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 1군 만들기 프로젝트 273화
어마어마하군.
퍼스트 클래스에 대한 첫 감상이었다.
웬만한 아이돌들의 스케줄은 비즈니스로 통일일 텐데, 밀리어스쯤 되면 다르긴 한가 보군.
편안한 좌석에 앉은 나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7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계속 매고 계시고, 휴대전화는 비행기에서 내리실 때까지─]
착륙을 예고하는 기내 멘트에 조금 놀란 나는 감탄했다.
이게 바로 자본의 맛이로군.
홀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얼굴이 좋아졌네, 형.”
거리가 꽤 벌어진 옆자리에서 들려온 소리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나는 칙칙한 낯짝으로 입을 열었다.
“내려서도 그 소리 하면 뒈질 줄 알아.”
“역시 카메라가 없으니 편하게 말해주는구나, 좋다.”
이 막말에도 타격이 없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다.
* * *
- 걱정되네, 인천에서도 힘들어했던 것 같아서.
아까 기내에서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나 했는데.
이런 거였냐.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입국 심사를 끝마치고 발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사방에서 비명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지금 우리의 도착지는 발리.
인도네시아에 속한 곳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K-pop의 화력이 좋은 곳이다.
‘인구가 워낙 많기도 하고.’
그리고 인도네시아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그룹은.
그렇다.
……밀리어스다.
“조심!”
몰려오는 군중 속에서, 경호원 중 하나가 나를 안쪽으로 밀었다.
내쪽으로 돌진한 한 팬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쪽도 밀러스였는지, 별 타격은 없었다.
나는 경호원이 인도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 방심한 순간이었다.
“……! 해온아!”
의현이 나를 끌어당겼으나, 한발 늦었다.
아, 이런.
* * *
“아이고, 해온 씨 혹시 비행기 멀미해요?”
제작진 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기내에선 때깔이 최상이었습니다만.
밀리어스 응원봉을 들고, 내게 달려온 그분의 입에서 나온 두 글자는 의외의 것이었다.
- HAE ON!
아직 해외 파이는 없다시피하니, 방심한 거다.
인도네시아는 특이할 정도로 ‘K-pop’ 그 자체.
한 그룹만을 좋아하기보단, 여러 아이돌 그룹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간과했다.
아마 이나, 유O브의 영향으로 우리를 알고 계시는 거겠지.
그런 사유로, 스위치의 피가 조금 흐르는 걸로 추정되는 밀러스 세 분과 동시다발적으로 접촉을 하게 됐는데…….
진심으로 뒈질 것 같았다.
여기서 이 정돈데, 라이트온이 단독으로 출국할 땐 기절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걱정될 정도로군.
“이것 좀 마시고 계세요. 어휴…… 7시간 동안 고생 많이 하셨나 보네.”
내게 물을 건넨 제작진이 떠났다.
달칵, 물 뚜껑을 대신 따서 건넨 의현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의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중얼댔다.
“죽일 거야…….”
“하하, 정말?”
“…….”
말을 말자.
나는 동태와 다를 바 없는 낯짝으로 촬영이 시작될 곳을 응시했다.
[Welcome to Bali]
커다란 피켓을 든 현지인이 저 멀리서 우릴 반기고 있었다.
프로그램적 연출이었다.
나는 곧바로 눈깔에 생기를 주입한 채 다가섰다.
동시에 현지인이 우리 목에 생화 목걸이를 걸어줬다.
감사를 담아 인사하자, 미소 지은 현지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반팔티를 입어달라는 사전 요청이 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다만, 정말이군.
한국 예능은 변화가 없다.
지금 이것처럼 말이다.
나는 화려한 야자수가 그려진…… 누가봐도 ‘나 여행 옴’을 티내는 관광 셔츠를 내려다봤다.
……입으라면 입어야지.
군말없이 셔츠를 받아들인 내가 그것을 몸에 걸치자, 현지인이 휘파람을 휘릭 불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충 잘생겼다는 뜻이었는데, 예능에 섭외된 분답게 텐션이 높았다.
뒤이어 발리에 대해 설명한 현지인이 퇴장했고, 나는 셔츠를 내려다봤다.
참고로 나는 휘황찬란한 파란색, 이 자식은 검정색이었다.
어째서.
나도 고른다면 무채색이 좋은데.
1군 특혜라는 데에 손모가지를 걸겠다.
* * *
첫 목적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흐물흐물 늘어졌다.
‘엎어져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촬영 장비가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운 좋게도 이 차엔 카메라나 음향 장비가 붙지 않았다.
이 동선은 굳이 찍지 않아도 된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기사님까지 잠깐 나가셔서, 나와 이 자식 단둘이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냐 묻는다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내가 흐릿한 낯짝으로 눈만 껌뻑이자, 의현이 입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잠깐 쉬자고 말 꺼내볼까?”
“네 낯짝을 치워주면 나아질 것 같기도 한데.”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당신의 쉴 새 없는 막말에 경악합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귀엽기만 한데 무엇이 문제냐며 한 성좌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우리는 발리의 전통 시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딱히 먹거리를 팔거나 하는 시장은 아니고, 옷가지나 천, 악기를 비롯한 공예품등을 파는 시장인 것 같다.
카메라 앞에 선 나는 눈깔을 반짝이며 멘트를 쳤다.
“역시 여행에서 각지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려주는 곳은 시장인 것 같아요. 선배님은 어떠세요?”
“아직 다른 건 모르겠고, 친구랑 여행 온 기분이라 설레나?”
