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162화
정석적이지 않은 대형.
멤버들이 무대의 왼쪽 모서리에 모였고, 어두운 무대에 저채도의 붉은 조명이 들어왔다.
화르륵!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뒤섞이며 무대가 시작됐다.
대형의 뒤에 서 있던 최승하가 사이드플립을 응용한 듯한 동작을 사용해 멤버들을 넘어서며 크게 도약.
단숨에 무대 앞쪽으로 착지하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 FLAMMMM-E, MM
유니크한 톤의 파트와 함께 처음부터 몰아치듯 전개되는 고난도의 안무에 스튜디오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트랩비트가 뒤섞인 강렬한 힙합 베이스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위험한 분위기를 증폭시켰다.
그 와중에도 곽덕배의 시선은 자꾸만 성해온에게 꽂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잘생겨 보인다.
‘……헤메코가 잘 받는 건가?’
심지어 저 정신 나간 의상!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의상이 말려 올라가며 늑골이 다 보였다.
비겁하게 성공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고맙습니다…….’
의상을 기획했을 누군가에게 격렬한 감사 인사를 전한 곽덕배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무대를 응시했다.
그 순간, 팬들이 일시에 숨을 들이켰다.
류인이 안무 대형의 센터에 서며, 무대 앞쪽으로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 한계를 넘은 limitless
타오르는 mm-
이쯤 되니, 곽덕배의 머릿속에 강력한 의문이 들었다.
‘……공짜로 봐도 되는 걸까?’
류인의 가슴과 복근을 바로 앞에서 봐버린 곽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돈 내고 봐야 할 것 같지…….’
말문이 턱 막히는 흉부에 감탄도 잠시, 곽덕배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칼군무에 눈을 크게 떴다.
파워풀한 사운드에 상응하는 화려하고도 복잡한 퍼포먼스였다.
‘연습을 대체 얼마나 한 건데…….’
자잘하게 쪼개지는 동작들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마치 한 몸처럼 말이다.
두근, 두근, 두근.
그 와중에 곽덕배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제 곧 자신의 최애 파트가 나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뮤직비디오에서 성해온의 클로즈업과 동시에 수십 개의 모니터로 연결이 됐던, 바로 그 파트!
- 끝없는 unlimit frame
기형적인 구조로 뭉친 멤버들이 몸을 섞어 창살과도 비슷한 모양새를 만들어내고.
- 그 속에 갇힌 flame
……그 사이에 갇힌 성해온이 파트를 시작한 것이다!
‘무대 연출 무슨 일인데, X발~!’
감탄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갓연출이었다.
뮤직비디오에서 꽤 커다란 임팩트를 줬던 장면인데, 무대에서 이렇게 연계해 표현할 줄은 몰랐거든.
음악 방송 특성상, 연말 무대나 같이 스케일 큰 연출은 불가능함에도, 전혀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둥, 둥, 둥.
적당히 무게감 있는 드럼 사운드가 베이스에 깔리며, 곡의 분위기가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 드디어 마주친 경계선
break it, break it
파트와 동시에 전신을 쓰는 팝핀.
‘춤선 돌았나.’
온몸에 반동을 주는 고난도 동작을 자연스레 안무에 녹여낸 차윤재를 마주한 곽덕배가 속으로 물개박수를 쳤다.
-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flame
이제 겁날 리가 없지
사실 놀라운 건 이쪽이다.
곽덕배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수현이가, 원래 저렇게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나?’
쇼케이스때도 느꼈지만, 뭔가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느낌이다.
무대 소화력 자체가 훌륭해진 느낌.
하지만 곽덕배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최애의 파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 눈부실 정도로 선명한 light
그룹의 메인 보컬이라면, 당연하게도 보컬은 믿고 본다.
하지만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곽덕배가 판단하기에 성해온은 그 궤를 넘어섰다.
아이돌 그룹 보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량과 안정감.
터업!
곽덕배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뭣보다.
오늘 이 사전 녹화는 틀림없는 라이브였다.
- 찬란한 미래를 draw it, try it (yeah)
힘든 기색도 없이 정신 나간 고음을 선보이는 성해온.
그리고 그 정신 나간 고음에 색다른 고음을 더하는 신유하에 곽덕배의 입이 벌어졌다.
둘의 목소리 합이 좋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보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음 파트에서까지 조화롭게 뒤섞일 줄은 몰랐다.
곡은 순식간에 엔딩을 향해 달려갔다.
* * *
팬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오늘 미친 거 아니에요? 무대 너무 잘해서 소름 돋았어요.”
“진짜 오길 잘했어요. 유하 빛 아니에요? 실명될 뻔했잖아요.”
“맞아요. 아니, 저는 류인이 복근 보고…….”
“오늘 그 독기 의상 진짜 미친 것 같아요. 대체 누가 기획한 건지 감탄만 나오는 의상.”
“해온이도 미쳤지 않아요? 가면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 것 같애. 은발 톤그로 아닌 남돌 개오랜만이에요.”
……끄덕.
그리고 그 뒤에서 퇴장하던 곽덕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맞말 대잔치였다.
완전히 바깥으로 나오자, 곽덕배의 얼굴이 조금 더 아득해졌다.
역조공 커피차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스위치는 우리의 행복 스위치!]
커피차에 붙어 있는 스윗한 플래카드 메시지를 마주한 팬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조용히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차차차차차차차찰칵!
역조공의 실물이 공개되자, 사녹에 참여한 팬들이 앞다투어 SNS에 후기 트윗을 올리기 시작했다.
