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 너무 아쉬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주차장을 향하는 내내 현아가 중얼거린 말이다.
급하게 떠난 여행인 만큼 1박 2일로 끝난 일정이 몹시 아쉬운 모양이었다.
“아쉬워야 여행인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조만간 또 여행 가자.”
그런 마음을 달래듯 다음을 기약하자, 현아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탁.
차에 아버지와 현아가 탄 걸 확인하고는 원래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의심을 살까 싶었지만.
여행으로 쌓인 피로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깊게도 잠든 모양이다.
그렇게 혼자 차의 엔진 소리를 비트 삼아 속으로 악상을 곱씹어 가던 찰나.
“오빠, 얼마나 남았어?”
잠에서 깬 현아가 덜 뜬 눈으로 물었다.
“거의 다 왔어.”
“엥? 근데 여기는 대체 어디야?”
현아는 별안간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집으로 향한다 했는데….
창 너머로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의 동네가 보였다.
“우리 집 가는 길 맞아?”
현아의 물음에 현승이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글쎄….”
이사하게 될 집을 서프라이즈로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겸사겸사 여행을 다녀온 셈이었다.
그 사이, 김 실장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이삿짐 정리는 물론이고 입주 청소까지 마쳐 뒀다.
직접 보여 주기도 전에 사실을 털어놓을 순 없으니 미적지근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반전세지만….’
나름 서울 노른자 땅 위에 자리 잡은 신축 브랜드 아파트였다.
인프라, 교통편, 학군, 치안, 그 밖에도 기타 등등….
김 실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엄선한 집이랄 수 있었다.
“자, 이제 내리면 돼.”
“여기가 어딘데?”
“아버지부터 깨워 봐.”
그 말에 현아가 아버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 여기가 어디냐?
아버지도 낯선 바깥 환경에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셨고….
- 아버지, 마지막 여행지에요.
현승의 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신 아버지가 조심스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차장 내 공동현관 앞에 다다른 현승이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입주민 카드키를 꺼내 들었고….
“오빠, 여기 혹시 에어비앤비 같은 거야?”
“응?”
“마지막 여행지라며! 하루 더 쉬는 거지?”
연이은 질문에도 현승은 무어라 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몇 걸음 정도를 앞서 걸을 뿐이었다.
- 문이 열립니다.
이윽고 온 가족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몹시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띠링-!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현승이 앞장서서 내려섰다.
“자, 얼른 내리자.”
현승이 주머니에 넣어 놨던 카드키를 꺼내 도어락에 가져다 대니 꽤 활기찬 효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집 안에 들어선 현승이 중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자, 아직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얼른 들어와.”
현아가 토끼 눈을 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와, 오빠 박박….”
“박박?”
“대박대박이라고….”
“별다줄.”
이내 현아와 아버지가 우물쭈물 집 안을 둘러보기를 잠시.
“우와….”
현아가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아 보고 싶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어 거실 창 쪽으로 데려가서는 말을 이었다.
“와아, 진짜 한강 대박….”
그 말에 현승이 물었다.
“한강이 좋아?”
“좋지!”
“대체 뭐가 좋아?”
잠시 고민하던 현아가 답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속이 뻥 뚫리잖아.”
한차례 “그런가….”하고 중얼거린 현승 역시 덩달아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저 강에 목숨을 걸고 살다시피 하지 않던가?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제 꿈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사는 일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현승의 눈에는 그냥 강일 뿐이다.
아주 오랫동안 제자리에서 넘실거리며 많은 이들을 비웃어 대고 있는 강.
족히 수만 구 이상은 될 법한 시체가 유기되어 있을 아무 의미도 없는 강 말이다.
그때였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현아가 재차 호들갑을 떨어 댔다.
“와, 주방 대박 넓다! 우리 이따가 장 봐서 저녁 직접 해 먹자! 이렇게 넓은 주방 처음 봐!”
주방에서 널찍한 화장실을 거쳐….
“뭐야, 뭐야! 욕조 뭐야! 잘못하면 빠져 죽을 수도 있겠다! 무슨 욕조가 이렇게 커? 이럴 줄 알았으면 입욕제라도 하나 사 올 걸!”
그리고 방에 이르기까지.
“어라?”
한데 방에 들어선 현아가 별안간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다시금 거실로 나왔다.
“오빠, 뭐야?”
“왜?”
“이 방에 왜….”
그리고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내 문제집이랑 교재가 있어?”
현아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른 방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봐, 이 방에는 아버지 옷이 박스에 고스란히 들어 있고….”
연달아 다른 방 하나의 문을 열어 보기도 했다.
“여기는 꼭 작곡가 작업실처럼 장비 세팅되어 있잖아!”
