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180화
- 요즘 왜 이렇게 판이 커진 것 같지? 분명 한줌판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개가 무량하다
- 라이트온 여러분 제 트친을 그만 잡아가 주십시오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요즘 라이트온 팬덤의 유입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딜 가나 그렇듯, 견제와 어그로 역시 함께였다.
곽덕배는 흠, 소리를 냈다.
‘체감상 1위 한 이후에 더 심해진 것 같지?’
- ㄹㅇㅌㅇ 나중에 봐라 사재기했을 수도 있음 반박 시 내 말이 옳음
- 랕궁이들 그냥 이유 없이 짜증 남 그 팬들도 짜증 나고 싹 망했으면 좋겠네 ㅎ
- 빈집털이한 게 뭐 좋다고 질질 짜나 싶다
이렇게 자신들이 무지성 어그로임을 이마빡에 써 붙인 놈들은 솔직히 거슬리지도 않는다.
문제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어그로들이었다.
[ㄹㅇㅌㅇ 정도면 예비 1군 아님?]
솔직히 말해보자
소속사빨이 없다뿐이지 화제성 같은 건 지금 얘네가 대형 출신들보다 앞서고 있는 건 맞잖아
이런 애들이 독기 있어서 더 훅 뜬다 ㅎㅎ 대형 출신들은 데뷔하자마자 빠들이 들러붙어 주니 간절함이 없잖어 ㅋㅋㅋ 지금 대형 출신 아이돌들 꼬라지만 봐도…
세대교체 슬슬 각 나온다~~
이렇게 팬덤 간의 악감정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글들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진짜 팬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누가 봐도 라이트온과 그 팬덤을 욕 먹이려는 지능형 어그로였다.
곽덕배도 매일 ‘라이트온 1군’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타쿠의 바람일 뿐이다.
1군이 지나가는 개 이름도 아니고, 아이돌들에겐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다른 스위치들도 마찬가지였다.
- 얘들아 서동요 기법은 찐이라고 외치다 보면 언젠가 이뤄져 #라이트온_1군_가보자고
이런 식으로 대개 장난식일 뿐.
애초에 타 그룹과 비교질을 하지 않는 건 오타쿠계 강호의 도리다.
하지만 스위치를 가장한 어그로가 이 도리를 깨부쉈으니, 당연하게도 라이트온 팬덤은 소소하게 욕을 먹고 있었다.
여기서 다행인 점은 이들의 멘탈이 몹시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 라이트온이 요즘 붐이긴 한가 보다… 이런 별 같잖지도 않은 어그로도 붙고…
- 저녁 메뉴 추천 좀
그렇다.
……망돌 시기를 겪어본 팬덤은 대부분 멘탈이 세다.
왜?
눈물겨운 이유지만, 수많은 조롱과 어그로를 밥 먹듯 먹다 보니 자연스레 단련이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 곽덕배의 멘탈도 마찬가지였다.
“해온이 직캠이나 봐야지.”
* * *
[♡류인♡]
[♡승하♡]
[♡유하♡]
[♡윤재♡]
[♡수현♡]
“……?”
제정신이 아닌 연락처의 꼬라지를 보자마자 물음표를 띄운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살폈다.
……내 거 맞는데?
누구 짓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나는 망설임 없이 어느 녀석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눈을 크게 뜬 최승하가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차윤재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갑자기 웬 폭력! 몰랐는데, 형 사실 이런 취향이었으븝븝.”
“헛소리 좀 그만해.”
나는 혀를 차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너지? 언제 건드렸어.”
“뭔지는 몰라도 저 아니에요!”
싱긋…….
“진짜 그렇게 쳐다보면 제가 술술 불 줄 아시나 본데, 맞아요. 제가 형 잘 때 건드렸어요.”
“죽을래?”
“하핫, 너무 삭막하잖아요~ 그냥 최승하라니! 안 친한 사람도 그렇게는 저장 안 한다!”
“……? 그게 뭐가 삭막해.”
“한집에 사는 멤버들끼리,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최승하가 곧장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우리 해온 형♡♡]
[♡♡우리 류인 형♡♡]
[♡♡내 친구 유하♡♡]
[♡♡깜찍한 윤재♡♡]
[♡♡귀여운 수현이♡♡]
“…….”
말을 말자.
“하트 하나씩은 붙여줘야죠! 이러면 정말 속상해요.”
“평생 속상해하든지.”
“뭐야! 지금 제가 보는 앞에서 다시 바꾸는 거예요?”
“다시 손대기만 해.”
“이렇게 말하면 다시 손대고 싶은데!”
목을 길게 빼내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본 최승하가 우는소리를 냈다.
“그래도 성은 떼줘요! 하트는 뗄 수 있는데, 성까지 붙이면 정 없잖아요. 우리 사이에!”
“난 원래 다 붙여.”
끈질기게 달라붙는 최승하를 떼어내며 연락처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있을 무렵이었다.
띠링!
불길한 소리가 고막을 다이렉트로 때린 것이다.
……설마?
나는 스마트폰에 고정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연말 시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연말 시상식에서 3개의 무대에 오르세요!
(*본인이 포함되지 않은 무대도 카운팅됩니다.)
성공 시 ▶ 스탯 업 쿠폰 증정
실패 시 ▶ 랜덤 페널티
“……허.”
이런 미친, 말문이 턱 막힌다.
사실 저번 미션을 클리어한 이후, 여태껏 새로운 미션이 뜨지 않은 상태였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여기서 말하는 연말 시상식은 아마도 AMA.
Asian Music Awards, 연말 시상식 중 가장 큰 스케일이라면 이곳일 거다.
‘정신 나갔군.’
