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단아(端雅)
유명 쉐프가 개업한 이래 2년 만에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전통 한정식집이며,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값비싸기로는 서울 내 일등이지만 그런데도 항상 일 년 단위로 예약이 꽉 차 있을 만큼 문전성시를 이룬다.
“금방 음식 내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간단한 애피타이저 메뉴를 상 위에 내주고는 조심스레 룸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개별 독채 룸으로 되어 있는 만큼 프라이빗함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그런 이유로 유명 연예인, 운동선수, 셀럽, 인플루언서 사이에서 재차 회자 되는 곳이다.
“일단 천천히 식사부터 하시죠.”
전 대표가 타이밍 좋게 샐러드를 집어 들며 말했다.
“현승 씨,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어서요.”
그 뒤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색함이 감돌 때쯤이면 종업원이 음식을 내어 준 덕분에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룸을 채웠다.
머지않아 어느덧 주 요리 차례가 되었고.
성인 남자 손바닥보다 훨씬 큰 접시에, 숙성 한우 1++ 채끝 스테이크 달랑 두 조각이 옹졸하게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대표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식구들 사이에서 밥그릇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현승이 멈칫하며 칼질을 멈추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정확히는 방어한 것뿐입니다.”
“방어라….”
“눈 뜨고 당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는 재차 덧붙였다.
“그리고 으레 있을 법한 사소한 다툼이었고요.”
대표가 덤덤한 투로 되물었다.
“변명하는 건가요?”
“해명이겠죠.”
“뭐, 괜찮습니다.”
전 대표가 제 입가를 냅킨으로 닦고는 낮게 덧붙였다.
“결과가 안 좋았다면 책임을 물었겠지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양쪽 모두 적절한 성과를 냈는데 책임을 물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현승이 눈매를 살짝 좁혀 보였다.
‘전부터 느꼈다지만….’
전 대표는 철저한 ‘성과주의자’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뭐랄까?
사익에 기여만 한다면 수단은 상관없어 보인달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말이죠?”
전 대표가 재차 젓가락을 들며 부연했다.
“이두석 선생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그 말에 현승이 덤덤하게 답했다.
“예, 감사하게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일순, 대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쉽게 도움을 주실 분이 아닌데….”
“그렇습니까?”
“어떻게 구슬린 건지 궁금해지네요.”
사뭇 호기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전 대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정황을 얼추 파악한 채였다.
회사 일은 손바닥 안이다.
방송가의 사소한 이슈라고 한들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정아린의 데뷔 무대에 선생님의 입김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지간해서는 먼저 전화를 걸으시는 일이 없으셨으나 친히 전화를 걸어오시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민현승이 잘 지켜봐라.”
“그놈….”
“당찬 게 물건 같더라.”
안부를 주고받은 뒤 통화 끝자락에서 남기신 말이 연신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두석은 전 대표에게 있어서 만큼은 사수인 동시에 은사이며, 아버지처럼 따랐던 인물이다.
LS를 이토록 키워 내는 과정에서도 칭찬을 들어 본 기억이 몇 번 없을 만큼 칭찬에 인색한 이건만….
어째서 현승을 “콕.” 집어 그토록 칭찬하신 걸까?
이두석 선생님께서 한낱 신인 작곡가에 불과한 현승을 언급하며 잘 지켜보라고 지시하셨으니….
안 그래도 눈여겨보고 있던 차에 호기심이 더 차오르지 않고서 배기겠는가?
그때.
물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인 현승이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윽고.
“대국이 꽤 재밌으셨던 모양입니다.”
대표가 현승의 대답에 턱을 매만지며 “대국?”하고 되물었다.
“네, 내기 바둑을 한 판 뒀거든요.”
전 대표는 불현듯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대표는 LS 엔터를 설립하던 당시 이두석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도움을 간청했었다.
하나, 이두석은 이제 감투 쓰는 일은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을 반복할 뿐이었다.
전 대표 역시 도움이 간절한 입장이었기에 거듭 부탁에 부탁을 청했고….
“그럼 내기 바둑이나 한 판 두지.”
기어이 내기 바둑을 둬서 이기면 부탁을 들어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아주 참패를 당했었지.’
오래전의 일을 떠올린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거의 고난과 역경은 결국 추억으로 자리매김한다.
아주 단순한 법칙에 따라 당시의 기억 역시 추억이 됐다.
지고, 또 지고, 수도 없이 졌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거듭 도전했다.
물론, 이긴 적은 없다.
마지막 대국에서 반집 차이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다만, ‘승리’는 아니었다.
