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70화
1차 경연 순위는 무려 4위.
이 쟁쟁한 그룹 사이에서 우리로선 기적에 가까운 결과다.
동영상 점수로는 2위, 팬덤의 물밑 암투가 담긴 현장 투표에선 1위를 차지했지만 역시나 국내외 팬 투표 점수에서 처참하게 밀렸다.
아마 둘 다 꼴등이었던 것 같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야 예상했으니까.
그나마 동영상 점수와 현장 투표 점수가 선방해 준 덕에 4위에 랭크할 수 있었다.
“와~ 저 진짜 놀랐어요.”
“……나도.”
“뭔가 피곤한 게 사라진 것 같아.”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결과입니다……!”
“겨우 4위 한 거 가지고 뭘 이렇게 좋아하시는지.”
한수현의 말에 차윤재가 눈을 부릅떴다.
휘이잉-
이미 한수현은 미련 없이 대기실로 들어간 상태, 복도에 남겨진 차윤재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어떻게 저, 저런……!”
최승하가 벙글 웃으며 차윤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4위면 대단한 거 맞지~ 우린 6위일 줄 알았잖아.”
그렇다.
이놈들은 며칠 전부터 ‘6등 해도 기죽지 말자!’라느니, ‘즐기면 되는 거다!’라느니 면역을 기르기까지 했으니까.
……다른 그룹이었으면 고작 4위에 이렇게 기뻐하지 않을 텐데.
나는 조금 아쉽긴 했다.
총 50%를 차지하는 국내외 투표는 기대도 안 했지만, 동영상 점수와 현장 투표 성적이 최상위권이라서 3등 정도는 기대해 봐도 되겠다 싶었거든.
녹화가 시작되기 전, 대기실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자 녹화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저 인간들 중 너희를 좋아하는 인간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합니다!]
……뜬금없이?
팬덤당 50명 정도 입장하니, 300명 중 50명 정도는 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겠군.
[일부 성좌가 속닥댑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시스템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이 현장에 있는 인간들의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Loading…….]
[수집 완료!]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곧장 창이 떠올랐다.
특급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스타성을 입증하라]
모두의 시선을 이끌고 주목을 받는 것!
그게 스타성의 첫걸음이 아닐까요?
이곳에 있는 인간들을 라이트온에 입덕시켜 보세요!
(※ 기존 팬은 카운팅되지 않습니다!)
기간 - ???
달성 보상 ▶ 변심한 팬의 수에 따라 변동
“……?”
초 단위로 떠오른 메시지들과 퀘스트창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음.”
해당 퀘스트의 요지는 오늘 녹화에 참여한 타 팬덤의 파이를 뺏으라는 것, 사실상 별 가망이 없는 퀘스트다.
우선 대상이 되는 인원부터가 극히 한정적이다.
‘라이트온 팬덤을 제외하면 250명 남짓.’
이런 녹화에 참여할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고인물에 가까운 사람들일 테다.
한마디로 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헤비 팬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
꾹.
이성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YES]를 선택했다.
‘어차피 퀘스트는 페널티도 없다.’
뭐, 큰 기대는 안 된다만 받아놔서 나쁠 건 없지.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렸다.
* * *
입장 대기열에 서 있는 곽덕배가 현기증을 느꼈다.
‘내가 또 여기에 걸어 들어오다니.’
사실 어떻게 보면 행운이기도 하다.
팬덤당 50명이라는 각박한 인원 제한 때문에 다른 쪽은 골머리를 썩이던데, 라이트온 팬덤은 그럴 일이 없거든.
스윽-
곽덕배는 손에 들린 얇은 스틱을 내려다봤다.
이 급조한 느낌 나는 야광 스틱, 첫 주 사녹에 참가한 팬들에게만 나눠준 굿즈다.
참고로 라이트온은 한줌판이기 때문에 사녹에 참가할 정도의 고인물들은 거기서 거기다.
고로 이 스틱을 받은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에, 자신은 맘만 먹으면 참여할 수 있었다.
“방송 출연 동의서랑 비밀 유지 서약서 작성하고 입장하실게요!”
슥슥!
저번엔 끝 무렵에 해서 퇴장 줄 혼란스럽게 하더니, 이번엔 발전했군.
동의와 서약을 마친 곽덕배는 스튜디오에 발을 내디뎠다.
‘저 사람은 또 왔네.’
저번 무대 때도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인데, 이번엔 바로 옆에 서 있다.
얼굴이 낯익지 않은 걸로 봐선 뉴빈가.
