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263화
“그러고 보니 해온이 네가 연기를 곧잘 했더랬지!”
허위 매물이라니까요.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눈을 반짝입니다!]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어서 수락하라고 합니다.]
메시지를 가볍게 무시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보단 다른 멤버들이 나가서-”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수락하면 300골드를 후원하겠다 약조합니다!]
“고생하는 꼴을 볼 수는 없죠. 제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신뢰가 담긴 낯짝으로 말을 이었다.
“맡겨만 주세요.”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뒷목을 부여잡습니다!]
* * *
성해온이 골드에 넘어가 또다른 스케줄을 덥석 물었을 무렵.
스위치들은 경악에 빠졌다.
- 수영 비하인드 뜸 ㅅㅂ
- 자자자잠깐만 침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는데
- 류인아 제발 나와 결혼해 주라 내 집이 되어주라 내 사랑이 되어주라
- 이 세상에 이 남자가 단 한 명이라는 사실에 박탈감이 몰려옴
아체대 수영이란 무엇인가?
기깔나게 뽑아놓은 종목이지만,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기껏 해봐야 입장할 때만 제대로 몸을, 아니, 선수를 볼 수 있는!
맛못알 MBS의 진가가 드러나는 종목이 아니던가!
사실 류인은 금메달리스트답게 꽤 많은 분량을 받았다.
하지만.
단체전인 특성상, 기껏해야 몇 초였다.
그럼에도 류인은 레전드 장면을 남겼다.
가장 먼저 터치다운한 뒤, 물 밖으로 나와 웃으며 머리를 터는 장면 말이다.
이건 이미 스위치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았다.
그래.
근돌은 그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
근돌은 조용히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놨다.
지금 밥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 탈덕 못 하게 하려고!”
짧게 고함친 근돌은 영상을 눌렀다.
사실 자신과 곽덕배를 포함한 스위치들은 아직까지도 아체대 뽕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거의 혼수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영상을 올리다니.
“극악무도한 놈들…… 진짜.”
추진자가 성해온일 거라곤 추측조차 하지 못한 근돌이 말을 이었다.
“천재 아니야?”
어떻게 이걸 남길 생각을 했을까.
영상은 브이로그 형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 해온) 오늘은 류인이 연습하는 거 보러 갈 거예요. 음, 따지자면 서프라이즈일까요. ]
캠코더를 쥔 건 성해온이었다.
성해온의 옆에서 활기차게 떠들던 멤버들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살을 가르고 있는 류인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온 줄도 모르고, 연습에 매진하는 류인의 모습이 캠코더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근돌이 의문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성해온?”
잊지 말자.
근돌은 탑티어 홈마였다.
지금도 GK라는 닉네임으로 스위치판 네임드를 먹고 있고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삼각대조차 없는 환경에서, 조금의 떨림조차 없는 촬영.
게다가 스무스한 줌과 빠르게 움직이는 피사체를 조금도 놓치지 않는 노련함.
캠코더야 그냥 쥐기만 하면 찍히니 누구나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찍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다.
봐라.
멤버들이 캠코더를 같이 보자며 달려들고 있음에도, 화면이 지진 난 듯 흔들리긴커녕…… 평온 그 자체잖아.
……대체 어떻게?
혹지 예전에 찍사 경험이 있나?
하지만 근돌은 생각을 이어갈 수조차 없었다.
완벽한 피사체에 완벽한 촬영 실력.
이 흠잡을 데 없는 콤보로, 정신 나간 장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잔, 잔근육이…….”
안 그래도 강력하게 닫혀 있던 근돌의 탈덕문이 더욱더 굳건해진 날이었다.
* * *
우리가 오늘 카메오로 출연할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한양에서 제일가는 권세가인 영의정댁의 장남, 윤희재.
윤희재는 남자 주인공답게 수려한 외모를 겸비했고, 문과 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수재다.
동시에 한양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의 아비인 윤홍택은 어마어마한 야심가로 윤희재를 자신이 짠 판의 값비싼 말로 써먹으려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묻는다면, 이해관계가 맞는 권세가의 여식과 강제로 혼약시켜 집안의 권세를 키우려 한다는 것이지.
심지어 그 집안 여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윤희재를 짝사랑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
몇 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역죄로 처형당한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참고로 둘은 어린 시절, 약혼자 사이였다.
그래.
윤홍택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약혼자 집안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하지만 그 집안의 어린 여식은 도망쳐 살아남았고, 윤희재는 지금까지도 몰래 그녀를 돕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줘 봤자, 여자 주인공에게 윤희재는 치가 떨리는 가문의 장남일 뿐.
대충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사극 로맨스다.
참고로 작품의 서브남주인 세자도 이 여자 주인공을 좋아해서…… 음, 삼각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딱 한 번 출연하는 윤홍택의 차남, 윤희서.
참고로 형인 윤희재와 다르게, 출세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윤홍택이 진작 풀어놓은 망나니 같은 존재다.
그래.
드라마 측에서 말한 두 명의 카메오.
하나는 차남 윤희서.
다른 하나는 그 윤희서의 친우 역이다.
그리고 나는.
“형님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십니까?”
차윤재와 함께 출연하게 됐다.
이 녀석을 대사 비중이 조금이라도 있는 윤희서로 보내려 했지만, 차윤재가 기겁하며 반대했다.
“저는 그냥 얼굴을 비치는 것만으로도 떨립니다……!”