반집 차이의 승리란 곧 압도적인 패배를 의미했으니까.
“이런, 졌군.”
선생님께서 져 주신 거다.
“그래, 젊은 사람 고집은 못 당하지.”
확실히 져 주신 셈이었다.
“약속은 지켜야겠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저 어린 신인 작곡가에게도 그렇게 어물쩍 져 주셨던 걸까?
“혹시 이겼습니까?”
“아뇨, 졌습니다.”
대표가 고개를 갸웃대던 찰나였다.
“반집 차이로, 아깝게 졌습니다.”
그 말에 대표의 미간이 좁아지기를 잠시….
“이야.”
끝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재미있는 친구야.’
모쪼록 이두석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확실히 기대를 걸 가치가 있다는 뜻일 터.
“듣자 하니 계약 조건에 조금 불만이 있다는 것 같던데?”
현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긴 하죠.”
이미 사내 기성 작곡가들과 비스무리한 조건의 계약을 진행한 상황이었으나, 전생에서 받던 대우를 고려해 보면 어떤 계약이든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 측의 성의입니다.”
이내 대표가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프린팅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곧장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두툼한 A4 용지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 조건을 전반적으로 상향시킨 새 계약서입니다. 곧 있을 첫 저작권료 정산 역시 상향된 조건을 반영해 계산한 뒤에 지급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현승이 흥미롭다는 양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흔한 경우는 아닐 텐데요.”
계약 기간 만료 이전에 조건을 상향 조정해 주는 것만 하더라도 이례적인 일인데….
아울러 그 전의 계약 기간까지 포괄적으로 반영해 주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굳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사항도 아닌지라 해 주는 이도, 바라는 이도 없었다.
“흔한 성과를 거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말씀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겠죠.”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던 현승이 피식 웃음 지었다.
‘신경 많이 썼네.’
그간 숱한 계약서를 받아 본 현승이었으나 전 대표가 직접 내민 계약서의 내용은 확실히 자신에게 상당히 유리하고 우호적이었다.
‘흠.’
다만 이상하리 만큼 호의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어떻게 해서라도 곁에 잡아 두겠다는 건가?
‘취할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하고야 말겠다는 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다룰 줄 아는 인물이니 오랫동안 회사를 건재하게 이끌었던 거겠지.
이전 삶에서도 LS 엔터테인먼트는 항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기획사 중 하나였다.
비록 전 대표와 친분이 있거나 했던 건 아니라지만 사업수완에 대한 칭찬이라면 익히 들어왔다.
아마 이런 방식으로 LS 엔터테인먼트를 굴지의 매니지먼트사로 키워 냈겠지.
“천천히 살펴보고 서명한 뒤 김 실장님께 제출하겠습니다.”
계약서에 장난을 쳤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예, 그렇게 하시고.”
말을 마친 대표가 술이 담긴 주전자를 슬쩍 들어 올렸다.
“우선 한 잔 받으시죠.”
손수 도자기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고.
“종종 이렇게 점심이라도 함께하죠.”
현승은 고개를 돌려 잔 안에 든 술을 들이켜고는 답했다.
“예, 좋습니다.”
당장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 대표를 완벽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연예계라는 콘크리트 정글에서 회자 되는 말 중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게 연예계였다.
그저 다들….
서로 간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이들뿐이었지.
전 대표 역시 마찬가지.
비록 지금은 우호적인 인물이라지만 이해와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만약 예상치 못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미 서로를 적으로 분류한 이후일 터였다.
그래, 분명….
서로를 적으로 분류한 뒤의 일이겠지.
* * *
현승은 사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산 뒤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중이었다.
근데….
어제부터 이상하게 로비 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통을 따갑게 쫓아오는 것 같다고 느끼던 찰나.
“민현승!”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너! 아….”
고개를 돌려 보니 김 실장은 무어라 말하려다 황급히 현승을 이끌었다.
“여긴 좀 그렇고 네 작업실 가서 얘기하자.”
끼이익-.
김 실장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물꼬를 트듯 입을 열었다.
“너 어제 대표님하고 밤새 혀가 꼬일 정도로 술을 마셨다며?”
“예? 제가요?”
“대낮부터 식당 술 다 동날 때까지 진탕 마셨다던데….”
“그게 무슨….”
이쯤 되니 대를 거듭하며 구전되는 신화나 설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부풀려지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마 어제 대표의 의전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이들이 아무렇게나 떠들어 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데….’
현승이 대꾸도 귀찮다는 양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래서 아침부터 얼굴이 초췌한 거지? 맞지? 맞네! 맞아!”
