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버블걸즈, 11월로 컴백 일자 맞춰 놓은 상태입니다. 현재 뮤비 제작에 돌입한 상태로….”
매니지먼트 1팀 소속 ‘이 팀장’과 ‘오 실장’이 점심에 있을 회의 준비로 여념이 없던 찰나였다.
똑똑.
직원 하나가 종이 서류를 품에 꼭 안은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리고는.
“공문이 하나 왔는데, 확인해 보심이 좋을 듯해서요.”
직원이 건네준 공문을 살피던 오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맨 레코드사…?”
업계 종사자라면 모를 수 없을 만한 로고가 공문 상단에 크게 박혀 있던 까닭이었다.
맨 레코드사.
일본을 대표하는 초대형 레코드사 중 하나이자, 다른 레코드사들보다 음악성을 더욱 깐깐히 따지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이유로 외부 업체와 협업하는 경우가 아주 극소수인 폐쇄적인 레코드사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이만 가 봐.”
오 실장은 놀란 기색을 숨기며, 직원에게 나가라며 손짓했고.
“오, 오 실장님 이거….”
곁눈질로 공문을 확인한 이 팀장도 꽤 놀란 눈치였다.
“1.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내 오 팀장은 천천히 일어로 되어 있는 공문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2. 해당 공문은 맨 레코드사가 전담 법무법인인 리더스미스사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그는 읽다 말고 침을 한번 꼴깍 삼켜 냈고….
“3. 상호 간의 원활한 협업을 위해 철저한 비밀 유지를 부탁드리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별안간 오 실장은 눈매를 좁히며 침음을 흘렸다.
“흠.”
이후의 내용은 차마 소리를 내진 못 하고 눈으로만 쫓았다.
‘이 공문을 하필 1팀이 받아서….’
공문의 주요 내용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매니지먼트 2팀 소속 작곡가인 HS와 공동 작업을 진행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팀과는 아무 상관 없는 공문이다.
서지니가 일본 진출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그녀의 앨범 크레딧에 단독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HS’를 찾는 거겠지.
‘HS를 뺏어 올 수도 없고….’
오 실장이 애꿎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어 댔다.
맨 레코드사의 협업 제안 공문을….
2팀에 고스란히 전달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이 팀장, 직원한테 이 공문 2팀 팩스로 보내라 해.”
“너무 아쉽긴 하네요…,”
“뭐, 어쩌겠어? 맨 레코드사에서 이놈만 찾는다는데.”
이 팀장이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공문을 받아 들었다.
그때.
“왜 떠들고 있어? 오후 회의 준비는 전부 마치고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거야?”
소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박 전무가 대뜸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이죽댔고….
“이게 오늘 회의 자료야?”
이 팀장이 품에 안고 있는 공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게… 회의 자료는 아닙니다.”
“뭔데 그래?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사실 맨 레코드사로부터 온 공문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내 오 실장은 이 팀장에게 공문을 전해 주라며 눈짓했고.
“1팀에 온 건 아니었지만…,”
이 팀장은 주춤거리며 품에 안고 있던 공문을 박 전무에게 건네주었다.
오 실장은 박 전무가 공문을 읽자마자 버럭 화부터 낼 거라 예상했다.
‘안 그래도 HS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시는데… 우리만 또 잔소리 듣겠군.’
그는 미리 고개를 숙인 채 혼날 상황에 대해 앞서 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 전무는 생각보다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흠….”
그렇게 박 전무가 한참 동안 공문만 읽기를 잠시.
“이 공문은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박 전무는 결단을 내린 듯 공문을 챙겨 들었고….
“직, 직접 2팀에 가져다주시려고요?”
그 모습을 본 오 실장이 놀란 얼굴로 묻자 박 전무가 느긋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오 실장답지 않게 무슨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
모두가 벙 찐 얼굴로 박 전무를 바라보던 찰나.
“이렇게 좋은 기회를 홀라당 뺏기려고?”
박 전무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말이 나왔다.
“저기, 전무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너무 죄송하지만 맨 레코드사에서 LS 엔터로 협업 요청을 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HS를 찾는 마당에….”
“오 실장! 사실 HS 그 애송이가 운이 좋아서 그렇지, 우리 1팀 소속 작곡가 중에 걔보다 떨어지는 사람이 있어?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훨씬 더 우위에 있지.”
“그, 그렇기는 하지만….”
“것 참! 오 실장,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박 전무는 야심 차게 준비한 KOK의 10주년 기념 앨범에 사활을 걸었었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대중의 관심을 정아린과 나눠 먹고 있는 기분에 부아가 치밀던 요즘이었다.
이두석이라는 거대한 산 때문에 쉽사리 개입할 수도 없는 마당에, 최 이사가 요즘 HS 덕택으로 승승장구하며 때깔이 좋아진 것도 열불이 났다.
자꾸만 유치한 감정이 뜨겁게 속을 달궜다.
“작곡가들 전부 소집해서 진짜 기가 막힐만한 샘플곡들 다 모아 오라고 해.”