“뭐, 떨릴 게 있나.”
내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차윤재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서유현 선배님이 주연 아니십니까! 저는 긴장되어서 잠까지 설친, 허어억!”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한 차윤재가 입을 텁, 가렸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주인공 ‘윤희재’ 역을 맡은, MH의 간판배우.
서유현이 말이다.
호불호 없이 모든 연령대에서 먹히는 얼굴답게, 단정하게 잘난 얼굴이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서유현이 우리 둘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러곤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음, 오늘 촬영은 두 분이 오신 걸까요?”
“예! 그렇습니다!”
“하하, 추우시죠. 입김 나시는 것 봐.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오늘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이은 뒤 웃으며 등을 돌린 서유현에, 차윤재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이렇게 오래 말을 나눠본 건 처음인데, 역시 친절하십니다!”
“흠.”
* * *
내 단독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감독이 말을 붙였다.
“우리 라이트온은 촬영장 오자마자 싹싹하더라고. 인사도 잘하고, 방긋방긋 잘 웃고.”
나를 훑은 감독이 말을 이었다.
“근데 난 그게 걱정되는 거지. 비중이 큰 캐릭터는 아니지만, 윤희서는 재밌는 놈이거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나는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계속 가니까 기분 상하지 말고, 오늘 잘 부탁해요?”
나는 약간의 우려를 표하고 있는 감독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서.
곱게 자란, 철없고 이기적인 도련님.
주인공인 윤희재의 완벽함을 더더욱 돋보이게 해줄 일회성 조연이자…….
영의정 윤홍택이 장남인 윤희재에게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개연성을 만들어줄 인물.
즉,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인성이 덜된 윤희서를 연기해야 한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자네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잘 어울린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실 나도 대본을 받자마자 조금 놀랐다.
……그냥 성해온 조선 시대 버전이던데?
“카메라 풀샷에서 클로즈업샷으로 매끄럽게 들어가!”
“예!”
상념을 깨는 감독의 지시와 함께, 타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제일가는 권세가의 자택답게, 고운 햇살이 들어오는 고급진 방.
나는 삐딱하게 앉은 채 서책을 지루하게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누가 봐도 더럽게 읽기 싫어하는 낯짝으로 눈살을 찌푸리던 윤희서는 이내 눈을 도로록 굴린다.
그리고 서책을 냅다 집어 던진다.
바깥에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드르륵-
“도련님!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당과를…….”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다과상을 가지고 들어온 윤희서의 몸종, 돌패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상을 조용히 내려놓은 뒤, 문 앞에서 대자로 드러눕는다.
“도련니이임! 도련님! 이번에도 몰래 나가실 작정이라면 저를 밟고 가십시오!”
“…….”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얼마 전에 최승하가 이렇게 매달린 적이 있어서 기분이 조금 묘하군.
여기서 윤희서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럴 순 없다며 외출을 포기할까?
그럴 리가.
“오냐.”
이 망나니는 고민도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안 그래도 방바닥이 차갑고 딱딱했던 참인데, 물렁하고 따끈하니 썩 나쁘지 않구나.”
자신의 등을 쿨하게 밟고 문을 연 윤희서에, 몸종이 다시 한번 매달린다.
“도련니이이이임!”
“밥을 많이 먹으니 화통이 참 좋단 말이지.”
윤희서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혀를 끌끌 찬다.
“돌패 너는 내일부터 솥에서 콩만 골라 먹도록 해.”
“도련니이이이임!”
눈물겨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지금 나가시면 대감마님에게 제가 혼납니다! 도련님은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셔요?”
“돌패야.”
몸을 낮춘 윤희서는 눈을 접어 웃으며, 자신의 몸종에게 속닥인다.
“아버지는 나에게 관심이 없단다. 알면서 그러니.”
문을 연 윤희서는 부채를 촤락, 펼치며 입꼬리를 올린다.
“잘난 형님이나 뫼시거라.”
“컷!”
세트장에 사인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나는 상대 배우에게 한달음에 다가갔다.
“배우님, 괜찮으세요!”
등을 밟혔던 돌패 역의 배우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럼요. 세게 밟지도 않으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양심이 있지.
생판 남의 등판을 밟아놓고 아무렇지 않을 린 없다.
굉장히 미안하다는 소리다.
“그럼 이따가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딸내미가 초등학생인데 아이돌을 좋아하거든요. 오늘 촬영에 라이트온 온다고 하니까, 막 난리를 치더라고요. 아빠 부럽다고.”
“이거 제가 영광인데요.”
주거니 받거니하고 있던 순간, 녹화된 씬을 다시 한번 확인한 감독의 눈이 커졌다.
“희서, 아니! 해온 씨! 연기 잘하네? 허…… 나는 깜짝 놀랐잖아. 혹시 전문적으로 트레이닝을 받았나? 응? 말이 안 되는데.”
감독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아이돌 출신도 많이 찍어봤거든. 근데 카메라라고 다 같은 카메라가 아니라…… 그 친구들도 처음엔 막 절고 그러거든.”
내가 비즈니스 낯짝을 걸친 채, 적절한 리액션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누군가가 대본 뭉치를 들고 급하게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뛰어와? 위험하게. 널린 게 선인 거 몰라!”
“그으,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
“뭔데?”
땀까지 흘린 스태프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작가님이, 급하게 라이트온 부분, 대본을 바꾸고 싶다고 하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