물론 우리가 연말 시상식에 초청을 받지 못할 리는 없다.
섭외조차 받지 못했던 작년과는 상황이 완전 달라졌으니 말이다.
……고작 참석 여부 때문에 내가 이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3개의 무대, 이 대목의 현실성이 없다는 게 문제다.
요즘 우리의 위상이 좀 달라졌다지만, 아직 이 정도는 아니거든.
무대 3개는 대형 소속사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놈들이나 가능한 이야기다.
명훈이!
애석하게도 우리의 뒤엔 후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명훈이밖에 없단 말이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에 눈가를 훔칩니다!]
대가리를 식혀보자.
……냉철하게 판단했을 때, AMA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무대는 아마도 1개.
연말 무대 특성상, 타 그룹과 스페셜 무대라는 명목으로 엮일 가능성도 크니 무대 2개 정도는 가볍게 해낼 수 있을 거다.
운이 따라준다면 스페셜 무대로 하나쯤 더 엮일 수 있겠다만…….
대가리를 굴려본 결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올해 활동으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둬 연말 시상식에 참석하는 아티스트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무대를 해야 할 가수가 많은데, 스페셜 무대가 많을 리 없지 않은가.
뭣보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명운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바득 간 나는 곧장 연습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미션 실패에 걸린 랜덤 페널티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목숨일 가능성도 배제하진 못한다.
‘우선 상황 파악부터.’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지.
띵!
지정된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정재진이 반갑게 다가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해온 씨라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AMA에 관해 묻자, 정재진은 마침 오늘 섭외가 들어왔다며 곧바로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들어온 무대는 하나, 거기에 스페셜 무대가 하나쯤 추가될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정확히 예상대로다.
다른 말로 설명해 보자면, 미션 실패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플랜 B로 넘어간다.
* * *
“민정아, 오늘따라 표정이 영 안 좋다?”
“……화도 안 나세요?”
“뭐가?”
남희연의 물음에 서민정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더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번에 PD님이 기획한 파일럿 프로그램 뺏겼다면서요. 방금 듣고 오는 길이에요!”
“아, 그거? 벌써 소문났니? 빠르기도 하네.”
“……?”
남희연은 비싯 웃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거 망할걸?”
“……네? PD님이 엄청 자신 있게 이건 되는 기획이라고 떠들고 다니셨잖아요.”
남희연의 안목은 놀랍다 못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라, 남희연이 ‘잘될 것 같네?’ 한 기획은 정말 잘된다.
우스갯소리로 신기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떠돌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그런 인물이 자신 있다며 떠벌떠벌한 기획이니, 얼마나 많은 PD가 침을 줄줄 흘렸겠는가.
아무리 윗선의 뜻이어도 남의 기획을 냅다 받는 것은 PD들의 입장에서도 자존심이 상해야 할 일지만, 그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기획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로 남희연의 기획은 홀라당 빼앗겼고 말이다.
“슬슬 윗선에서 보복이 들어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거든. PD한테 보복 들어와 봤자 뭐겠어? 끽해봐야 기획 도둑질이겠지.”
서민정은 입을 쩍 벌렸다.
“그걸 알고 계셨다고요?”
“어. 나 프로그램 끝나고도 계~ 속 눈칫밥 먹었잖아. 언젠가는 이럴 것 같더라고? 내가 편집 건드리긴 했다만,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남희연이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라이트온 비중을 늘리고 싶은 걸 어떡해. 내가 메인 PD인데 그 정도도 못 하면 사표 쓰는 게 낫지.”
……서민정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남희연은 지금 윗선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벌을 받고 있다.
간판급 PD니 자르진 못하지만, 보여주기식 압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서민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프로그램 하나엔 수많은 이들의 이익 관계가 실처럼 얽혀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거였다.
러쉬와 트웰브를 밀어주고, 라이트온은 편집의 재미를 살려주는 용도로 쓰자.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라이트온이 온갖 포커스를 가져가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윗선에선 지시가 내려왔다.
은근한 악편 요구와 함께, 라이트온의 비중을 없애다시피 죽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희연은 청개구리처럼 그 오더를 어겼다.
윗선의 말을 따르는 척, 악편 각을 넣었다가도 그다음 회차에서 그 여론을 수습할 만한 무언가를 넣는 식으로 교묘하게 말이다.
심지어 프로그램 막판엔 윗선이 막을 틈도 없이, 송출 직전에 독단적으로 편집을 건드리기까지 했다.
위에서 진즉에 퇴짜를 맞았던 라이트온의 분량과 서사를 마음대로 추가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BK와 INT에서는 난리가 났고, 윗선에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뒷골이 당길 지경이 된 것이다.
“PD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이젠 프로그램 끝났으니 터놓고 말하는 거지만, 이해가 안 가요. PD님이 남을 불쌍해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렇지. 난 1군이고 망돌이고 뭐고, 아무도 안 불쌍해. 내가 왜 남 인생에 점수를 매기지? 당장 내 인생도 챙기기 힘든데 말이야~”
“……동정심도 아니면 왜 그러셨어요? 이렇게 보복당할 걸 예상하셨으면서요. 맨날 재미, 재미, 하시지만 재미가 커리어보다 중요하세요? 가만히만 있어도 탄탄대로가 깔릴 텐데, 왜…….”
“민~ 정~ 아~”
빙긋 웃은 남희연이 서민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냥 그땐 그러고 싶었달까?”
“PD님 앞날은 재미없게 됐는데도요?”
“왜? 난 지금도 재밌는데.”
남희연이 반짝이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몸을 빙글 돌렸다.
* * *
“후.”
어느 카페 앞에 선 나는 답지 않게 짧은 심호흡을 했다.
이 사람은 꽤 긴장되는 사람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