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나니 천재 작곡가 회귀하다-15화 (15/118)

15화

그로부터 며칠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현승은 사내 작업실로 짐을 모두 옮겨 와 세팅까지 마친 채였다.

“현승아!”

김 실장이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찾아왔다.

“왜 이렇게 신이 나셨어요?”

“친구가 옆집으로 이사 온 느낌이랄까?”

“이사 오기 전에도 매일 봤잖아요.”

“끼니마다 같이 구내식당 갈 수 있잖아?”

현승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찰나.

똑똑―.

뒤따라 누군가 개인 작업실 문을 두들겼다.

“커피머신 설치하러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김 실장이 안주인인 양 손짓했다.

“갑자기 뭔 커피머신이에요?”

“너 커피 자주 마시니까.”

“실장님이 사 주신 거예요?”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김 실장이 슬쩍 덧붙였다.

“지니가 발 빠르게 먼저 샀다고 하더라고.”

“제가 아는 서지니?”

“응, 그 서지니가 말이야. 나도 좀 놀랐어.”

김 실장이 현승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요즘 지니 주가 많이 올라서 엄청 바빠.”

이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바쁜 와중에 네 커피머신을 사 주고 싶다고 연락이 왔더라고.”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지니가 네 말은 좀 잘 듣기도 하고, 선물도 하는 거 보면….”

“뭐, 선물해 줄 만한 결과를 거뒀잖아요?”

“그런 것보다는 뭔가 조금 더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어서….”

현승이 김 실장의 말을 자르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실장님, 혹시 전래 동화 좀 보셨어요?”

“그냥저냥 어지간한 건 봤지.”

“까치, 제비, 강아지, 호랑이까지.”

그러고는 낮게 덧붙였다.

“짐승도 은혜를 갚을 줄 알잖아요?”

“그래서?”

“하물며 서지니 씨는 사람이잖아요.”

이내 현승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냥 은혜 갚으려는 거겠죠.”

“그런가….”

“그건 그렇고 왜 온 거예요.”

김 실장은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하려는지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작업은 누구랑 하고 싶어?”

“제가 고르면 다 돼요?”

“골칫덩이였던 지니까지 성공시켰잖아.”

김 실장이 틈을 두고 덧붙였다.

“웬만하면 다 오케이 될 분위기야.”

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수첩을 “사락.”하고 넘기던 김 실장이 말을 덧붙였다.

“우선 신곡 준비 중인 가수 리스트를 싹 적어 왔어. 다 돈 될 만한 작업이 될 거야.”

현승이 “잠시만요.”라며 김 실장의 말을 잘랐고.

“혹시 연습생 월말 평가 결과 언제 나와요?”

뜬금없는 질문에 김 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여기에 아는 연습생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고요.”

“마침 오늘 월말 평가가 있었어.”

“결과는요?”

“당일 저녁에 나오니까….”

김 실장이 제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곧이겠네.” 하며 중얼거린 뒤 재차 되물었다.

“뭐야, 왜 물어본 거야?”

대강 얼버무리던 현승이 일순 재미있는 장난을 떠올린 악동처럼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물었다.

“다음 작업은 내일 결정해도 되죠?”

김 실장이 쉽사리 답하지 못한 채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현승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지…?’

왠지 모르게….

오싹함이 몰려오는 건 그저 기분 탓이리라 여겼다.

* * *

모두가 잠든 새벽.

“아린아, 어쩌면 애매한 재능 때문에 네 청춘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정아린은 연습실에 쭈그려 앉은 채로 트레이너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너에게 내가 마냥 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찬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정말 너를 위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어.”

“나도 아린이 너한테 무조건 할 수 있을 테니 버티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만 그게 어쩌면 아무런 대책 없는 무책임한 위로는 아닐까 싶기도 하고….”

울고 떼를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제발, 진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몇 년간 함께한 트레이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미 결정 난 사항이야. 기숙사 짐은 이번 주 안에만 빼면 돼.”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결과를 전한 트레이너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정말 이렇게 끝인 건가….”

모두가 빠져나간 연습실에서 몇 시간을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연습실을 나서야 하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연신 중얼거리기를 잠시.

“그래, 가자….”

이제 꿈에서 깨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십 대 태반을 연습생으로 보냈다.

지독하리만큼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팠지만….

‘이제 뭘 해야 하지….’

우직하게 판 우물이 어쩌면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이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을 나서서는 개인 캐비닛으로 향했다.

끼이익―.

딱 캐비닛을 열자마자 든 생각은.

‘볼품없다.’

약 6년이라는 시간을 지내 온 곳이 아니던가?

