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170화
“안녕하세요. 사인회에선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앨범을 내려놓기도 전에, 눈을 사르륵 접어 내리며 말을 건네는 성해온에 근돌의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사인회‘에선’……?
‘……설마, 행사에서 마주친 걸 기억하는 건가?’
눈이 마주치긴 했었다만, 자신의 망상 정도로 치부했었다.
근돌은 시선을 내려 성해온을 빠르게 훑었다.
‘뭐 하는 애야?’
고인물로서의 궁금증이었다.
보통 팬싸에 자주 오는 팬들을 기억하는 아이돌은 드물게 있어도…….
행사에서 눈 한번 마주친 팬을 기억하는 아이돌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심지어 자기가 얼을 타고 있는 사이, 앨범을 강탈해 페이지를 펼치더니 스스로 사인하기 시작했다.
‘얜 진짜 뭐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은 근돌은 준비했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해온이 승하랑 룸메이트였잖-”
해온이 승하랑 룸메이트였잖아요. 썰 풀어줄 수 있어요?
이게 근돌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하지만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 성해온이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승하 이야기라면 할 게 아주 많죠. 아시다시피 애교가 많은 귀여운 동생이거든요.”
“……?”
어떻게 알았지?
질문을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근돌이 당황하고 있는 지금도, 성해온은 청산유수로 최승하의 이야기를 술술 불고 있었다.
“얼마 전엔 혼자 운동하겠다고 문에 철봉 같은 걸 매달았는데, 쓰지도 않아서 그게 숙소 빨래걸이가 됐었거든요. 그리고 또-”
“……?”
근돌은 눈을 껌뻑였다.
스스슥!
성해온이 1초의 공백도 없이 말을 이어가며, 자신과 눈을 마주친 상태로 앨범에 p.s까지 적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근돌은 성해온의 정체가 심각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돌 2회차도 아닐 텐데, 뭐야?’
만만치 않은 고인물 생활을 했던 자신은 별별 아이돌들을 다 마주쳤다.
오타쿠계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단 말이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는 난생처음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억. 잠시만요.”
최승하의 온갖 TMI를 랩처럼 쏟아놓은 성해온이 물을 벌컥 들이켠 것이다.
그리고 근돌은 성해온이 숨까지 찰 정도로 입을 놀렸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보통 팬사인회에서 1분 1초가 아까워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건, 팬 쪽 아닌가?
“아! 류인이는 사과토끼를 엄청 귀엽게 잘 깎아요.”
“아, 진짜요……?”
전설의 ‘아, 진짜요?’를 자신 쪽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에 U라이브 할 일 있으면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제가 자랑스러울 이유는 없지만 정말 잘 깎거든요.”
“넘어가실게요~!”
근돌의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을 무렵, 옆으로 이동하라는 사인이 들려왔다.
‘뭐지?’
근돌은 아직까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최승하는 자신이 언급했다지만, 류인의 류 자는 꺼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팬사인회 시간이 촉박한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애초에 성해온에겐 최승하와의 일화만 물어보려고 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시간 내에 최애 두 명의 온갖 TMI를 들었으니, 목적은 초과 달성이었지만 근돌은 의문에 휩싸였다.
“……?”
심지어 성해온은 꽤나 뿌듯한 얼굴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털썩…….
쉴 틈도 주지 않고 훅훅 들어오는 라이트온의 플러팅에, 반쯤 정신이 탈곡당한 근돌은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실 첫 타자인 성해온 이후에 정신이 나가서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직도 근돌의 머릿속엔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뭐야?’
‘뭔데?’
사실 성해온의 임팩트가 컸다지만, 최승하와 류인도 엄청났었다.
준비해 온 오천 가지 주접을 둘에게 떨었는데, 반응 차이가 극명했기 때문이다.
- 으하핫, 제가 그렇게 귀여워요~? 정말로? 근데, 누나가 더 귀여워요.
- ……아. 제가 그렇다고요. 음, 아. 죄송해요. 조금 쑥스러워서요.