그리고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어차피 곡만 좋으면 HS이건 SH건 상관도 안 해. 맨 레코드사 정도 되는 곳에서 뭐 하러 미래도 불투명한 신인 작곡가인 HS에 목을 매겠냐? 중요한 건 히트할 만한 곡을 얻어 내는 거지.”
이윽고.
“아무튼 좀 있다가 회의 늦지 말고 참석하도록 해. 아주 중요한 회의가 될 테니까.”
박 전무는 점심에 있을 임원 회의를 기대하며 넥타이를 다시 한번 고쳐 맸다.
* * *
“안녕하십니까.”
김 실장은 정수리가 보일 만큼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 뒤, 최 이사의 부름에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다른 임원진들의 눈치가 조금 보이기는 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실장직을 맡은 자신이 요즘 부쩍 대표실에서 주최되는 임원 회의에 발을 들인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앞으로 성과만 잘 낸다면 임원 승진까지 노려볼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
뭐, 그게 아니라도 성과는 인정받은 셈이니 만족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김 실장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재차 울려 대는 진동 소리에 영 회의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 정아린: 대박 소식! 대박 소식! ]
[ 정아린: 긴급 소식! 긴급 소식! ]
[ 정아린: 특급 소식! 특급 소식! ]
미리보기로 슬쩍 살펴보니, 사이렌 모양 이모티콘까지 덧붙여진 정아린의 문자가 연달아 쏟아지는 중이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려는데….
지이이이이이이잉-!
허벅지에 다시금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 현승: 밥밥밥. ]
[ 현승: 밥바밥. ]
[ 현승: 점심밥. ]
얘네가 쌍으로 왜 이러지?
매니지먼트 입사 후 휴대폰이 꺼진 적은 있어도 꺼 본 적은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연차건,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명절이건, 언제가 됐든 휴대폰을 꼭 붙들고 있어야 했으니까.
‘잠깐 꺼 놓을까….’
한데 연신 울려대는 진동 때문에 처음으로 휴대폰을 꺼 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고….”
소속 아티스트들의 하반기 활동 계획을 다룬 회의가 마무리되던 찰나였다.
“잠시만요,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 전무가 의기양양한 투로 말문을 열었다.
“아직 확정된 건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미리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모두의 이목이 박 전무에게로 쏠렸고, 김 실장 또한 그를 곁눈질로 살피기 시작했다.
별안간 설레발치며, 서론을 길게 나열하는 화법이 영 박 전무답지 않을 따름이었다.
“맨 레코드사로부터 협업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김 실장의 눈이 한껏 커져서는 깜박이는 것조차 까먹은 듯 고정되었다.
‘맨 레코드사라면….’
소니 뮤직, 유니버설 뮤직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형 레코드사랄 수 있는 곳이다.
한국 가수가 일본에 진출하고자 한다면 우선순위로 문을 두드리는 레코드사 중 하나이기도 했고….
어지간해서는 타사와 협업을 진행하는 일이 없어 폐쇄성으로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 중 하나인 LS 엔터만 하더라도 맨 레코드사와 협업을 진행한 이력은 전무했으니 말이다.
‘확실히 저 양반이 수완이 좋긴 좋아.’
김 실장이 그를 곁눈질로 흘겨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자체는 별로라지만….
확실히 능력이나 영업 수완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김 실장의 상념이 길어지던 찰나.
대표가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맨 레코드사에서 직접 말입니까?”
그 말에 박 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현재 1팀 소속의 주요 작곡가들에게 곡을 의뢰한 상태이고, 취합하는 대로 맨 레코드사에 직접 전달해 보려 합니다.”
“서지니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덕택일까요?”
“예, 꼭 그렇다고 확정 지을 순 없겠지만 분명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박 전무가 재차 덧붙였다.
“일단 자사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지닌 건 물론이고 논의 역시 긍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니, 이번 기회에 우리 1팀에서 어떻게든 맨 레코드사와 교류의 장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이내 대표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성사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요.”
“네, 최대한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내에서 박 전무와 대표의 대화를 듣고 있던 2팀의 측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지간히 1팀, 1팀거리네.’
오로지 1팀의 공이라는 듯 딱 잘라서 선을 긋는 박 전무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최 이사는 박 전무가 마냥 얄밉기만 한 건 아니었다.
2팀의 서지니가 일본 진출에 성공하고, 정아린 역시 데뷔 이후 연일 상승 곡선을 그리며 활발히 활동 중이라고는 하지만.
박 전무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그룹 ‘KOK’ 또한 올해에 기록적인 성과를 달성하며 많은 수입을 안겨 주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맨 레코드사와의 협업까지 성사해 냈으니….
미래에 있을 기회나 성과까지 포함하여 본다면 1팀의 상반기 실적이 2팀보다 우위라 볼 수 있었다.
‘독불장군이긴 해도, 확실히 장군은 장군이란 말이지.’
그의 수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예, 성사된다면 의미가 상당히 깊겠습니다.”