일반적인 십 대 후반의 여자아이가 쓰는 캐비닛이라고 하기에는 그 흔한 화장품 하나가 없었다.

연습생으로 지낸 모든 날을 전장에 나가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버티듯 지내 왔다.

그랬던 연습생 생활이 이토록 허망하게 끝나리라곤 정말 조금도 예측지 못했었다.

가방 안에 트레이닝복과 비상약 그리고 밴드 등의 개인 소지품을 대충 쑤셔 넣었다.

쾅―!

허망한 마음에 캐비닛의 문을 거칠게 닫던 찰나였다.

툭―.

자그마한 직사각형의 종이가 펄럭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

종이를 주워 보니 LS 엔터테인먼트사의 명함이었다.

‘어라, 그때 그 사람 명함이네….’

문득 연습실을 찾아왔던 작곡가.

“예정대로 낙제하게 되거든 연락해.”

그때는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만 보였는데.

“마음이 동한다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그의 말이 진짜라면, 지금 자신에게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 사내 전속 작곡가 ‘HS’ 」

명함 속 정갈하게 박힌 글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정아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으니까.

뚜르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예, 누구세요.

머지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냐니까요.

전화 속 상대는 짜증이 묻어난 말투로 닦달을 해 왔다.

“안녕하세요. 명함 보고 연락드렸어요.”

- 명함?

“지난번에 연습실에서 뵀었는데요!”

- 연습실? 무슨 연습실?

“월말 평가 준비하던 연습생이요.”

- 뭔 연습생?

“직접 명함도 주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 아아.

아무래도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 월말 평가에서 낙제 후 퇴출 예정이라던?

“퇴출당할 수도 있다고 했던 건데….”

- 그래? 내가 보기엔 퇴출 확정이었는데 뭘.

정아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야?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녀가 잠시 전화를 끊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 어쨌든, 도움받을 생각으로 연락한 거 맞지?

한 차례 망설이던 정아린이 힘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자.

“어디로 갈….”

- 사옥 지상 2층 B 구역 103호

정아린이 장소를 메모하기 위해 다급하게 가방 안에서 펜을 꺼내 들려던 찰나였다.

툭.

맥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뭐야? 진짜…?”

그녀가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자신에게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맞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으나….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는 절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 딱 한 번만.

그냥 속는 셈 치고 ‘HS’를 만나 볼 요량이었다.

* * *

LS 엔터 사옥 내 2층 B 구역은 전부 작곡가들의 개인 작업실로 사용되는 곳이다.

꽤 오랜 시간 연습생 신분으로 지냈음에도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03호 작업실 앞에 다가선 그녀는 쉽사리 문을 두들기지 못한 채 망설였다.

다름 아니라 문득 사내에서 우연히 주워들었던 여러 소문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서지니 원래 이번 앨범 끝으로 계약 해지될 위기였는데, 새로 온 작곡가가 전담해서 살려 줬다던데?”

“듣기로는 잠도 아예 안 잔다던데? 돌고래처럼 하루에 딱 5분만 자고서 곡을 뚝딱뚝딱 찍는다고….”

“그런데 성질이 엄청 까칠하다던데? 서지니도 그 작곡가 앞에서는 꼬리 말고 있었다더라.”

“그래도 이번 일 덕분에 대표님은 물론이고 이사회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면서?”

비록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소문이 무성한 신인 작곡가.

‘혹시 이 이상한 사람이 그 작곡가인가?’

한참을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는 굳게 닫혀 있는 작업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한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저기요―?”

정아린은 살짝 문고리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작업실 내부에서는 사람의 인기척 대신 이상한 노랫소리가 연신 흘러나올 뿐이었다.

- 라비보벳따우…♬

고급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경쾌한 소리에 홀린 듯 작업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붑부바뛰, 라비빼뿌…♬

난생처음 들어 보는 노래였다.

만화 주제곡인가?

그보다 어느 나라 말인 거지?

다름 아니라 현승이 시간이 날 때마다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인 ‘동물의 섬’의 OST 곡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지 모니터가 켜진 채 데스크탑이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중이었고….

걸음을 옮겨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포털 사이트 검색 창이 덩그러니 띄워져 있는 채였다.

‘대체 이런 걸 왜 검색하는 거야?’

검색 창에는 ‘무 값 오르는 요인’이라는 글귀가 입력된 채였다.

아래에는 무 사재기, 무 시세, 무트코인, 무 풀 매수 등….

그녀가 짐작할 수 없는 검색 기록이 주르륵 나열돼 있다.

물론.