“것 참, 그냥 점심만 간단히 먹은 게 전부예요.”
“얌마! 대표님하고 식사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
“누가 들으면 제가 황제랑 식사한 줄 알겠어요.”
김 실장이 심드렁한 현승의 태도에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LS 엔터에 몸담은 몇 년간 단 한 번도 대표와 단둘이 식사한 적이 없었다.
최측근인 임원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경사와 같은 일이겠지만….
현승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됐고, 대표님이 식사하면서 무슨 말씀 하셨어?”
“그냥 종종 식사나 같이하자고….”
“와, 대표님이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다.”
“그런 것 같기는 해요?”
“하물며 계약 조건도 상향시켜 주셨다면서?”
“그것까지 소문났어요?”
김 실장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제주도 박씨 아저씨한테 들었어.”
“그게 누군데요?”
“제주도까지 소문났다는 농담….”
“농담에서 틀 냄새나요.”
현승의 비아냥에 김 실장이 “됐다, 됐어.”하고 중얼대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너는 내 손바닥 안이야.”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곧 첫 정산인데 뭐 할 거냐?”
으레 저 나이대의 남자애들이라면 이런 질문에 고가의 자동차를 산다든지, 시계를 산다든지 하는 답을 말하기 일쑤건만….
“그냥 이사 갈 집 알아보고 있어요.”
김 실장은 예상을 벗어난 답변에 놀란 기색을 띠며 되물었다.
“이사?”
그리고는 재차 장난스레 되물었다.
“이야, 자동차나 시계 같은 건 관심 없고?”
“필요 없어요.”
“의외네? 그 뭐야, 투자하거나 할 생각은?”
“관심 없어요.”
“보려고 본 건 아닌데 무테크에 관심 많았잖아?”
그 말에 “무테크?”하고 되물은 현승이 덤덤하게 답했다.
“아아, 이제 관심 없어요.”
“그래?”
“그리고 그건 그냥….”
자신이 했던 ‘무테크’는 그저 게임 내에서 했던 투자에 불과하다는 해명을 하려던 찰나였다.
“잘 안됐구나?”
그 말에 현승이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뭐, 속 좀 썩긴 했죠.”
김 실장이 모르는 사실 하나.
얼마 전….
동물의 섬 대장정의 막이 내려갔다.
“이제 쳐다보기도 싫어요.”
무테크에 크게 실패한 까닭이었다.
“그나저나 이사는 월세로? 전세로?”
“전세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래? 집 계약할 때 동행해 줄게.”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
“그런 건 어른이 같이 가야 해.”
“저도 어른이에요.”
현승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지금 보여지는 자신의 나이가 어리니….
김 실장이 하는 걱정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꼭 같이 가, 시간 빼 볼 테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쓰읍, 이번에는 내 말 들어.”
다만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현승은 회귀 전 부동산 전문가였다.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음악으로 번 돈이랑 부동산으로 번 돈이 거의 비슷했지.’
실제로 부동산 시세차익을 통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쌓아 부를 축적한 경험이 있었다.
단순히 쌀 때 사고, 비쌀 때 파는 수준을 넘어서 소유자를 여러 법인으로 나눠 세금을 줄인다든지….
자신의 ‘인지도’를 담보로 큰 금액을 대출받아 레버리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형태로 큰 수익을 올리곤 했다.
“진짜 괜찮은데….”
그 덕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용산 인근의 땅 대부분이 현승의 소유지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까.
“분명 말했다! 같이 가는 거야!”
하지만 그런 사실을 김 실장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는 노릇.
“것 참, 알겠으니까 그만 해요.”
“어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자신을 챙겨 주는 어른이 있다는 건 퍽 나쁘지 않았다.
* * *
일사천리로 전셋집 계약을 끝마쳤다.
예상했던 대로 전세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김 실장은 딱히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만.
옆에서 대신 깐깐하게 큰 소리를 내 주는 어른이 있다는 건 꽤 든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지를 새로 해 달라는 둥, 문고리를 바꿔 달라는 둥, 수수료를 깎아 달라는 둥….
더구나 가구 주문이라든지, 포장이사를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을 도와줄 것을 약속해 준 덕에.
“나만 믿고 편하게 다녀오라니까 그러네.”
“원래 이런 일까지 해 주시는 거예요?”
“내가 미쳤냐? 로드도 아니고 실장인데.”
“정말 맡기고 다녀와도 되는 거 맞죠?”
가족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됐다.
가족들에게는….
여행이 끝난 뒤에 이사한 집을 보여 줄 요량이었다.