가구랑 가전은 전부 새 걸로 바꿨지만 본래 사용하던 옷가지나 짐은 버릴 수가 없으니 고스란히 들고 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들켰나.”
현승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툭 말을 내뱉었다.
“이런 집에서 살아 보고 싶다며?”
“뭐?”
“그럼 앞으로 쭉 살면 되지.”
그리고는 재차 덧붙였다.
“살자, 이런 집에서.”
그 말에 현아의 두 눈이 마구 흔들려 댔다.
“맙소사….”
현아 역시 제 오빠가 만든 곡들이 얼마나 기록적인 흥행 가도에 올랐는지 면밀히 알고 있었다.
차트 상위권을 줄줄이 꿰차고 있는 건 물론, 커뮤니티를 통해, 심지어 일본 길거리에서도 느꼈으니까.
“그럼 우리 진짜 여기서 사는 거야…?”
이내 현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아버지께 상황을 설명했다.
- 아빠, 여기가 우리 집이래!
이내 아버지 역시 같은 표정을 해 보이자 현승이 곧장 수어로 설명을 부연했다.
- 아버지, 이 집이 앞으로 현아랑 저랑 아버지가 살 집이에요.
아버지 역시 적잖이 당황하신 눈치였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달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허름한 빌라.
10평 남짓한 투룸에서 자식들에게 방을 다 내어 주곤 거실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뛰어다녀도 될 정도의 규모인 서울 한복판 신축 아파트로 이사라니….
- 아예 매매로 들어오기에는 시기도 그렇고 자금도 역력지 않아서 반전세로 얻기는 했는데, 올해 안에는 히트곡 몇 개 정도 더 써서 이 집보다 더 큰 집을 매매하는 게 목표에요. 우리 식구, 그때까지만 이 집에서 지내는 걸로 해요.
훌쩍 커 버린 제 아들의 의젓한 모습에 더욱 할 말을 잃었다.
- 돈 버는 건 제가 할 테니까 아버지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정아린의 곡에서 발생한 저작권료 정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난 서지니 앨범의 저작권료 1차 정산금만으로도 집은 물론, 억대의 여유자금까지 확보했다.
- 현승아….
결코 허황된 목표 따위가 아니란 뜻이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도 작곡 덕에 돈 걱정을 해 본 적은 없었다.
- 아버지, 소파 어때요? 사내에서 저를 많이 도와주시는 실장님이 입주 기념 선물로 사 주신 건데….
- 푹신하구나.
- 백 퍼센트 소가죽 리클라이너 소파라고 꼭 전해 달라시던데요. 가격은 비밀로 해 달라고….
그 말에 현아가 고개를 갸웃댔다.
“오빠, 여기 영수증 있는데?”
“응?”
“봐봐, 소파 영수증이잖아.”
그 말에 현승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이내 현승이 건네받은 영수증을 확인해 봤다.
“꼭 이렇게 생색을 내신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고가의 제품이라 그런지 확실히 푹신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좋네….”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니 아늑하고 편안했다.
뭐가 달라졌지?
전생의 자신 역시 분명 많은 돈이 있었다.
“좋아….”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많은 돈이.
그런데 뭐가 달라진 걸까?
뭐가 달라졌기에 집이 이토록 아늑하게 느껴지는 걸까?
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 * *
다음 날.
“작곡가님! 휴대폰 좀 내려놓고 이것 좀 드셔 보시라니까요!”
정아린이 두 손 가득 디저트를 챙겨서 현승의 작업실을 찾았다.
“안 먹는다니까?”
“진짜 맛있어요!”
“너 많이 먹으라고.”
이내 현승이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는 정아린을 슬쩍 바라봤다.
“너 요즘 스케줄 없어? 한창 바쁠 때 아냐?”
“엄청 바빠요!”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가서 일해.”
실제로 정아린은 요즘 가히 살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본래 성격이 밝고 쾌활했기에 여러 예능에 잘 적응해 고정으로 출연하게 됐고….
심지어는 라디오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담당 프로그램이 생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뭐랄까?
멍석을 깔아 주니 정말 잘한다고 표현하면 적합하려나?
기회를 잡는 것도 실력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정아린은 나름 타고난 실력이 있는 엔터테이너인 셈이었다.
물론.
KOK를 상대로 ‘이겼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승패를 따지자면 졌다.
다만 여성 솔로 신인 가수라는 핸디캡을 고려해 보면….
‘향후가 기대되는 신인 반열에 이름 정도는 올린 셈이겠지.’
나름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둔 셈이었다.
“오늘 겨우 스케줄 비어서 유명한 가게에서 직접 사 온 건데 좀 먹어 주시면 덧이라도 나나 봐요?”
