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김 실장은 날이 밝자마자 현승을 데리고 사내 이사실로 향했다.
“들어가자.”
말을 마친 김 실장이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고….
똑똑.
현승은 굳게 닫힌 문에 걸린 문패를 슬쩍 훑어봤다.
- 사내이사 최근식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들어와.”
문 너머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에 김 실장이 문을 느릿하게 열기 시작했다.
“이사님.”
그렇게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문틈 사이로 ‘이사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김 실장,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사내이사직을 역임 중인 ‘최근식’이 김 실장을 한없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반가움이 물씬 묻어나는 투로 인사와 악수를 나누는 사이.
현승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최 이사의 행색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봤다.
최근식 이사.
서글서글한 눈매와 웃음의 흔적을 따라 깊게 팬 주름들이 푸근한 인상을 주는 것과 달리….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칼이라든지, 주름 한 올조차 잡혀 있지 않은 와이셔츠라든지, 얇은 은색 안경테라든지, 하다못해 걸음걸이와 꼿꼿하게 핀 허리만 놓고 보더라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짐작해볼 수 있었다.
뭐랄까?
박 전무와 달리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부류라고 해야 하려나?
“일단 앉지.”
이윽고 최 이사가 사무실 정중앙에 비치된 접객용 쇼파를 슬쩍 가리켰고….
“그나저나, 이 친구는?”
현승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민현승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최 이사가 방긋 웃으며 되물었다.
“아, 자네가 그 작곡가였군?”
“예?”
“자네 소문을 많이 들었거든.”
최 이사가 재차 “앉아, 앉아.”하고 말하며 넌지시 덧붙였다.
“능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이 아주 파다해.”
그리고는 상석을 꿰차고 앉은 뒤에 재차 김 실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 친구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그게 실은….”
“한눈에 봐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 같은데.”
잠시 망설이던 김 실장이 곧바로 수긍했다.
“예, 맞습니다.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LS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김 실장에게 ‘비빌 언덕’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은 최 이사가 유일했다.
옛 사수이기도 했을뿐더러, 임원 자리까지 오른 든든한 선배, 때로는 부모 같은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실제로 김 실장이 사내에서 이토록 입지를 다지기까지 최 이사의 직접적인 도움이 주요하기도 했다.
“도움이라….”
최 이사가 제 턱 끝을 매만지며 나직이 부연했다.
“일단 한번 들어 보자고. 대체 어떤 상황에 처했기에 김 실장이 이렇게까지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게 된 건지 사뭇 궁금해지네.”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인 김 실장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전무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 말에 최 이사가 눈매를 확 좁히며 되물었다.
“박 전무?”
“예.”
“왜? 뭔데?”
이내 김 실장이 자초지종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털어놓기 시작했고 한참 동안 “허.”, “하.”, “이야.”하는 감탄사로 추임새를 넣던 최 이사가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본 뒤에 되물었다.
“그러니까 박 전무가 일본에서 비밀리에 KOK의 컴백 앨범을 준비했다는 거잖아?”
“예, 맞습니다.”
“그리고 KOK한테 음악방송 맨 뒤 순서 주겠답시고 내 새끼들 데뷔무대를 앞으로 당겼고.”
제 와이셔츠 가슴 포켓에서 담뱃갑을 꺼내든 최 이사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중얼댔다.
“박 전무야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이라지만….”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매캐한 연기를 한 움큼 뿜고는 재차 물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작심하고 2팀 물 먹이려는 게 아니면 굳이 KOK애들 일정을 무리하게 당길 필요가 없는 거 아냐?”
박 전무와 오랜 기간 앙숙처럼 지내면서 가히 ‘바닥을 봤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 최 이사였다.
서로가 임원 직함을 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협잡질을 다 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무리 자신과 박 전무가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 한들 이토록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제 공로와 성과를 극대화하겠답시고 온갖 야비하고 비겁한 선택을 하는 정도라면 또 모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 이렇게 훼방을 놓을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현승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순간 담배를 빨던 최 이사의 입술이 멈추고 사이사이로 연기가 흩뿌옇게 빠져나왔다.
“신인 작곡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리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현승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혹시 박 전무한테 원한 샀냐?”
“아뇨, 딱히.”
“그래,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그 말에 김 실장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실은 전무님께서 얼마 전쯤에 현승이한테 별안간 회사 밖에서 차라도 한잔하고 싶다는 내용의 제안을 했다더라고요. 아무래도 현승이에게 눈독을 들이셨던 것 같은데, 이 친구 성격상 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를 않아서….”
최 이사가 “아.”하고 침음하고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봤다.
“그럼 당연히 거절했을 테고….”
비록 신인 작곡가라고는 하지만 계약해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던 퇴물 가수에게 제2의 전성기를 선사한 인물이 아니던가?
아직 가치 검증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눈독을 들일 만한 인재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선을 그었으니….’
사고방식이 이분법적인 편에 속하는 박 전무의 성향을 고려하면 현승을 자신의 사람.
소위 말하는 ‘최 이사 라인’이리라 단정 짓고 적으로 분류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충분히 일리 있네….”
그리고는 확신하듯 재차 중얼댔다.
“박 전무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어찌 됐든 중요한 점은 박 전무의 협잡질로 인해 곤경에 처한 김 실장, 민현승, 심지어 데뷔를 앞둔 정아린까지도 2팀에 소속된 제 사람들이란 사실이었다.
