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181화
몇 달 전, 프로그램 종방연 회식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던 새벽.
술 못 먹고 뒈진 귀신이 들러붙은 게 틀림없는 제작진들은 소주를 짝으로 처먹더니 모두 만취했고, 나는 조용히 바람을 쐴 겸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PD님.”
“지금 나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피하려고 각 재고 있죠? 불편하겠지만 편하게 있어요.”
“불편할 리가요. 영광입니다.”
“하하하하! 진짜 사회생활 일품이네!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척’하지 말라니까? 프로그램도 끝난 마당에 편하게 굴어요. 그 태도도 익숙하지만, 역시 난 알맹이 쪽이 좀 더 재밌거든.”
곧장 낯짝에서 가식을 지워낸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분부대로 했으니,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사실 궁금한 게 있었거든요.”
“찝찝한 게 아니고?”
“편한 대로 생각해 주세요. 저희 편집 좋게 넣어주신 거, PD님이신가요?”
“단도직입적이네.”
“이 그룹 처지를 가장 잘 아는 게 저예요. 처음엔 긴가민가했거든요. 자꾸 편집이 좋게 들어가는 게 보이는데…… 왜? 우리 소속사가 뒷돈을 넣었을 리도 없고, 뭣도 없는데.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마지막에 펑, 하고 커다랗게 욕을 먹이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웬걸, 마지막까지 편집이 너무 잘 들어갔어요. 유닛 대결에서 1위를 하긴 했다만…….”
나는 남희연과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었다.
“줄이려면 줄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거기서 나를 떠올린 이유는?”
“뭐, 독단적으로 편집을 건들 수 있는 사람이 PD님 말고 더 있나요.”
“아하하하하! 맞아. 내가 그거 건들고 평생 처먹을 욕 다 먹었어. 내가 맞은 서류만 쌓아도 내 키를 너끈하게 넘을 거야. 아아, 역시 재밌다니까.”
한참을 웃은 남희연은 눈가를 닦는 시늉을 하며 내게 담배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안 피우나?”
“예, 비흡연자입니다. 그리고 제 직업이 직업인지라…….”
나는 남희연 손에 들린 담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 친구와 투샷이라도 찍히면 무척 곤란해지니, 치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 그러네. 아이돌이었지. 미안, 미안. 너무 능구렁이 같아서 실수할 뻔했어.”
그때 남희연은 내 손에 명함 한 장을 올리곤 훌쩍 떠났다.
재밌는 생각이 있으면 한 번쯤은 연락해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 * *
“난 그거 버린 줄 알았지?”
“그 귀한 걸 버릴 리가 있나요.”
“아하하하하! 거짓말을 참 잘한단 말이지? 웬만하면 껌뻑 속아넘어 가겠어. 그래서…….”
말끝을 늘린 남희연이 손가락으로 카페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연락한 이유가 뭘까? 궁금하네. 예능? 마침 아는 PD가 기획하고 있는 파일럿 하나가 있는데 흥미 생겨요? 그 PD가 언제 성해온 씨 이야기 하더라고. 한번 이야기 전해줘 볼까?”
“아니요.”
“호오, 원하는 게 뭐길래? 이거, 더 궁금해지는데.”
“예상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내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예상을 하지?”
“제가 이 시기에 연락을 드린 것부터,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요.”
“으하하하하!”
쾌활하게 웃은 남희연이 상체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AMA?”
나는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고로 AMA는 Nnet 측에서 주관하는 연말 시상식이다.
“기대답게 스케일이 큰데요? 근데 이거 어쩌나. 그건 나도 못 들어줄 가능성이 커.”
“시청률도 좋았겠다, 명목만 잘 세우면 스페셜 무대 하나쯤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은데요. PD님 권한이 크진 않겠지만, 프로그램 총괄로서 어느 정도 입김은 있으실 테고.”
내 말에 남희연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렇지, 그렇지. 근데 그럼 우승자 단독 무대 위주로 편성하는 쪽이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라이트온이 끼려면 출연진 단체 무대여야 할 텐데…… 2분씩만 잡아도, 어라~ 10분이 넘네? 이건 쉽지 않거든.”
“그렇죠. 하지만 러쉬 상황 아시잖아요?”
러쉬는 요즘 하락세를 타고 있다. 태오 사건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 데다가, 직후 낸 앨범의 성적까지 실망적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경연 프로그램 우승 특전으로 걸렸던 프로그램의 화제성도 기대보다 못 미쳤다.
탁!
테이블을 경쾌하게 친 남희연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재밌다니까. 그래 맞아. 무대 스페셜 무대 주겠다고 하면, INT에선 좋다고 달려들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이득이 없어.”
“이야기가 나왔었나 보군요.”
“아하하! 눈치가 빨라? 맞아요. 나왔어요. 근데 엎어졌지. 말 그대로……”
남희연이 어깨를 까딱였다.
“락세 탄 그룹을 굳이?”
“그럼, 재밌게 만들어보는 건 어떠세요?”
“재밌게?”
“저한테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아하하하하! 건방지고 마음에 들어.”
남희연은 카페 의자에 등을 삐딱하게 기대며 커피를 삼켰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볼까?”
* * *
“네에에에?”
“예에에에에에?”
멤버들의 경악 끝에, 구희승이 눈을 부릅떴다.
“돌았어? 아님 내가 돌은 건가? 응? 내 귀가 먹은 거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안 그래도 연말 안무 짜느라 죽을 지경인데 무대 하나가 더 추가됐다?”
