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166화
한창 앨범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정재진에게 할 말이 있어 기획팀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때였다.
“……?”
어지러이 늘어진 서류들 중,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의 도안이 프린팅되어 있는 종이를 포착한 것이다.
‘……설마.’
사아아-
낯짝이 급속도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거, 심각하게 조잡하다.
이해성의 기억을 되짚어볼 때, 최악의 응원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실용성 제로에 수렴하는 응원봉
2) 이것저것 넣다 보니 정체성을 잃어버린 조잡한 응원봉
3) 발로 디자인해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은 밍숭맹숭한 응원봉
여기서 1번과 2번은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어 일맥상통하는 부류다.
이것저것 추가하면서 과해지면, 자연스럽게 실용성까지 잃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응원봉 디자인으로 추정되는 이것도 그렇다.
칙칙한 얼굴로 종이를 바라보는 나를 캐치한 정재진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응원봉 디자인입니다. 화려하고 예쁘지 않나요?”
큰일이다.
이 인간, 이걸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나는 곧바로 맑게 웃었다.
“예, 화려하네요. 혹시 단가는 어느 정도가 나올까요?”
“현재 공장 쪽과 컨택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뭐가 많다 보니 단가가 꽤 나올 것 같아요. 예상 판매가는 이 정도…….”
금액을 들은 내 낯짝이 조금 더 흐려졌다.
이 디자인을 재현하려면, 이 금액이 나올 만하지만 전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아직 오더는 넣지 않으셨겠군요.”
내 물음에 정재진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단가가 세다 보니, 조금이라도 절충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아직 답장이 안 온 공장도 있어서요.”
입 털 준비를 마친 나는 싱긋 웃으며 정재진과 눈을 마주쳤다.
“정 대리님,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네네! 말씀해 보세요! 해온 씨 제안이라면 당연히 들어봐야죠!”
아티스트가 본인의 영역에 참견하면, 거슬릴 법도 한데 정재진은…….
날 너무 믿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심이 없다.
‘나야 좋다만.’
“제가 오늘 여기 온 것도 이 제안을 드리고 싶었던 건데…….”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당신의 자연스러운 거짓말에 혀를 내두릅니다!]
오늘 정재진에게 찾아온 건, 다른 소소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걸 본 이상, 넘어갈 수야 없지.
나는 정재진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볍게 뺏어 들었다.
“아직 생산 과정에 들어가지 않은 거라면, 저희가 직접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서요.”
“라, 라이트온분들이 직접이요?”
샤라락!
순식간에 가식적인 얼굴을 걸친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아무래도 처음 생기는 응원봉이고, 저희에게 의미도 남다르다 보니 그런 욕심이 있어서요. 하지만 이미 디자인이 나왔다면…….”
말끝을 일부러 흐리자, 당황한 정재진이 손을 펄럭펄럭 휘젓기 시작했다.
“아, 아, 아니요! 의도 자체는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걸려들었군.
“……그럴까요. 사실 디자인도 이미 생각을 조금 해뒀는데.”
“허, 허어……! 디자인을 말입니까!”
“예.”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불자면 디자인을 생각해 뒀을 리 없다.
하지만 고인물 오타쿠란 무엇인가.
수십 개의 응원봉 디자인을 파악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평타는 칠지 알고 있는 게 그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렵지 않게.
“잠시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슥, 슥-
“저희의 상징이 하나쯤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 * *
한편, 종이의 여백에 망설임 없이 디자인을 그려 나가는 이를 바라보고 있는 정재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 이내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기획팀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업무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이 사람을 보면 실컷 쪼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정재진의 시선이 성해온에게 날아들었다.
그 어떤 아이돌이 응원봉 디자인에까지 신경을 기울인단 말인가?
게다가 저 디자인, 미적감각이 대단하지 않은 자신이 봤을 때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원래보다 훨씬 나아.’
멤버들을 따뜻하게 챙길 때부터 놀라웠지만, 팬덤까지 이렇게 챙긴다니…….