한 녀석은 눈을 끈덕지게 맞추며 생글생글 웃어대고, 한 녀석은 그렇게 안 생겨서는 귀 끝이 불그스름해진 채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퍽!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친 근돌이 아득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한 컷이라도 더 찍어야지, 여운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얘네 진짜 뜨겠는데.’
감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근돌이 확신했다.
솔직히 애정이 크다 해도, 팬사인회에 참석해서 허탈한 감정이 드는 경우가 더러 있다.
터놓고 말하자면, 돈 아깝다는 생각 말이다.
근돌도 그런 생각을 몇 번 한 적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라이트온 팬사인회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어.’
* * *
“음.”
팬사인회 첫 타자였던 내 앞이 비었고, 나는 옆 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하고 있군.’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신유하라서, 나와 최승하 사이에 배치했다.
“……제, 가 대천사라고요? 앗, 감사합니다. 머리띠…… 잘 어울리나요?”
하얀색 꽃으로 이루어진 화관 위에 천사링이 달린 머리띠를 착용한 신유하의 동공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앞에 선 팬분의 주접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당연히 잘 어울리죠! 원래 유하는 천사잖아요~ 그리고 유하 등에 뭐 있어요.”
“제 등에요? 뭐, 뭐지…….”
당황한 신유하가 자신의 등 뒤를 확인하자, 팬이 곧장 대답했다.
“날개~~!”
- 낯가리는 1초마다 돈이 이만큼 나간다는 걸 기억하도록.
“아, 나, 날개……! 천사니까, 아. 날개. 제가 정말 천사……!”
“네, 유하는 천사!”
주먹을 억세게 움켜쥔 신유하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팬과 눈을 마주쳤다.
“……천계로 떠나지, 않을게요.”
“으아아악! 좋아요! 약속!”
“약속……!”
대화를 훔쳐 듣던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징글맞게 세뇌시킨 보람이 넘치는군.
다른 녀석들도 잘해주고 있다.
마지막 타자인 류인 앞에 선 팬이 퇴장했고, 본격적인 멘트 타임이 시작됐다.
나는 조용히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스위치.”
“와아아아아아아아악!”
“에엥? 아무것도 안 말했는데, 왜 좋아하시는 거예요!”
“얼굴! 얼굴!”
한 팬의 엄청난 성량에 팬사인회 장에 웃음이 터졌다.
“아하핫! 얼굴이요.”
살짝 웃은 최승하가 곧장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위치는 우리 얼굴 보고 만나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당연히 비명이 터져 나왔고, 차윤재는 남사스럽다는 얼굴로 펄쩍 뛰었다.
“스위치는 우리를 좋, 좋아해 주시는 겁니다! 무, 물론 얼굴도 좋아하시겠지만! 저희 그 자체를 좋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곧바로 ‘맞아’라는 단어가 크게 섞인 환호가 터졌고, 류인이 푸스스 웃었다.
“뭘 좋아해 주시든, 스위치가 보내주는 애정이 헛되지 않게끔 노력할게요.”
그리고 류인 옆에 앉은 한수현이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머리에 쓴 토끼 귀가 까딱거렸다.
“……맞아요. 스위치가 오늘 얼굴이 재산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소중하게 관리해 볼게요.”
“뭘 몰라아아아악!”
홀에 한수현 최애로 추정되는 팬의 고함이 메아리쳤고, 최승하가 한수현을 끌어당겨 품에 넣었다.
“맞아~ 뭘 몰라아아~? 귀여운 걸 왜 몰라.”
“……놔주세요.”
참고로 한수현은 아직도 귀엽다는 말을 싫어한다.
틈만 나면 다가오는 최승하의 스킨십에 낯을 가리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최승하는 여기가 팬들 앞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으음, 스위치가 놔달라고 하면 놔주지 뭐! 놔~ 줄까요오~?”
당연하게도 스위치는 최승하의 편이었다.
* * *
“형님! 어디 가십니까?”
