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61화
연습실에서 실컷 굴려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본방송 10분 전이었다.
우린 태블릿 PC를 앞에 놓고 연습실에 둘러앉았다.
숙소에 들어가서 TV로 시청할 시간은 없었다. 오늘도 아마 새벽까지 연습하게 될 예정이니까.
“오늘은 욕을 얼마나 먹을까요.”
한수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자, 최승하가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밝게 웃었다.
“으음. 아무렴 어때~ 우리 무대 잘하고, 현장 팬 투표 1등도 했잖아!”
현장 투표 1등, 이 프레임이 멤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임은 확실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저는 예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나도. 음, 난 마지막까지 우리가 6등일 줄 알았어.”
팬덤끼리의 진흙탕 싸움에서 어쩌다 얻은 수혜였다는 건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군.
뭐, 저놈들이 좋아하니 된 건가.
“시작한다!”
웅장한 로고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시즌 1 출연자들의 무대를 짧게 보여준다.
그리고 MC의 오프닝 멘트.
나는 계속해서 SNS 반응을 모니터링했다.
- 시작한다 시작해
- 오 뭔가 공들인 느낌인데
오프닝 멘트가 끝난 뒤, 각 출연진이 차례로 등장한다.
전광판에 웅장한 그룹 로고가 뜸과 동시에 자동문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출연진이 걸어 나오는 형태였다.
첫 등장은, 트웰브였다.
- 와 트웰브가 첫 등장? 뒤에 누구 나오길래
- 라인업 지렸다 트웰브가 1등 먹자
- 솔직히 트웰브 실력으로 이길 그룹 있나? ㅎ
원래 첫 등장도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그룹이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채널 이동을 안 하니까.
이어서 스피디, 블랙보이즈, 올타임이 등장한 뒤 다섯 번째 순서는 러쉬였다.
러쉬 팬들은 당연히 러쉬가 마지막 입장인 줄 알았는지, 대체로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 아니 러쉬가 마지막이 아냐?
- 잠만 그럼 마지막이 ㅋㅋㅋㅋㅋㅋㅋ
- 그 와중에 애기들 긴장했어
- 겸손한 것 봐 인사 90도로 한다 ㅋㅋㅋㅋㅋ ㄱㅇㅇ
- 아ㅅㅂ 그럼 설마 마지막 입장이 걔네야?
└ 맞는 듯 ㅋㅋㅋㅋㅋ ㅋㅋ 윾하 있는 그룹~^^
와중에 선공개 영상이나 기사 따위 미리 보지 않았던 시청자들은 잔뜩 기대를 품고 있었다.
- 마지막 누군지 궁금하다
- 이번 TTT 라인업 좋네?!?!
- 왜 내가 떨림ㅋㅋㅋ
- 얼른 마지막 그룹 알려주세요 얼른 얼른
……기대 안 하시는 게 좋으실 텐데.
반응을 서치해 볼수록 점점 숙연해졌다.
와중에 빌어먹을 방송국 놈들이 편집으로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 과연 의 대미를 장식해 줄, 마지막 그룹은? ]
이딴 자막과 함께 곧 열릴 전광판을 비춰준 뒤, 빈 좌석과 다섯 팀의 긴장한 얼굴까지 차례로 야무지게 담기 시작했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심각한 분위기의 효과음은 당연히 동반되고 있었다.
정말 사악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전광판에 우리 그룹을 상징하는 로고가 큰 효과음과 함께 나옴과 동시에, 전광판이 갈라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라이트온의 로고를 블러 처리했다는 것이다.
미친놈들, 정말 질린다.
카메라 앵글은 우리의 다리부터 얼굴로 천천히 올라온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출연진들의 떨떠름한 얼굴, 당황스러운 얼굴을 겹쳐서 내보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편집이 제대로 들어가는군.’
이런 프로그램은 팬들이 과몰입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프로그램으로, 안 그래도 망돌이 껴서 언짢은데 이런 모먼트까지 나온다?
- 마지막 등장이 ㅋㅋㅋㅋㅋㅋ
- 다른 그룹 의문의 어리둥절행
- 얘네 낀 것도 어이없는데 왜 마지막이기까지 함? Nnet이랑 뭐 있어?