“…….”
의현이 눈을 접어 웃었다.
“음, 설레는 것 같아.”
팔자 좋군.
나는 분위기고 뭐고 인생이 위기에 봉착한 것 같은데 말이다.
“들어갈까, 해온아?”
“예, 선배님.”
그리고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우리에겐 같은 금액의 돈이 쥐어졌다.
- 더 훌륭하게 쇼핑해 내신 분께, 아주 좋은 선물을 드립니다.
- 좋은 거라면…….
- 여러분께 오아시스가 되어줄, 시원한 코코넛 아이스크림입니다!
PD 아니랄까 봐, 말 하나는 번지르르하게 잘하더라.
사실 다음 날 아침이라든가…… 이런 끼니를 두고 내기를 거나 싶었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혹여 이 자식을 굶겼다간 시청자 게시판이 난리가 날 테니.
아이스크림이라.
딱히 구미가 당기는 조건은 아니지 않는가.
[성좌, ‘세상의 파수꾼’이 그런 것치곤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동의합니다.]
일단 이기고 봐야지.
게다가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승부욕이 조금 일렁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곳의 상인분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발리어를 모르는 관계로, 영어를 사용하는 관광객들의 대화를 건너 들었는데…….
일단 절반은 깎고 시작하는 모양.
사실 처음 듣고는 ‘이 정도로 깎는다고?’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열에 아홉은 오케이를 받더라.
현지의 가격이 대체 얼마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여긴 기가 센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신유하 같은 녀석이 방문한다면, 순식간에 참담한 결과가 나올 거라 장담하겠다.
- 여기선 흥정이 필수거든요. 의현 씨랑 해온 씨는 흥정에 자신이 있으신가요?
아까 PD의 말이 이해된다.
하지만 입 터는 건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로 들른 가게에서 장렬히 강매를 당해 버렸다.
[성좌,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험가’가 당신을 위로합니다.]
“…….”
나는 구매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손에 들려진 물건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거…….
생각보다 실전이군.
내가 심각한 얼굴로 전략을 짜고 있을 무렵, 의현이 다가왔다.
“그건 뭐야, 해온아?”
나도 모른다.
그냥 길을 걷던 중에 붙잡혔고, 구경을 해볼 목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결제를 끝냈더라.
내가 칙칙한 낯짝으로 특이한 무늬의 넓은 천을 바라본 순간, PD가 입을 열었다.
“해온 씨, 좋은 선택입니다! 그 천은 발리에서 쓸모가 많은 물건이라서요. 목적지엔 없지만, 발리의 사원은 다리를 드러낸 채로 출입할 수 없거든요.”
나는 내가 입고 있는 반바지를 내려다봤다.
아하, 그런 거로군.
물건을 설명하시며 연신 다리를 가리키시기에, 뭔가 싶었는데 그런 의미였나.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자기합리화했다.
“좋은 소비였네요.”
“…….”
“그러게,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의현이 천을 내 머리 위에 두르며 웃었다.
“피부 안 타겠다, 그렇지?”
화려한 셔츠에, 이 천까지?
아주 볼만하겠군.
이 와중에 제작진들은 이 예능에 최적화된 비주얼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미안하지만 혼자 당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의현의 어깨를 찔렀다.
“선배님도 하나 구매하시는 게 어떨까요?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될까?”
“……?”
빛과 같은 속도로 나온 대답에, 내 낯짝에 의문이 감돌았다.
물론 저 자식의 머리에도 이 화려한 패턴의 천을 둘러야겠다는 일념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구매하는 걸 보니 재수 없는데.
가게로 걸어간 의현이 내 손에 들린 것과 같은 패턴이지만, 다른 색상의 천을 구매해 흔들었다.
열받는 낯짝이로군.
하지만 나는 속마음과 다르게, 후배답게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선배님, 제가 해드릴게요.”
“……정말?”
이봐.
왜 감동받은 얼굴인 거냐.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나는 의현의 등 뒤로 보이는 상인분께 심각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나보다 저렴하게?
심지어 이 자식은 깎을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억울한 낯짝으로 서 있을 무렵, 의현이 말을 걸었다.
“있잖아, 해온아.”
“예.”
“저기 가볼까?”
의현이 전통 의상을 파는 가게를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가게에 도착하기 무섭게, 의현이 의상 하나를 들어 올렸다.
“어때?”
굉장히 화려하고…… 또 화려하군.
하지만 이따구로 리액션을 할 거라면, 당장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했다.
“신기하고 예쁘네요. 천 자체가 화려하기도 하고, 장식 달린 걸 보니 무대 의상도 떠오르고요.”
“무대 의상?”
“외적으론 완전히 다르지만, 무대 의상에도 화려한 장식 많이 붙잖아요. 입을 땐 조금 따갑긴 한데, 조명을 받으면 예쁘긴 한 것 같아요.”
“그렇구나. 불편해?”
의현이 시무룩한 낯짝으로 옷을 제자리에 걸었다.
뭐 하는 새끼야?
“같이 입어보자 하려 했어.”
돌았나.
참고로 커다란 천이 맨몸을 휙휙 두르는 식의 의상이었다.
“……음, 이걸요.”
내가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한 순간, 의현이 웃으며 속삭였다.
“장난이야. 어깨도 파여 있고, 우리가 입기엔 조금 수위가 높으니까.”
……죽일까?
아냐, 참자.
나는 마음속에 참을 인 자를 새겨넣었다.
종잡을 수 없는 새끼와 함께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