한편, 곽덕배의 옆에 서 있는 여성의 본계 닉네임은 근돌.
참고로 근육 처돌이의 줄임말이다.
라이트온과는 어울리지 않는 닉네임 아닌가.
그렇다…….
근돌은 사실 블랙보이즈의 팬인 것이다.
그런 근돌이 어떻게 라이트온 팬덤석에 있냐고?
그거야 간단하다!
근돌은 어떻게든 녹화에 참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온 천지를 뒤져 이 막대 쪼가리를 샀다.
단가는 이천 원도 안 할 것 같은 이 허접한 막대를!
……수십만 원의 프리미엄을 붙여 구매했단 말이다!
꽈아악-!
근돌은 싸구려 스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위장으로 들어온 만큼 철저하게 라이트온 팬인 척, 블랙보이즈 무대엔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물론 투표는 블랙보이즈에 했지만!’
요즘 그런 근돌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블랙보이즈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인 라이트온, 자신은 요 근래 그 녀석들에게 끌리고 있었다.
U앱 정주행은 물론, 유O브 영상도 거의 격파했지만 본인은 격렬하게 부정 중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냥 심심해서 본 거라고?’
그런 근돌의 상념을 깨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촬영 시작합니다~ 마스크로 얼굴 가리지 마세요~ 슬로건으로 슬쩍 가리지도 마시고요~ 그리고 카메라 걸리면 그 팬덤 싹 다 퇴장입니다~!”
* * *
녹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우린 착실하게 대기실에 착석했다.
촬영 전, 제작진으로부터 PPL 상품을 접하는 모션을 자연스레 취해달라는 지령을 받았다.
하라면 해야 하니, 긴장되는 얼굴로 맛대가리 없는 그 비타민 음료의 뚜껑을 따 벌컥 들이켰다.
안 팔려서 PPL로 내놓은 게 틀림없는 맛이었다.
“와 첫 무대……!”
최승하가 주먹을 꼭 쥐고 긴장되는 얼굴을 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로 표정 연기를 아주 잘하고 있다.
첫 무대는 러쉬다.
저번 촬영 때 나는 러쉬에게 다섯 번째 무대를 주려고 했다.
신유하 악편 때문에 여론이 영 좋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먼저 친한 척을 해주는 게 아닌가.
신유하의 표정 관리와 멘트도 나름 훌륭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래서 그냥 순진한 낯짝을 걸치고 데뷔 연차순으로 정렬해 버렸다.
- 와하하! 클락션 씨의 염원대로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공정한 데뷔 연차로 줄 세우기입니다!
- 저 클락션은, 세상이 정의롭다는 걸 느낍니다.
- 데뷔 연차가 가장 고참인 클락션이 다섯 번째 무대를 차지합니다~ 러쉬 분들은 아쉽겠는걸요?
MC가 재치 있게 멘트를 받아주고, 당황한 얼굴의 러쉬에게 질문을 던져주기까지 했다.
그때 걔네가 뭐라고 했더라. 아, 친한 사이라는 걸 어필하며 원래 마지막이 아니면 시작을 열고 싶었는데 유하가 내 마음을 알아줬네 마네 했던 것 같다.
러쉬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데뷔 연차는 적기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선배 그룹 사이에서 불만을 드러낼 수 있을 리 없지.
그쪽 팬덤도 우리가 영 재수 없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뭐라 말을 얹을 수는 없을 거다.
러쉬 리더가 신유하랑 친한 사이라고 직접 언급까지 했는데, 거기서 무어라 꼬투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억지로 얼굴을 관리하지 않아도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때 러쉬 놈들 얼굴이 참 볼만했지.
MC가 첫 무대 시작 전, 멘트를 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신유하를 바라봤다.
러쉬 무대 부분에서 이 녀석의 반응이 리액션 컷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따로 불러서 말을 꺼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기에 걱정했는데, 나름 표정 관리를 잘하는군.
나는 곧장 고개를 바로 하며 안구에 생기를 걸쳤다.
리액션 해야지…….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네 번째 무대 직전이었다.
눈앞의 스케치북을 든 작가가 시킨 대로 차윤재가 벌떡 일어나며 어색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다들 칼 가신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차 경연은 갑작스러운 트레이드였기에 다들 기량을 뽐내지 못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무대 소품이나 편곡 등 전반적인 무대 퀄리티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의 화제성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각 소속사 입장에서도 돈을 투자하는 게 아깝지 않을 테니 당연한 결과물인가.