서프라이즈로.
그렇게 현승이 한참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던 찰나.
“오빠도 처음 해외여행이라 좋구나?”
현아가 들떠 보이는 현승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처음? 아, 그렇지.”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이지.
“나 너무 떨려. 나 짐 빼 놓고 온 거 없겠지?”
“고작 2박 3일 가기를 뭔 짐이 그렇게 많냐.”
“아씨, 좀 천천히 가라고!.”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찾은 공항 내부는 여행객들로 마냥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이었다.
현아는 혹시나 그 인파 속에서 가족들을 놓칠세라 낑낑거리며 뒤를 쫓을 뿐이었다.
현승은 신기한지 연신 두리번거리는 아버지와 걷는 속도를 맞춰 비즈니스 라운지로 향했다.
“현아야, 이제 여기서부터는 신발 벗어야 해.”
“나 이미 인터넷으로 다 찾아보고 왔거든?”
“찾아봤다면서? 너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
그 말에 현아가 “응!”하고 답하자 현승이 고개를 내저어 보이며 설명했다.
“국내선은 안 벗어도 되는 게 맞지.”
“응…?”
“국제선은 벗어야 할 거 아냐.”
“아…?”
“미국 사람들 집에서 신발 안 벗는 거 알아?”
“어…?”
“너 미드 본 적 있지? 걔네들 침대 누울 때 신발 벗는 거 봤어?”
“아니…?”
“그거랑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돼.”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으나….
“아, 몰랐네. 제대로 알아볼걸….”
현아가 다급하게 신발을 벗던 찰나였다.
- 현아야, 신발을 왜 벗어?
아버지가 발견하고는 황급히 수어로 물었다.
- 오빠가 신발 벗는 거라고 하던데.
- 아니야, 얼른 신발 신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승은 기어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민현아, 그렇게 순진해서 어쩌냐.”
“오빠! 나한테 거짓말한 거지!”
“쉿, 공항에서는 조용히 해야 해.”
이내 현아가 주변을 살피며 “아, 응….”하고 답했다.
“이제 가자.”
현승은 현아의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도와준 다음, 앞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한국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승은 자연스럽게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예약해 놓은 비즈니스석으로 이동했고.
현아와 아버지는 어색한지 승무원들과 몇 번이나 맞인사를 한 뒤에야 좌석에 앉았다.
“와-!”
현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비행기 내부를 살피던 것도 잠시.
“오빠! 오빠! 기내식 먹자!”
“기내식?”
“한식이랑 양식 있나 봐!”
그리고는 재차 중얼댔다.
“어?! 라면도 있는데?”
현아가 기내식에 대한 안내 책자를 보며 조잘대던 찰나였다.
“현아야, 혹시 너 현금 있어?”
“현금…?”
“현금 뽑아 온다는 게 깜빡했네.”
“왜애…?”
“기내식은 카드로 안 되거든.”
현아가 풀 죽은 채 물었다.
“그럼 못 먹는 거야?”
그 말에 현승이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아냐, 승무원한테 내려서 카드로 계산해도 되는지 여쭤 볼래? 다른 항공사는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긴 어떤지 모르겠네.”
그 말에 “응, 알겠어!”하고 답한 현아가 곧장 승무원을 향해서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야아, 민현승-!”
이내 현승이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꾸짖듯 말했다.
“비행기에서는 조용히 해야지.”
그때였다.
“이륙을 시작하오니, 자리 이동은 잠시 멈춰 주시고….”
둘이 투덕투덕하는 사이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하였다.
별안간 방방 거리던 현아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고.
옆을 살펴보니 아버지도 사뭇 긴장한 내색을 비췄다.
이윽고.
이륙에 성공한 비행기가 하늘에 가까워지자….
“오빠, 구름 좀 봐.”
현아는 언제 긴장했냐는 양 창가에 달라붙어 호들갑을 떨었다.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는 조용히 자막이 켜진 외국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뭔가 신기하네.‘
현승은 제 옆으로 나란히 앉은 여동생과 아버지, 그리고 창 너머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혼자서는 온 세상을 돌아다닌 것 같은데, 가족과는 그 흔한 제주도 한번 가 보질 못했다.
아니, 안 간 거였다.
바쁘다는 이유로.
어색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족들을 멀리한 채 일에만 매몰되어 홀로 바삐 살았다.
‘왜 그랬을까….’
사무치도록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다시 한번 기회가 쥐어졌으니.
‘앞으로 진짜 잘해야지.’
현승은 비행기의 고도가 올라갈수록 제 인생의 고도도 따라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