- 라이트온 오늘 자 역조공 ㅠㅠㅠ (사진)(사진)
- 밤새 진짜 추웠는데 추위가 싹 가심 걍ㅜ 아기천사들아
- 랕온깅들의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랄까요^^
└ 먹기만 해봐라
몸을 녹일 수 있을 만한 음료부터, 얼죽아 회원을 위한 찬 음료까지 없는 게 없었다.
“와, 저는 핫초코 먹을래요.”
“저는 아아메!”
“전 자몽차.”
“저는 캐모마일 티요!”
팬들이 설레는 얼굴로 음료를 받고 있을 때쯤, 다가온 라이트온의 매니저가 커다란 도시락 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걸 마주한 곽덕배는 이마를 파바박 때렸다.
척 봐도 개당 단가가 이만 원은 훌쩍 넘어 보이는, 고급 도시락이다.
두툼한 떡갈비에 과일까지 야무지게 들어 있는 도시락 말이다.
곽덕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정산도 아직 안 받았을 텐데, 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해준단 말인가……!
곽덕배는 당장에라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라이트온이 얼마나 개쩌는 그룹인지 떠들어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자제했다.
게다가 도시락 위엔, 친필 편지까지 자리했다.
물론 원본 하나를 복사한 거겠지만, 친필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지……?”
“최승하 돌았나 봐. 진짜 강아지 아냐? 하트를 대체 몇 개 그린 거야아악~! 기절초풍이다.”
“수현이 너무 귀여워…… 어린 주제에 이 글씨체 뭐야? 천산가? 만년필 쥐여줘야 될 것 같은데.”
“류인이 은근 악필인 거 너무 모에해서 죽을 것 같아…… 원래 날려쓰는 글씨첸데 엄청 신경 썼어억~~!”
곳곳에서 팬들의 주접이 터져 나올 동안, 곽덕배는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타닥타닥…….
서둘러 라이트온의 이 천재성을 퍼뜨릴 필요가 있었다.
* * *
무대 아래로 내려와 음향 장비를 제거하는데, 신유하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손도, 차갑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오른손을 덥석 잡아 매만지는 신유하를 치워낸 나는 피식 웃었다.
“원래 하얗고, 원래 차가워. 아, 너넨 먼저 대기실 들어가 있어.”
“……? 형님은 어디 가십니까?”
“잠깐 매니저님 뵈러.”
“아하! 갔다 오십시오!”
지금쯤 매니저는 역조공 현장에 있을 거다.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돌자마자 벽에 등을 기댄 눈을 데굴 굴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
속이 제대로 뒤틀렸다.
비유하자면, 장기가 행주처럼 쥐어짜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평생 겪어보지 못한 더러운 기분이다.
그 포션, 값이 싼 것도 아니었는데 약효가 이렇게 금방 꺼져간다니.
▲ 포션의 효능을 상회하는 질병/부상/통증은 완벽하게 치유 불가
과연, 포션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충돌이라는 건가.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멤버들의 눈에 띌 수도 있다.
끼익-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위층의 비상계단으로 향한 나는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사전녹화 도중에 실수할 뻔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바람에.
통증에 패턴이라도 있다면, 견디기라도 할 텐데.
정말 갑자기.
훅, 하고 찾아온다.
“……후우”
계단에 걸터앉은 나는, 숨을 토해내며 손을 들어 올렸다.
“…….”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손이 작게 떨린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 간단한 동작조차 통증으로 인해 매끄럽지 않다.
무대만 없다면, 이 정도 통증이야 골드를 아끼기 위해 참겠다만…….
오늘은 곧장 생중계될, 수록곡 무대가 본방송으로 예정되어 있다.
스탯 두 개를 업그레이드한 탓에, 남은 골드 자체가 많지 않다.
나는 상점에서 포션을 몇개 구매한 뒤, 그 중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머리가 가벼워지니, 생존을 위한 주판이 튕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골드는 거의 바닥났다.
다행인 건 골드와 맞바꿀 수 있는 포인트의 존재.
하지만 포인트의 수급량이 따라와 줄지는 미지수다.
이거 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쯧.”
나는 작게 혀를 차며 한숨을 삼켰다.
밑도 끝도 없이 차오르는, 초조가 뒤섞인 불안이 역겹다.
활동을 멀쩡히 이어갈 수 있을까?
골드를, 포인트를, 다 썼을 땐 어떻게 할 건데?
뭐, 이런 것들 말이다.
머릿속에 가득 차는 수많은 물음표들.
그것들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나 자신.
“피곤하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희망회로를 돌려보자면, 이건 말마따나 ‘충돌’이라는 것.
이 충돌이 끝나면 한동안 통증이 오지 않을 확률도 크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고통만 사라진다면, 개복치인 몸 따위야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조금만 쉬다 갈까.”
내가 눈꺼풀을 내린 순간이었다.
끼이익-
내가 있는 층의 바로 아래층 비상계단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발소리.
인원은 아마, 두 명?
하나는 날카로운 굽, 하나는 워커 굽.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다.
이 조합에 비상계단이라면, 음.
‘……아무래도.’
그렇고 그런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자리에서 턱을 괸 채, 숨을 죽였다.
굳이 여기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얼마 안 가 아래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번호만 주세요. 저 용기 냈단 말이에요……!”
갑자기 물고 빠는 소리라도 들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풋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사랑이 싹트고 있는 모양이지.
대화 맥락을 보아하니 여자 쪽에서 대쉬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연락 안 받으셔도 된다니까요! ……이렇게 까이면 제 자존심이 너무 상하잖아요! 언니들도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번호만 주세요. 뭐 번호 주면 죽기라도 해요?!”
“……그게, 조금 곤란해서요.”
문제는, 남자 쪽 목소리가 심히 익숙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