“잠깐 손 좀 씻고 갈게.”
“예! 그럼 먼저 밴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직행했다.
드륵, 탁-
칸의 문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콧속에서 액체가 흘러나왔다.
‘역시나.’
코가 시큰해지면서 묘한 느낌이 들면, 곧 이러더라고.
몇 번 겪어보니 알 것 같다.
나는 티슈를 뽑아 피를 슥슥 닦아낸 뒤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짓도 슬슬 익숙해진단 말이지.
이젠 타이밍을 얼추 예측할 수 있을 경지에까지 올랐다.
나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미친 올라오는 사진들 다 레전드 도랐나 진짜 윤재한테 키티 모자 씌워주신 분 길 가다 돈 주우세요
- 포스트잇 질문한 팬분 후기 개웃김 라이트온 멤버 전원 최승하 5명 안 뽑고 5살 최승하 뽑았대 ㅋㅋㅋ 그들의 공통된 의견 : 최승하 5명은 감당되지 않는다
- 오늘도 팬싸 찢었다… 라이트온 팬싸 특 : 돈 안 아까움
└ 이건 진짜 ㅇㅈ 이것도 재주임
다행히 돈값을 못 하진 않았나 보군.
나는 안도를 삼키며 스크롤을 내렸다.
- 오늘 팬싸 무대도 두 개 해주고 마들렌까지 받음… (사진)
- 해온이는 솔티초코, 류인이는 레몬, 승하는 얼그레이, 유하는 말차, 윤재는 플레인, 수현이는 코코넛! 라이트온 어떻게 안 사랑해? ㅠㅠㅠ 두 개씩 받았고 저는 [승하 pick] [수현 pick]으로 받았어요! (사진)(사진)
사실 매 활동의 첫 팬사인회는 무언가를 만들어서 팬들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빠듯한 스케줄 탓에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팬사인회에 도착하기 전, 마들렌 전문점에 들러 멤버들과 함께 고른 것이다.
이동하는 밴 안에서, 멤버들과 Opp 포장지 겉면에 각자 고른 맛을 알려주는 스티커를 붙였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다.
- 나 진짜 지금 과몰입 오타쿠야… 맨날 스위치들 생각해 주고… 자기들도 힘들 텐데… 나는 이럴 때마다 그냥 아방하게 울어버리는 것임
- 진짜 라이트온만큼 역조공에 진심인 그룹 없음ㅋㅋㅋㅋ 맨날 뭘 받아
- 왜요? 제가 팬싸 n장 차이로 컷당해서 마들렌 직접 사 먹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사진)
└ 와 올해 들은 얘기 중에 제일 슬픔
모니터링을 이어가며 주차된 밴의 문을 열자마자, 신난 멤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나도……!”
“팬분들 에너지 받아서 그런가? 뭔가 덜 피곤한 것 같기도~!”
“승하야, 희승 쌤한테 그대로 전해줄까?”
“와아아~? 류인 형 진짜 잔인한 사람이네! ……안 말할 거죠?”
“하하, 너 하는 거 봐서?”
나는 피식 웃으며 멤버들에게 말을 건넸다.
“다들 수고했다. 잘하던데?”
“형님 덕분입니다! 예습을 해 갔더니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아앙? 윤재, 언젠 나한테 해온 형 좀 말려보라고 기겁하더니?”
“……그날은……!”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그날 밤의 끔찍한 광경에 두 눈을 질끈 감습니다!]
아, 내가 멤버들을 불러모아 놓고 교육시킨 날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굴어도 다들 그러려니 한다는 게…….
역시 성해온의 인성은 굉장히 편리하단 말이지.
* * *
활동 1주 차가 끝나가는 저녁.
매니저와 통화를 마친 나는 히죽 올라간 입매를 다듬었다.
“우리.”
내 목소리에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됐다.
“1위 후보라는데.”
“아하, 저희가 1위 후보…… 응?”
“어……?”
“바, 바, 바, 방금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아아아-
라이트온 숙소가 발칵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