“예. 심지어 엔딩 무대급으로 편성이 들어가는 스페셜 무대라던데요.”
“허어, 이게 이렇게 갑자기 결정된다고? 진짜 미쳤나? 야, 이거 방송국의 횡포 아니냐?”
나는 태연자약한 낯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말 무대는 1~2주 전에 정해지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그렇긴 하지…….”
그 만남 뒤, MH엔 스페셜 무대에 관련된 섭외가 추가로 도착했다.
남희연이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해온 씨!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 저번에 AMA 무대 여쭤보셨던 거, 스페셜 무대가 하나 추가됐답니다. 심지어 스케일이 꽤 커 보입니다!
나는 그걸 전해듣자마자, 멤버들과 구희승에게 말하고 있는 참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반신반의였는데, 생각보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군.
이 스페셜 무대의 주동자가 나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구희승이 연습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기어코 나를 죽이려고! 아이고~ 어머니~”
“선생님 어머니는 지금 뜨개질 학원에 계시잖아요.”
구희승이 틈날 때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다는 목도리를 자랑한 탓에 알고 있다.
“하아아아아…….”
이제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대자로 뻗은 구희승이 길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어쩌다가 너네랑 얽혀서는…….”
“저희는 귀엽고 깜찍한 매력이죠!”
“임마, 네 키를 생각해라.”
“그거 차별이에요!”
한수현의 손목을 잡은 최승하가 구희승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도 수현이만큼 귀엽지 않아요?”
“아니요. 승하 형이 저보다 귀여워요.”
“뭐? 근데 나는 이런 거 안 빼! 고마워!”
“……승하야, 우리 양심 챙기자.”
“으음, 류인 형이 이런다고?”
“……맞아.”
“유하 너?!”
“에휴! 형님은 철 좀 드십시오!”
“윤재가 먹여주는 철이라면 먹을 수 있을지도?”
시끌벅적한 연습실에서, 나는 손익계산을 이어갔다.
우린 이번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연말 시상식 속 무대는 보통의 음악방송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화제성을 자랑하니까.
게다가 AMA는 글로벌함을 우선시하는 만큼, 세계 각국에 동시 송출된다.
명훈이의 아이들인 우리에겐, 이것만큼 가성비 좋은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미션 때문에 남희연을 찾아간 거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건…….
기회다.
“저는 사실, 너무 설렙니다! 작년엔 사실 숙소에서 시상식을 보며 굉장히 부러웠는데…….”
순식간에 연습실 분위기가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팬들이 지금 이 대화를 들었다면, 명훈이의 목숨은 보장하기 힘들 거라 확신하겠다.
왜인지는 몰라도 눈가가 촉촉해진 구희승이 차윤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야, 원래 다 그래. 윤재 너, 기죽을 필요 하나도 없다?”
신유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잘 해내자……!”
“예!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하하, 윤재는 맨날 최선 다하잖아.”
류인의 말에, 최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팬분들이 윤재 춤출 때마다 몸 부숴질 것 같이 춘다고 하시던데?”
“가, 갑자기 칭찬하지 마십시오! 칭찬을 들으려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닙니다! 그, 그냥 저희가 연말 시상식에 참석한다는 게 신기해서…….”
“뭐야? 윤재 또 울어?”
“안 웁니다! 제가 맨날 우는 줄 아십니까!”
“아무래도 윤재 형은 자주 우시긴 하죠.”
금세 차윤재를 놀리는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의 호출이라는 핑계였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다.
나는 곧장 사옥의 고층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여긴 직원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꽤 애용하고 있다.
드르륵, 탁!
칸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는 괜찮은 척 꾸민 얼굴을 거둬냈다.
언제나 그랬듯, 헛구역질을 해도 투명한 위액만 나올 뿐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속이 편해진다.
뒤집힌 속이 역해서 연습실에서도 멀쩡한 척하기 영 힘들었거든.
표정 관리도 귀찮긴 하다만, 이건 익숙하기도 하고…… 걱정을 살 바엔, 차라리 낯짝을 관리하는 쪽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결론이다.
‘아까 먹은 점심이 무리였나.’
사실 몸이 이 지랄 난 이후엔, 음식 자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멤버들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난리니, 이렇게 될 수밖에.
하지만 뭐, 그 녀석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자기 입으로 안 좋은 곳은 하나도 없다는데, 매일 안색도 안 좋으니 걱정되지 않겠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주르륵.
“……허.”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을 본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연습실에서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일 날 뻔했군.
벽에 달린 티슈를 뽑아 대충 코를 틀어막은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빌어먹게도 이 타이밍에 성좌와의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 그렇지, 그렇지. 내 신력이 자네 안에서 날뛰는 그것을 어느 정도 막아줄 테지만, 작은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거라네.
- ……작은 충돌이라면?
- 뭐, 두통, 오한, 발열, 식욕부진, 근육통, 몸살, 피로감, 흉통, 코피, 메스꺼움, 빈혈, 구역질, 신경통을 동반한-
정말 다채롭기도 하군.
그나마 입에서 피가 흐르진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차라리 이 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과거의 업보로 남보다 못한 사이였던 멤버들이었다면…….
내 몸 상태가 어떻든 그다지 큰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등신이 아닌 이상, 모를 리 없다.
이 녀석들이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나는 절대 들킬 생각이 없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