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264화
이 드라마의 극본가는 라이트온과는 나름대로의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배우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연기의 신>의 심사단 중 하나였던 여정민.
여정민이 약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쓴 극본이 바로 <한양연가>다.
“윤희서…….”
배역에 대한 정보가 적힌 노트를 펜으로 톡톡 친 여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매력 있는 인물로 빌딩했으나, 그 애매한 입지 때문에 일회성 조연이 되어버렸다.
16부작.
편성된 회차는 한정적이었고, 여정민은 이 안에서 다뤄야 할 게 많았다.
권세가의 탐욕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니만큼 정치적인 권력다툼과 촘촘한 관계성까지 담아내야 했으니까.
여기서 윤희서의 서사까지 담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는 형제간의 애정 싸움도 고려했지만, 그것도 영…….’
윤희재의 라이벌이 될 세자를 치워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그냥 버려야지.
때론 이런 선택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여정민은 윤희서에 대한 미련을 깔끔히 털어냈었다.
오늘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카메오로 라이트온이 섭외될 것 같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여정민이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이 두 배역은 적당히 얼굴이 되면서, 화제성도 있는 이를 꽂을 생각이었다.
윤희서의 대사는 고작 몇 줄.
그 친우의 대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성해온, 성해온…….”
여정민이 입안에서 이름 석 자를 굴렸다.
그때 잘하던 친구잖아.
때마침 한가했던 여정민은 검색엔진에 라이트온을 검색했다.
그녀는 스마트폰도 즐겨보지 않는 편이고, 뭘 본다 해도 영화나 드라마였기에 라이트온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뭐, 잘살고 있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여정민의 눈이 커졌다.
이날은 아체대의 다음 날이었기에, 온갖 연예뉴스가 즐비했던 것이다.
“아체대…… 그 가수들 불러놓고 하는 프로그램이었나?”
이런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여정민은 한 기사를 클릭했다.
성해온의 양궁 영상이 첨부된 기사를 말이다.
* * *
“간신히 넘겼어.”
여정민이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들이켜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냥 해도 될 걸, 굳이 수정을 하겠다고 나서서…… 내가 이 짓 다신 안 한다.”
“다시 돌아가도 수정하실 거 다 알아요. 작가님은 원래 한번 꽂히면 어떻게든 해내시니까.”
“유현이 너, 아주 내가 편해졌어?”
“그럼요. 작가님이랑 제가 남인가요.”
원래도 안면이 있었지만 프로그램에 심사단을 맡은 이후, 둘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여정민이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 죽겠네. 이 나이 먹고 밤새 극본 수정이라니. 수명을 내가 깎아먹는다, 내가.”
“더 재밌어졌던데요.”
“아부는.”
“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 칠 사람인가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피식 웃은 여정민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서유현이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기 때문에.
단독 촬영을 끝마치고 나온 성해온에게 말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서유현은 은근히 선을 긋는 타입이다.
모두에게 친절하면서도, 필요 이상의 관심은 절대 두지 않는 성격.
‘흐음.’
둘이 친분이 있는 모양이네.
결론을 낸 여정민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유현이 넌 아체대라는 프로그램 본 적 있니? 나는 이름만 들었지, 그렇게 본격적으로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인 줄은 몰랐다?”
“그럼요, 저는 그거 본방송으로 봤거든요.”
“뭐어?”
여정민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너도 스마트폰 잘 안 보잖아. 끽해봐야 지 공식 팬클럽만 가입되어 있는 놈이, 그걸 본다고?”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음, 집에서 대본만 볼 것 같다?”
“하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 * *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음.”
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를 응시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연기 제안을 받았을 당시에 메시지를 보냈던 성좌와 동일인물인 걸까.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딱히 궁금하진 않았는데…….
말했다시피, 난 연기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말이다.
원하는 걸 이뤄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성좌, ‘희곡의 설계자’가 약속했던 300골드를 후원합니다.]
[성좌, ‘희곡의 설계자’가 다시 생각해 보라며 100골드를 후원합니다.]
아무리 골드를 바른대도, 내 마음이 바뀌진 않을 거다.
[성좌, ‘희곡의 설계자’가 어찌 됐든 만나서 반갑다며 100골드를 후원합니다.]
씀씀이가 크군.
괜찮은 놈일지도.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뒷목을 문지릅니다.]
[성좌, ‘희곡의 설계자’가 당신이 더욱더 돋보이기를 원합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여기서 더 추가된다면, 이 녀석의 담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형님.”
기밀 사항이라도 전하듯, 내게 다가온 차윤재가 작게 속삭였다.
“시, 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과연.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다.
“갑작스러운 분량 추가라니요. 저는 대사가 없었을 때도 떨렸는데! 물론 기껏 해봐야 몇 줄이지만,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녀석이 처량한 얼굴로 나뭇가지를 들어 흙바닥 위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차윤재의 심정이 바닥에 그려졌다.
ㅠㅠ
“너도 잘해.”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위로가 아니라, 정말인데.”
흙바닥에 그려진 눈물을 발로 뭉개 지워낸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무대에 설 때, 너 표정도 하나하나 연습하고 연구하잖아.”