자신을 우습게 본 게 아니고서야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동을 했을 리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과 관계가 끈끈한 김 실장을 건드렸다는 점은 묵과할 수 없었다.
‘민현승이라….’
최 이사가 시선을 옮겨서는 소파 한자리를 꿰찬 채 멀뚱멀뚱 앉은 현승을 바라봤다.
현승은 흘러가는 상황에 큰 관심이 없다는 양 따분함이 역력한 얼굴로 이사실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지도 모르는 친구라 표현하셨지….’
박 전무 역시 자신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었으니 눈독을 들였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황금알을 낳아 줄 친구이려나…?’
민현승이라는 작곡가가 그토록 가치 있는 인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싹이 밟힌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지 살필 겨를이 없지 않겠는가?
“차근차근 해결해 보자고.”
그 말에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되물었다.
“혹시 방법이 있을까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직접 해결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고….”
말끝을 흐린 최 이사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윗선의 힘을 빌려야지.”
그 말에 김 실장이 불안감이 넘실대는 투로 반문했다.
“대표님께 말씀드려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지….”
사내에서의 알력 다툼이라면 치를 떠는 인물이 아닌가?
식구들끼리 밥그릇 싸움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중재는커녕 연관된 모든 이들이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아니, 거기보다 더 위.”
“예?”
“일단 시도나 해 보자고.”
연예계에 전남일 대표보다 ‘더욱 위’라고 칭할 수 있을 만한 이가 몇이나 될까?
김 실장이 의문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최 이사를 빤히 들여다보던 찰나였다.
최 이사가 곧장 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서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근식입니다. 오랜만에 연락 올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김 실장은 연신 깍듯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통화를 이어 나가고 있는 최 이사를 멍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뭐지?’
최 이사가 ‘선생님’이라 칭해 가며 저리 깍듯이 통화할 인물이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예, 그럼 저녁 중에 댁으로 방문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마무리됐고.
“후우-.”
묵은 숨을 길게 내쉬어 보인 최 이사가 김 실장과 현승을 각각 한 번씩 바라본 뒤에 물었다.
“두 사람, 오늘 저녁에 따로 일정 없지?”
“예, 아마….”
“있어도 취소해. 저녁이나 하러 가자고.”
그렇게 누군지 모를 ‘선생님’과의 저녁 약속이 확정됐다.
* * *
독일제 고급 세단 차량 한 대가 고속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그런 세단 안으로는 최 이사와 수행기사는 물론이고, 김 실장, 현승까지 탄 채였다.
“저, 이사님.”
김 실장이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혹시 지금 만나 뵈러 가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앞 좌석에 앉아 있던 현승도 내심 궁금한 모양인지 슬쩍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아마 자네도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있을 텐데….”
김 실장의 의문이 더더욱 깊어지던 찰나.
“굳이 비유하자면 연예계의 시조새 같은 분이시지.”
“예? 시조새요?”
“대표님의 아버지라고 봐도 무방한 분이시고.”
최 이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현역에 계실 때는 전설 같은 분이셨어. 대한민국에 컬러 TV가 처음으로 보급되던 시절부터 연예계에 계셨던 분이기도 하고.”
“설마….”
“대표님의 옛 사수이자 처음 독립해서 LS 엔터 설립하실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셨던 개국공신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
말을 마친 최 이사가 거듭 부연했다.
“응, 전(前) 상무직 역임하셨던 이두석 선생님. 사실상 그때도 직함만 상무셨지, 사실상 공동대표라고 봐도 무방하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김 실장도 이두석 선생님 일화 몇 개 정도는 들어본 적 있을 거 아냐?”
그 말에 김 실장이 긍정했다.
“예, 알음알음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 제가 입사하기 훨씬 전에 LS 엔터 설립 당시 받으셨던 지분 전부 매각하시고 은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최 이사가 “맞아.”하고 답하고는 재차 부연했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으셨지만, 연예계에서 선생님 말씀 한 마디면 껌뻑 죽을 감독, 국장, PD가 어디 한둘이겠어? 그 대단하신 우리 대표님도 막막하다 싶을 때면 제일 먼저 선생님부터 찾으시는데.”
그 설명을 끝으로 최 이사가 “그러니 잘해야겠지?”라며 나직이 되물으며 미소 지었고….
김 실장이 긴장감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두식 선생님이라….’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게 다라고는 하지만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하늘처럼 높게만 느껴지던 대표님 위에 계신 분이니….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제게는 우주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긴장되네….’
이내 김 실장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현승 쪽을 바라봤다.
‘저 녀석….’
이번만큼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윽고.
김 실장이 염려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음?’
조수석에 앉아 꼬물꼬물 스마트 폰을 매만져 대고 있는 현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이라도 해 보고 있는 건가?’
이내 김 실장이 눈매를 슬쩍 좁힌 채 현승이 포털사이트 검색창 위로 기입한 검색어를 살펴봤고….
‘어디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눈매를 확 좁힐 수밖에 없었다.
‘청새치 잘 잡히는 스팟?’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해 연예계의 전설을 만나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에도….
‘저 자식은 어떻게 된 게….’
팔자 좋게 낚시 관련된 것들 따위를 검색해 볼 수 있단 말인가?
‘불가사의야….’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