- 뻔뻔함 레전드 ㅎㅎ
- 와 근데 진짜 잘생기긴 했네 얼굴은
└ ㅇㅈ 얼굴은 한 명도 안 빠진다
이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라이트온 팬덤은 힘을 내고 있었다.
눈물 나는 포인트는, 그 아무도 ‘1등 하자!’라는 소리를 안 한다는 점이다.
‘정말 현실적이시군…….’
- 저 얼굴 무료로 봐도 되는 건가요? 저 돈 낼게요
- 얘들아 응원할게! (사진)
- 핏 되는 바지 진짜 개ㅐ개개개개ㅐ좋다
- 애들 진짜 긴장했나 봐 어색해 걸음걸이가 ㅋㅋㅋㅋㅋㅋ
- 너무 행복하다 매주 라이트온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여섯 그룹이 모두 자리에 앉자, 전체적으로 긴장감 넘치는 효과음이 깔리며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와 이전 시즌의 자기 PR 무대가 송출됐다.
[ 하진) 이번 시즌은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한! 여러분의 눈과 귀를 모두 충족시킬 무대를 위하여! 다음 무대에서 빛나는 여섯 그룹을 볼 수 있게끔 구성하였습니다! ]
- 엥 뭐야 이번엔 자기 PR 없음?
- 뭐임 기대했는디
- 그냥 바로 경연이야? 어쩐지 녹화 일정 늦더라
[ 하진) 녹화 전, 저희는 각 그룹의 리더에게 다음 라운드에 공연할 곡을 적어내라고 전달했는데요! 그룹 멤버들과 상의를 해서 경연곡을 결정하셨을 겁니다! ]
멘트와 동시에 여섯 그룹의 리더 인터뷰가 짧게 송출됐다.
[ 성해온) 네. <삐이이->는 저희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곡이니까요. ]
뒤에 말했던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준 뜻깊은 데뷔곡이니 뭐니 입을 턴 건, 스포일러 요소가 될까 봐 자른 모양이다.
“……형 저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저거 아무리 봐도 가짜 성해온이다! 진짜 성해온 데려와!”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화들짝 놀랍니다!]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저 인간은 신기가 있는 거냐고 묻습니다!]
장난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나도 놀랐다.
내가 대답이 없자 최승하가 곧바로 생글 웃었다.
“미안합니다!”
……화면에나 집중하도록 하자.
이제는 <친해지길 바래> 부분이 나오고 있었다.
[ 클락션) 잘생겼잖아요. ]
- 아 클락션 씨 참안목 인정합니다
- 스피디 갑자기 급호감
- 나라도 라이트온 얼굴 보면 친해지고 싶음
- 윙크 날리는 거 ㅈㄴ 웃김 아 ㅠㅠㅠ 저희 애들 잘생기긴 했죠
카메라는 라이트온과 스피디를 번갈아 잡아주던 순간-
[ 도진) 저희 이의 있습니다. ]
트웰브의 리더가 내뱉은 여덟 글자를 세 번이나 반복 편집하면서, 우리의 놀란 얼굴, 다른 그룹의 놀란 얼굴, 마지막으로 트웰브의 결연한 얼굴이 나왔다.
- 뭔데 라이트온 나 모르는 새에 인기짱 먹은 거임?
- 저 조합 저는 찬성합니다
이어서 무대에 두 그룹의 리더인 도진과 클락션이 서 있고, 내가 뒤에서 고민하는 듯한 장면이 나왔다.
- 성해온 얼굴 극락 오늘 코디 미쳤음 ㅈㄴ 잘 어울림
- 두 리더분들도 귀여우시다
내가 뒤에서 갈팡질팡하자 출연진들의 긴장하는 얼굴이 연이어 편집되어 나오며 쓸데없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덥석!
꽤 가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트웰브를 선택하자 주변에서 호응 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연달아 클락션의 애드립과, 트웰브와 라이트온의 하트 교환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1차 경연 무대 녹화에 참여했던 팬들이 올린 스포성 짙은 글을 본 사람들은 벌써 눈치를 챈 것 같다.
- 아 설마 친해지길 바래 저거 이어진 대로 곡 바꾼 거임? 라이트온이 트웰브 노래 하고 트웰브가 라이트온 노래 했잖아
- 진짜 씹ㅋㅋㅋㅋㅋㅋㅋㅋ Nnet 진짜 하는 짓 짜증 남
예상대로 SNS는 뒤집혔다.