성해온을 향한 정재진의 신뢰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높아져 있었다.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자신을 건져준 이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신뢰도는 천장을 찌를 듯이 높아져 간다.
‘참, 대단하신 분……!’
* * *
“일단 이 정도로 생각해 봤-”
디자인 구상에 집중하다가, 고개를 든 나는 멈칫했다.
정재진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가끔 저럴 때마다, 굉장히 부담스럽다.
정재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나는 말을 이었다.
“대리님이 보시기엔, 어떠신가요?”
“무척!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이디어가……!”
덥썩!
눈을 과하게 반짝이던 정재진이 내 손을 잡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이 조금, 그럴 수는 있겠지만 저는…….”
“……?”
“해온 씨가 아이돌 계의 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진심입니다. 해온 씨가 그리신 건, 아직 대략적인 러프지만 저는 이게 훨씬, 네, 훨씬…….”
대체 무엇에 감동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먹히긴 했군.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 *
그때 제안했던 게 바로 이거다.
LIGHT ON ⓥ
응원봉? 라이트온이 만들어 드립니다! (공구 이모티콘)
youtobe/SKUITMbndN…….
응원봉 디자인을 멤버들과 직접 하고, 이걸 영상으로 남겨서 컨텐츠로 업로드하는 것.
우리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팬들에겐 엄청난 의미가 될 테니까.
소파에 앉은 내가 업로드된 영상을 볼 목적으로 리모컨을 쥐자, 금세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앗! 이거 저번에 찍은 그거 아닙니까! 오늘 올라왔나 봅니다!”
“오, 그게 벌써~?”
“아. 썸네일 재밌게 나왔다. 승하, 너.”
“그러니까요! 내 얼굴에 눈물은 왜 붙어 있는 거야?”
“그거야, 망했으니까…….”
신유하의 조용한 진실 공격에, 최승하의 입이 다물렸다.
꾹.
나는 피식 웃으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기다란 탁상에 일렬로 주르륵 앉은 우리로 시작된다.
[ 해온) 오늘 저희가 모인 이유는요. 바로? ]
[ 유하) ……응원봉을 직접! 디자인, 해보기 위해서입니다! ]
[ 승하) 와아아아아아아아~! ]
우리 앞에는 흰 칠판과 색색의 컬러 마카펜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선을 긋기 시작했고, 다른 녀석들은 나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열중하기 시작했다.
[ (음소거 아닙니다) ]
실컷 집중한 탓에, 오디오가 비어버렸고 자막은 그것을 콕 집으며 주목했다.
[ 승하) 저 끝! 끝! 제가 제일 잘 그렸을걸요~? ]
[ 류인) 승하 자신감이 넘치네? ]
[ 유하) (속닥속닥) ]
[ 해온) 유하 방금 뭐라고 했어? ]
[ 류인) 자기가 승하 거 몰래 봤는데 별로였다는데. ]
[ 승하) ……! 야, 신유하! 와아아, 이러시겠다? 다들 놀라지 마십셔! ]
처억!
최승하는 자신만만하게 결과물을 공개했고, 영상에선 정적이 흘렀다.
[ (무시하기) ]
[ (상처받은 눈으로 바라보는) ]
[ 승하) 다들 왜 못 본 척해요! ]
그렇다.
최승하가 디자인한 응원봉은, 버튼을 누르면 손잡이 부근에서 날개가 튀어나오는 구조였던 것이다.
[ 해온) 현실성이 없잖아…… 현실성이……. ]
[ 승하) 이렇게 형이 팩트폭력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
[ 해온) 저리 가, 저리 가, 왜 또 치대. ]
[ 승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주셔야죠~! ]
화면 속 나는 가슴을 들이미는 최승하에 질색하며, 녀석을 한수현에게 던졌다.
[ 수현) ……. ]
[ 승하) 싸늘하다, 싸늘해! ]
[ 윤재) 형님은 거들먹거리신 것에 비해서 실망입니다. ]
건수를 잡았다는 얼굴의 차윤재가 입을 열자, 최승하가 어서 공개해 보라며 펄쩍 뛰었다.