이는 현승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 ‘동물의 숲’ 내에서의 무 값을 의미했으나….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정아린 입장에서는 의문만 점차 가중될 따름이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일지도 몰라….’

그녀가 지금이라도 작업실을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끼이익―.

작업실의 문이 열렸고.

“하, 씨. 무 값 또 떨어졌네. 풀 매수했던 건데….”

현승이 작업실로 들어서면서 처음 뱉은 말이었다.

‘무 값? 설마 정말 무에 투자를 하는 건가?’

이내 정아린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은 더러 봤지만….

무에 투자하는 사람을 목격한 건 이번이 생전 처음이었다.

“뭐야? 언제 왔어?”

그제야 정아린과 현승,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기에 이르렀고….

그녀를 무심하게 한번 훑어본 현승이 걸음을 옮겨 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예정대로 낙제된 거 맞지?”

현승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네, 보시다시피 예언하신 대로 됐네요.”

“연습생 생활은 얼마나 했어?”

“음, 아마 햇수로는 딱 6년 차일 거예요.”

“고난과 역경 끝에 퇴출이라….”

현승이 무미건조한 투로 덧붙였다.

“결과가 아쉽겠네.”

정아린이 눈매를 좁혔다.

“혹시 약 올리려고 부르신 거예요?”

“설마.”

“도움을 주실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현승은 한 차례 “음.” 하고 침음을 흘린 뒤 말문을 열었다.

“일단 확실히 해 두자고, 아예 퇴출당한 거 맞지?”

“네, 아주 시원하게 퇴출당했죠….”

“아쉽지만 이미 결정된 퇴출을 번복할 순 없고.”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다른 방법으로 데뷔시켜 줄게.”

“예?”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 준다면.”

정아린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둘은 초면이다. 일면식조차 아예 없는 마당에 호의를 베풀겠다니….

하물며 자신이 시키는 대로 따라 달라는 조건마저 수상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왜? 싫어?”

순순히 승낙하기에는 신뢰가 부족하기도 했을뿐더러 무엇을 요구할지도 염려됐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자신은 ‘LS 엔터에서 퇴출당한 연습생’이라는 꼬리표가 달릴 것이다.

이렇게 사옥을 나서 봐야 타 기획사에서 퇴출당한 연습생을 곱게 봐 줄 리도 없었다.

쉽게 말해 사옥을 나서는 순간 오랜 꿈이 좌절된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려온 길이었는데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면목이 없었다.

이내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 대던 그녀가 한없이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데뷔시켜 주실 수 있는 거 맞죠?”

“그렇다니까?”

“그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시키는 대로.”

그 말에 정아린의 표정 위로 불안이 맴돌기 시작했다.

“네…?”

연예계란 이따금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접대 문화나 스폰서, 그 밖에도 기타 등등….

‘그러고 보면….’

심지어 친하게 지내던 연습생 중 이런 사탕발림에 넘어가 큰 상처를 입고 연예계를 떠난 이들이 수두룩했다.

꿀꺽―.

정아린이 불안이 깃든 얼굴로 현승을 바라보던 찰나.

“자, 내 말을 따라 해 봐.”

“네.”

“나는 한낱 ‘악기’다.”

실로 이상한 요구였다.

“나는 한낱 악기다….”

이윽고.

“말을 할 수 있는 악기가 존재할까?”

“예? 아니요.”

“그럼 악기에 인격이 있을까?”

“아니요.”

“악기는 연주자 뜻대로만 소리를 내겠지?”

“네, 그렇죠.”

연이은 현승의 질문에 정아린이 꼬박꼬박 답하자….

“그래, 그거지.”

현승이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자, 그럼 이제 간단한 테스트를 한번 진행해 볼까?”

“무슨 테스트요?”

“내 곡을 받아서 데뷔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말에 정아린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이게 끝이에요?”

훨씬 더 부당한 요구가 뒤따르리라 생각했다.

전부 수락할 순 없다지만….

어느 정도의 각오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부탁해 큰돈을 만들어 오라든가.

높으신 분들과의 접대에 합석하라든가.

그런 흉흉하고 께름칙한 요구들 말이다.

반면.

현승은 도리어 황당하다는 양 반문할 뿐이었다.

“그럼?”

“네?”

“됐고.”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그럼 이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연주자의 시간을 빼앗는 악기가 있을까?”

그 말에 정아린이 입술만 옴짝달싹하다가 답했다.

“아뇨, 없어요….”

이윽고.

“그래, 바로 그거지. 바로 테스트부터 시작해 보자.”

아무래도.

‘이 사람….’

자신을 정말 ‘악기’로 대할 모양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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