“단 음식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치, 그래도 작곡가님 덕분에 이렇게 다 잘됐으니까 이번 딱 한 번만 봐 드릴게요.”
정아린은 먹음직스럽게 생긴 파이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행복해했다.
숨 쉴 틈 없는 스케줄에 제대로 된 끼니를 채우는 게 어려운 요즘이었으니….
“아, 맞다! 서지니 선배님, 요즘 일본 쇼케이스 잘 끝내고 현지에서 반응 엄청 좋다더라고요.”
그녀는 끊임없이 디저트를 입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조잘거림은 쉬지 않았다.
“타이틀곡도 오리콘 차트 상위권에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아 보이던데요? 확실히 곡이 정말 좋기는 해요. 역시 우리 작곡가님! 세상에서 제일 대단해요!”
정아린이 크림이 묻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을 연발하고 있던 그때였다.
한차례 “그래?”하고 시큰둥하게 물은 현승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정아린이 “부탁이요?”라며 되묻고는 눈매를 좁혔다.
“조용히 해 달라는 부탁하시려는 거죠?”
“그런 거 아냐.”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줄게요!”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굴던 현승이 아니던가?
부탁.
이는 현승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일은 맞을까요?”
이내 현승이 덤덤하게 답했다.
“별건 아니고, 데이트 신청 좀 하려는데 계속 까여서.”
이내 정아린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마음에 “예?”하고 되물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금 벌써 몇 번째 까이는 건지 모르겠네.”
현승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흠….”
정아린이 현승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훤칠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성격에는 확실한 결함이 존재하지 않던가?
‘역시 잘생긴 게 다가 아니라니까.’
왜 까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멘트가 아니라….
성격을 고쳐야 하는 건 아닐까?
“작곡가님.”
잠시 고민하던 정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라고 데이트 신청하셨는데요?”
“멘트는 정해져 있거든.”
“골라 드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한번 말씀해 주시면 골라 볼게요!”
정아린이 열의를 불태우자 현승이 답했다.
“첫 번째, 내 주말을 너에게 줄 테니 너도 네 주말을 나한테 줄 수는 없을까?”
정아린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그딴 멘트로 데이트 신청한다고요?”
“별로야?”
“네! 무조건 별로죠! 다음! 다음 두 번째 멘트는요?”
현승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두 번째, 나랑 데이트할래 아니면 나랑 죽을래?”
“네, 그냥 죽을래요! 다음 세 번째는요?”
“세 번째. 토요일, 강남역 5번 출구, 오후 2시, 꼬맹아.”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 결투 신청 같아요!”
그 말에 현승이 답했다.
“끝이야, 셋 중에 하나 골라 줘.”
“끝이라고요?”
“응, 뭐가 제일 괜찮을 것 같아?”
예시가 끝이 나자 정아린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최악인데?’
정말 저 멘트들로 데이트를 신청했다면 까이고도 남았을 터.
“예시가 그런 거밖에 없어요?”
현승이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 두근두근, 썸썸 하이스쿨! 」
휴대폰 화면 속에는 화려한 그래픽으로 새겨진 ‘미연시’ 게임의 미션창이 떠오른 참이었다.
무 테크로 크게 손해를 보고 나니 한창 빠져 있던 동물의 섬에 흥미를 잃고야 말았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접한 ‘썸썸 하이스쿨!’이 생각보다 잘 맞아 푹 빠져들게 된 채였다.
“하아, 혹시 조금이라도 더 평범한 답안은 없어요?”
“응.”
“기왕 컨셉 잡으실 거면 끝까지 잡으시는 게 좋겠어요.”
정아린이 마지못해 답했다.
“1번으로 하죠.”
그녀가 가장 차선책을 제시하며 한숨을 내쉬던 찰나.
“오오오-?”
현승이 휴대폰을 쥔 채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바로 답장이 왔어요?”
“어, 드디어 승낙했다.”
그리고는 뿌듯하다는 양 말을 이었다.
“역시 여자 마음은 여자가 잘 안다니까.”
“저랑은 많이 다른 분 같은데요?”
“1번 멘트는 좀 별로 같아서 고민했거든.”
“별로 맞아요. 그분 취향도 참….”
정아린은 생각보다 더욱 좋아하는 현승의 모습에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약간의 오해가 겹겹이 쌓인 채였으나 일련의 뿌듯함마저 느끼는 중이기도 했다.
그보다.
입이 근질거렸다.
‘실장님은 알고 계시려나?’
바늘로 찌르면 피 대신 쇳물이 나올 것 같은 천하의 작곡가님이 데이트 신청이라니!
연애라니!
그런 몽글몽글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다니!
‘빨리 말씀드리고 싶다!’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