그리고 공개된 차윤재의 도안은.
[ 해온) ……어리니까. ]
동시에 SNS도 웃음바다가 됐다.
- 아 성해온 미쳤냐곸ㅋㅋㅋㅋ 할 말 많아 보이는데 꾹 참고 입 닫는 거 ㅅㅂㅋㅋㅋ 승하한텐 할 말 다 해놓고
- 아기 고양이는 오히려 저 반응에 더 상처받은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
[ 윤재) ……그렇게 별로입니까? ]
[ 류인)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
[ 윤재) 그럼 어쨌든 별로긴 하다는……. ]
[ 유하) 괜찮아, 멋져 ……! ]
[ 윤재) ……! 형님! ]
차윤재가 신유하의 손을 맞잡으며 감동적인 눈빛을 보냈다.
[ 승하) 유하야! 나는! ]
[ 유하) 저도 다 그렸어요……! ]
- 아 tlqkf 신유하 무시하는 거 미쳤나 개웃김ㅋㅋㅋ
- 최승하 진짜 상처받은 것 같은뎈ㅋㅋㅋㅋ
- 아 이 비글들아ㅠㅠ
[ 승하) 그래도 내가 윤재보단 낫지. ]
[ 윤재) 예에에에?! 형님보다는 제가 낫습니다! ]
[ 승하) 지금 해보자는 거야? 그래 대국민(?)판결 해보자고. ]
[ 윤재) 허어! 제가 겁먹을 줄 아셨습니까!]
[ 수현) ……형들 나이가 몇이에요 대체? ]
거의 난장판인 분위기 속에서, 손을 번쩍 든 건 나였다.
[ 해온) 나도 끝. ]
근데, 이거 편집이…….
최종적으로 내 디자인이 채택되었으니, 내 위주로 편집이 될 건 예상했다.
그럼에도 이건 너무…….
허공에 번쩍 들려진 내 손을 시작으로, 멤버들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댓글에 성해온 힘숨찐이래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댓글을 살피던 최승하가 입을 열었다.
“힘숨찐이 무엇입니까?!”
“그건 말이야~ 겉으론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사실 능력이브븝.”
나는 한 손으로 최승하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 (우르르르) ]
화면 속, 내가 손을 들자 멤버들이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모여들었다.
[ 수현) 역시 해온 형은 대단하시네요. 멋있어요. ]
[ 윤재) 정말 가장 일품입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으십니다! ]
[ 승하) 오?! 오오?! 오오오오?! ]
[ 류인) 해온이 디자인 진짜 좋은데? ]
[ 유하)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
“지금 생각해도 저 디자인 예쁜 것 같아.”
갑작스러운 류인의 칭찬에, 최승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해온이 힘을 숨김, 줄여서 성숨찐?”
“……까불지 좀, 콜록.”
음.
……콜록?
순식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놈들이 평소에 나를 얼마나 허약하게 보는지는 빌어먹게도 잘 알고 있어서, 기침 같은 건 이놈들을 피해서 조용히 처리해 왔는데.
휙! 휙! 휙! 휙! 휙!
다섯 쌍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모여들었다.
나는 곧바로 손을 절레 흔들었다.
‘별거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원래 기침이란 한번 물꼬가 트이면 손쉽게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괜찮, 콜록, 큭, 콜록!”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단숨에 거리를 좁힌 최승하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와아~”
“별거 아니니까, 치워.”
타악!
나는 곧장 이마에 올려진 손을 치워냈으나, 동시에 녀석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우리 형은 참 대단해. 열이 이렇게 펄펄 끓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숨겼을까?”
“안 아프니까.”
“……거짓말.”
“이 정돈 잠만 푹 자도 나아.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지.”
“싫어요.”
“……?”
“싫다고요.”
“그래, 평생 그러고 있든가.”
나는 태연하게 혀를 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최승하가 생글 웃었다.
“얘들아, 이 사람 붙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