물론 대부분 트웰브 팬들의 욕이었다.
- 저 망곡을 적어 냈다고? 진짜 지들이 하려고?
└ 알고 있던 거 아님? 저 정도면ㅋㅋㅋ
- ㅌㅇㅂ무대 생각보다 구리다는 평 많길래 의아했는데 쟤네 때문이었누 ㅋㅋ
- 진짜 사사건건 거슬린다
└ 내 말이~ ㅅㅂㅋㅋㅋ 불쌍한 ㅌㅇㅂ만 손해 보네
- 블보 대표곡을 왜 스ㅍ디가 했나 했더니 이거였냐 미친 개빡쳐 엔넷 놈들아ㅅㅂ
나는 덤덤한 얼굴로 스크롤을 내렸다.
멤버들이 SNS를 즐겨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하진) 그리고 이번 시즌은 전과 다른 색다름을 부여합니다! ]
진행자의 알 수 없는 멘트와 함께 당혹스러움이 깃든 출연진들의 얼빠진 면면들이 연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 진짜 벌써 나 뒷골 땡겨 미친놈들아
- 캬아아아악 이 또라이 새끼들아
- 여기서 뒤통수를 탁 치네 ㅋㅋㅋ
[ 하진) 친해지길 바래의 첫 번째 프로젝트! 곡 트레이드! ]
출연진들의 넋 나간 얼굴들을 본 팬들이 분기탱천하기 시작했다.
- 열 받아서 쓰러짐 ㅅㅂ
- 아악 대표곡 적어서 낸 애들은 뭐가 되냐고 진짜 미친놈들아
- 이럴 꼬라지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본방을 챙겨본 내가 레전드다 레전드
- 진짜 불쌍해서 어떡함…?
곧이어 MC가 각 그룹이 써서 냈던 곡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다섯 그룹의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곡명 발표를 지나서 마침내 우리 차례였다.
정신 나간 미친놈들이 또 긴장감 넘치는 BGM을 깔았다.
방송국 놈들 내가 언젠간 가만 안 둘 것이다.
[ 하진) 마지막으로, 라이트온! ……! ]
“…….”
MC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내 개인 인터뷰로 연결됐다.
작가의 질문에 내가 잔뜩 아련한 얼굴을 걸치더니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 성해온) 네. 는 저희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곡이니까요. 저희를 팬분들과 만나게 해주고, 저희가 라이트온으로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준 뜻깊은 데뷔곡이에요. ……비록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 곡으로 첫 문을 열고 싶었습니다. ]
의외였던 점은, 그냥 욕을 바가지로 먹게 둘 줄 알았는데 내가 했던 인터뷰를 그대로 살려줬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양심, 뭐 그런 건가. 쯧.
이 인터뷰로 욕은 확실히 덜 먹겠군.
모르긴 몰라도 우리도 피해자처럼 나왔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렇게 되면 트웰브 팬덤도 막무가내로 비난하긴 힘들어지거든.
안도감이 뒤섞인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
눈을 빙글 돌리니, 입을 달싹거리던 차윤재가 말문을 열었다.
“……그때 그렇게 말을 막 해서 죄송합니다. 형님이 저런 마음으로 선택하신 줄도 모르고…….”
빌어먹을.
사과하지 말라고.
스스슥-
기분 나쁜 시선들이 점점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건 그냥 욕을 덜 먹기 위한 인터뷰였을 뿐.
하지만 이걸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문 채 화면이나 바라보고 있었는데, 최승하가 내 허리춤을 껴안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엉엉, 형!”
“떨어져.”
“넵!”
최승하가 곧바로 팔을 쑥 뺐다.
차윤재와 최승하를 제외하고도, 멤버들이 이쪽을 힐끗대고 있었다.
내가 어색하니 뭐라 말은 못 하고 있지만, 의외라는 얼굴들이었다.
“저거 대본이다.”
“형님, 저희도 형님과 같은, 아니, 비슷한…… 그 곡을 좋아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소중한 데뷔곡인 건 사실입니다.”
X발…….
여기에 더 있다가는 정말 으라차차를 사랑하는 정신 나간 놈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형 쑥스러워서 도망간다!”
진짜 열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