“그거야…… 계속해서 다른 감정을 전달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거랑 뭐가 다른데?”
“예에?! 연기는 그것과!”
말을 하다가 멈칫한 차윤재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이내.
“……! 생각해 보니 유사한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렇다니까. 중간은 갈걸.”
“예! 덕분에 안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차윤재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그 반짝이던 눈에서 반짝임이 증발했다.
오들오들…….
나와 차윤재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은 채, 온몸을 달달 떨었다.
아까까진 버틸 만했다만, 딜레이가 예상보다 길어지며 우리의 촬영도 밀린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에선 번번이 발생하는 일이라, 딱히 놀라울 건 아니었다.
우리 말고 다른 이들도 강추위 속에서 대기 중이었으니까.
주연들도 바깥에서 대기하는 마당에, 우리가 팔자 좋게 내부에서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휘잉, 소리와 함께 차디찬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에츄!”
재채기와 함께 차윤재가 발을 달달 굴렀다.
2월의 첫째 날.
매서운 추위가 당연한 날이긴 했으나, 더럽게 추웠다.
나는 패딩 안주머니 속 핫팩을 매만지며, 근처에서 씬을 촬영 중인 서유현을 응시했다.
‘대단하긴 하군.’
아무리 사방에서 장비로 강풍을 막고 있다지만, 이 추위에 미동도 없이 연기를 이어가는 게 말이다.
“서유현 배우님은 참 멋있으십니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차윤재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제 눈엔 형님이 더 멋있으셨습니다!”
“……?”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안목이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동료애가 넘치는 분위기에 흐뭇해합니다.]
차윤재는 아까 감독이 날 칭찬했을 때 자신까지 기분이 좋았다며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이 훈훈함을 직격탄으로 맞을 바엔, 놀리고 말지.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미래를 예상하며 비통해합니다.]
“서유현 선배님보다, 내가?”
“예! 일단 저한텐 그랬습니다!”
“전해 드려야겠다.”
내가 장난식으로 벌떡 일어나자, 차윤재가 경악하며 내 패딩 자락을 붙잡았다.
“형니이이이이이이이임!”
* * *
[성좌, ‘희곡의 설계자’가 이자와 친분을 쌓으라고 제안합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옅은 빛무리가 어딘가를 화살표처럼 가르켰다.
“……크흡.”
갑작스러운 상황에 웃참을 해내지 못한 나는, 다급하게 주둥아리를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이 성좌가 만들어낸 걸로 추정되는 빛이 정확히 감독의 머리에 내려앉았기 때문에.
참고로 감독은 머리카락을 소유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런 개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만 갑자기 치고 들어오니 방도가 없군.
당연히 이 광경이 보이는 건 나뿐이라, 차윤재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갑자기 왜 웃으십니까?”
“……안 웃었어.”
“분명 들었는데요!”
“착각.”
“이익, 억울합니다! 하루 종일 녹음기라도 들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차윤재가 가슴을 퍽퍽 치고 있을 타이밍에, 스태프가 소리쳤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대망의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내 낯짝이 칙칙해지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NG!”
“…….”
빌어먹을.
우선 지금 촬영은 원래 대본에 있던 씬이다.
그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러하다.
애원하는 돌패를 내팽개치고 나온 윤희서는 친우를 불러내 유유자적 쏘다닌다.
하지만 운도 더럽게 없지.
하필이면 고위 관료들과 함께 걷던 아버지를 마주친 것이다.
윤홍택을 마주한 윤희서는 친우의 손목을 붙잡고 달린다.
그리고 여기서 윤홍택의 시점이 이어진다.
그 역시 윤희서를 알아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윤홍택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자, 주변인들은 무슨 일이냐 묻는다.
그리고 거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답하며 윤희서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주변인들이 장원급제한 윤희재에 대한 칭찬을 꺼내고, 윤홍택은 조용히 미소짓는다.
윤희재에게 집착하는 윤홍택의 모습이 강조되는 장면이랄까.
하지만 이 간단한 촬영에서 문제가 생긴다.
“원래 느낌은 그거잖아. 한참을 뛰고, 친우가 옆에서 헉헉대면 씨익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나무라는 윤희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의 감독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안 살아. 힘들어 보이거든.”
직구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맞는 말이었다.
원래라면 문제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 체력이 거지 같아도, 설마 한두 번 전력질주를 못 할까.
이 정도도 못 하면 격한 안무는 어떻게 소화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직까지 아체대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직까지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3분만 쉬고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의 배려로 숨 돌릴 틈이 주어졌고, 나는 곧바로 골드 상점을 불러냈다.
[힐링 포션(B)]
체내에 쌓인 피로감이 사라집니다!
한 단계 올라가는 체력은 덤!
힐링 포션과 함께 힐링을 즐겨보세요!
▲ 7일 지속 후 자동 소멸
안 그래도 요즘 체력이 뒈질 지경이었어서, 한 번쯤 살까 고민했는데.
마침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지.
게다가.
나도 이제 골드 수급이 꽤 자유로운 편이라, 이 정도 소비는 별 고민 없이 할 수 있다.
감개가 무량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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