 마주치며 확신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좋았어요. 저희 가장 인지도 없는 거 아시죠? 근데도 현장 투표 1위 했어요. 물론 저희도 노력했지만, 곡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현장 투표 1위는 팬덤들의 물밑 기 싸움으로 얻은 어부지리에 가깝지만, 굳이 덧붙일 생각은 없었다.
내가 강찬혁에게 한 말은 전부 진심이니까.
“……쑥스럽습니다. 말씀 고맙게 받을게요.”
머쓱한 얼굴로 연신 볼을 긁적이던 강찬혁이 말을 이었다.
“해온 씨가 찾아온 거면, 음. 혹시 다음 곡이 정해진 건가요?”
- 다음 곡은 아마 자율일까요? 라이트온 분들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생각해 둔 곡들이 있는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해맑게 말하던 정재진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양심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강찬혁이 기대하고 있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입니다.”
터어엉-!
데구르르르르…….
강찬혁 손에 들려 있던 텀블러가 바닥으로 장렬히 낙하했다.
“예?”
그은 눈을 홉뜬 채 되물었다.
아마 본인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에스더블비 선배님의 를 하게 됐습-”
“……대체 왜?”
무의식에 내 말을 끊어먹을 정도로 황당한 얼굴이었다.
“저희가 뽑은 게 아니고…… 랜덤이었습니다.”
“어, 허어, 음……. 잠시만 그 노래 좀 들어보겠습니다.”
10분쯤 지났을까, 헤드폰을 벗은 강찬혁이 말했다.
“들은 지 오래된 노래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 노래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이트온과는 어울리지 않는 곡입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음, 이걸 대체 어떻게 편곡해야 할지.”
“저한테 생각이 있는데, 들어봐 주시겠어요?”
내 말을 들은 정재진의 눈에 일순간 이채가 돌았다.
“……금욕적인 분위기로 편곡이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강찬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니,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생각한 게 하나 더 있는데-”
속닥속닥속닥…….
끄덕! 끄덕! 끄덕
내 말을 듣는 강찬혁이 연신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이건 조금 양심에 찔리는데 역시 편곡 전에 말해야지.
“퍼포먼스 포인트로 이런 부분이 들어갔으면 하거든요.”
내 말에 강찬혁이 눈을 빛냈다.
“어떤……?”
양심이 찔리는 이유는, 나는 절대 하지 않을 파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은 그런 거 좋아하신다. 지금도 오타쿠 자아가 박수를 치고 있으니까.
아무나 두 놈 골라잡아서 시켜야지.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의 뻔뻔함에 찬사를 보냅니다!]
“아, 프로듀서님.”
“네?”
“멤버들에게 이 컨셉, 제가 냈다는 걸 숨겨주시겠어요? 음, 아예 오늘 제가 여기 왔다는 걸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실지.”
혹시라도 내게 그 파트가 오게 될 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거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 아니, 해온 씨 아이디어인데 어떻게 이걸 비밀로…….”
……음.
할 말이 없군.
나는 강찬혁과 눈을 마주치며 신뢰의 눈길을 보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저거 완전 사기꾼 다 됐다며 혀를 찹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1회 본방 날이 찾아왔다.
선공개 영상으로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는지, 반응이 이전 시즌보다 핫했다.
- 오늘 TTT 무조건 본다
└ 안 본다며! 안 본다며!
└ 그러려고 했는데 이건 어쩔 수가 없음 ㅅㅂ
- 러쉬 무대 오늘 하나?
└ 3번째 무대였다니까 오늘 나오지 않을까
실시간 트렌드에 올라갈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요즘 굵직한 팬덤을 가지고 있는 그룹은 대부분 공백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침 무료하던 차에 이런 프로그램이 나와주니 다들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출연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돌을 좋아한다면 재밌을 수밖에 없는 주제니까.
살랑-
옥상 벤치에 앉아 있으니 머리칼이 바람에 기분 좋게 흩날렸다.
“음.”
욕먹기 딱 좋은 날이군.
그때 최승하가 옥상 문을 벌컥 열고 다가왔다.
“형! 어디 갔나 했네! 희승 쌤이 형 당장 데려오라고…….”
쯧…….
“지금 얼굴이 무서워요!”
“잘못 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