* * *
같은 시각, 곽덕배는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안 나오지?’
이제 다섯 번째 무대인데, 지금 무대 위엔 스피디가 올라와 있다.
……우리 애들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무대 순서는 연차순인 것 같은데.
그 논리대로라면 첫 무대는 라이트온이 했었어야 하는데, 마지막?
무대 아래에서도 수군거림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1차 경연 때의 현장 투표로 다음 경연 순서를 정했다는 걸 알 턱 없는 팬들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무대가 라이트온이라니.
팬인 본인조차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니까.
‘Nnet, 드디어 정신 나간 건가?’
아니면 그 지독한 명훈이가 로비를?
곽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돈에 미친 새끼가 그럴 리 없지.’
스피디의 무대가 끝나고 MC가 무대에 올라왔다.
“여러분, 지치셨죠~”
한 무대가 끝나면 다음 무대를 위한 정비 시간이 꽤 소요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진이 팬들의 지루함을 달래러 올라온다.
마지막 무대가 라이트온이란 걸 안 팬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스태프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외쳤다.
“중간에 나가시면 불이익 있습니다~”
“…….”
그 불이익이 팬덤에게 적용될지, 무엇일지 알 수 없기에 나가려던 팬들은 동작을 멈춘 채 언제 나가려고 했냐는 듯 자리에 섰다.
지루한 정비가 끝나고, 드디어 촬영이 재개됐다.
“마지막 무대! 이전 무대에서 현장 투표 1위를 차지한 그룹이죠.”
MC의 멘트에 팬석 곳곳에서 ‘X발’ ‘미친’과 같은 욕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다들 눈치챈 거다.
물밑 암투로 던진 3표 중, 2표가 라이트온에게 갔구나!
그걸로 마지막 순서가 된 거구나!
곽덕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게 된 거였군~’
사실상 개이득이다. 하긴, 우리 쪽이 가장 만만하긴 하지.
잠깐만, 저 MC가 저 소리만 안 했어도 이번 팬 투표도 꽤나 짭짤했겠는걸.
곽덕배는 하진을 강렬하게 째려봤다.
‘이번엔 다들 알아버렸으니 글렀잖아…….’
둥- 두둥-
곧이어 긴장감이 감도는 효과음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고, 그 사이에 선 MC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별들의 전쟁, Top의 자리를 차지하라. 라이트온의 !”
잠시만, 문, 문라잇?
곡명을 들은 곽덕배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노래를 우리 애들이 한다고? 왜 이런 정신 나간 시련을?
탁-
무대가 진행되려는 듯 스튜디오가 암전됐고, 동시에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피아노의 서정적인 음률이 낮게 깔리더니, 소프라노의 높고 청명한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아아- 아아아-
‘이건 무슨 분위기지?’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려 버렸다.
‘……성가?’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멜로디였다.
어둑함도 잠시, 중앙 무대에 옅은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들어왔는데 그 아래엔 X발, 천사가 있었다.
‘……미쳤나?’
검은색의 단정한 사제 옷을 입은 한수현이 무릎을 꿇고 앉아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놓은 채 그 빛을 바라보던 한수현이 두 손을 곱게 포갠 채 기도하듯 눈을 감는다.
칠흑처럼 어두운 무대에서 돋보이는 한 줄기 빛, 그리고 그 아래 선 사제의 모습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아아- 아아-
음률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소프라노의 보이스 덕에, 성스러운 분위기가 끝내주게 연출되고 있었다.
무대에 온 신경을 집중한 곽덕배의 팔엔 어느새 소름이 돋아 있었다.
스튜디오 내의 모든 이들이 무대에 집중한 순간,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뎅- 데엥- 뎅-
경박스러운 종소리가 아닌, 거대한 종에서 나올 법한 웅장하고 느릿한 템포의 종소리.
빛 아래서 기도를 하던 한수현이 살며시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본다.
성스러움이 담겨 있던 느릿하고 서정적인 멜로디엔 강렬한 비트가 조금씩 섞이기 시작한다.
이제 무대가 시작될 거라는 듯이.
꿀꺽, 침을 삼킨 곽덕배가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사이드 무대에 밤하늘이 떠오르는 검보랏빛 조명이 켜졌다.
“……!!”
곽덕배는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벽 쪽에 상체를 나른하게 기대고 있는 인영은, 류인이었다.
어두운 공간 속, 채도가 낮은 자색 조명이 깜빡이며 아슬아슬하고도 위험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곽덕배의 동공이 점차 커졌다.
……이건, 뱀파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