대표는 결단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모쪼록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를 따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고개를 조아렸다.
박 전무 역시 마찬가지.
곧바로 “네!”하고 당당히 대하고는 곧장 묵례해 보였다.
“이번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걸로 하죠.”
대표가 회의에 끝을 알리자, 썰물이 지듯 모두가 빠르게 장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 실장 또한 계속 박 전무의 맨 레코드사 컨텍 건을 곱씹으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대단하긴 해….”
분명 맨 레코드사와 연을 터놓는다면 1팀은 KOK 외에도 많은 이들을 한류스타 반열에 올려놓기 더 수월한 조건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내 김 실장은 부러움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애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연락을 했던 거지….’
이윽고.
주머니 깊게 찔러 넣어 놨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현승 : 당신을 점심 식사에 초대합니다. ]
[ 현승 : 시간 - 오후 2시까지. ]
[ 현승 : 준비물 - 식권 2장 ]
[ 현승 : 장소 - 작업실입니다. ]
김 실장은 손목시계를 황급히 들여다봤다.
오후 1시 58분….
“뭐야, 2분 남았잖아?”
그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 뛰다시피 복도를 내달리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아니, 내가 왜 뛰고 있지?”
그래도….
현승이 휴가에 다녀오자마자 아기새마냥 자신을 찾는 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 * *
회의를 마친 김 실장이 곧바로 현승의 작업실을 찾았다.
“어라? 아린이도 와 있었네? 이게 얼마 만이야?”
“실장님,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 요즘 아린이 모니터링할 게 많아서 좋더라.”
그녀와 간단하게 안부 치레를 끝낸 김 실장이 소파 한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물었다.
“작곡가님, 식사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준비물은요?”
“예, 예, 식권 두 장 챙겨서 왔습니다.”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오후 두 시까지 오라면서! 뛰어왔더니!”
“잠깐 할 일 있어서 그래요.”
“그럴 거면 조금 넉넉하게 부르지!”
그때 현승이 턱짓으로 소파 앞 협탁에 놓인 쇼핑백을 슬쩍 가리키고는 말했다.
“선물 사 왔어요.”
“뭐? 선물? 진짜?”
“저 위에 쇼핑백 확인해 보세요.”
김 실장이 “으쌰.”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 위에 놓인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야, 이거….”
안에 든 케이스를 꺼내 열어 보니 남자들의 로망인 롤렉스 시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뭐야? 진짜야? 장난치는 거 아냐?”
몇 번을 살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품귀현상이 일어나 돈이 있어도 살 수 없게 된 제품이었다.
“야, 이거….”
한화로 족히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제품이다.
“너무 비싼 선물 사 온 거 아냐?”
“벌이에 맞춰서 사 온 거예요.”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받으라고….”
말끝을 흐린 김 실장이 시계가 담긴 상자를 도로 내려놓자….
“것 참, 안 어울리게 쑥스러워하시긴.”
현승이 “줘 봐요.”하고 말하며 함 안에 담겨 있는 시계를 꺼낸 뒤, 손수 김 실장의 손목에 채워 주기 시작했다.
“어디 가셔서 기죽지 말고 앞으로도 발에 땀 나도록 일해 달라고 드리는 거예요.”
“현승아….”
“보니까 줄 한두 칸 정도만 줄이면 딱 보기 좋을 것 같은데요? 가져가세요.”
김 실장이 감동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대다가 넌지시 답했다.
“앞으로 진짜 더 열심히 할게. 아침마다 너희 집 방향으로 절 올리고 하루를 시작할게. 그리고 잠들기 전에도 너희 집….”
그 말에 현승이 귀찮다는 양 손짓을 휙휙 해 보였다.
“정말 고맙다….”
문득 현승과 처음 계약에 대해 논의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짜식….’
능력은 있어 보이는데 사회성은 결여된 것처럼 보이던 녀석을 초야의 공명을 모셔 오듯 데려왔다.
한데 녀석은 제 ‘입신양명의 동아줄’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감에 부응해 준 걸로 모자라….
순식간에 업계 내에서 꽤 입지 있는 작곡가로 자리한 건 물론, 자신을 이토록 챙겨 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에 드세요?”
“야, 당연하지….”
“저도 기분 좋네요.”
애인을 바라보듯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김 실장의 모습 덕에 괜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찌 되었건 이번 생에서 자신이 작곡가로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장본인이 아니던가?
“저, 그런데 현승아….”
불현듯,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이렇게 돈 막 써도 돼?”
“예?”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김 실장이 넌지시 말끝을 흐리기를 잠시.
“실은 갑작스럽게 큰돈을 벌게 됐으니 여러모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수익이 불규칙한 직업이라 소비 습관이 변해 버리면 힘들어지기도 하고, 내년 종합소득세 때문에 고역을 치르게 될지 모르니까….”
그 말에 현승이 덤덤하게 답했다.
“네, 준비하고 있어요.”
저작권료를 시작으로 방송 활동, 라디오, 부동산 등으로 인하여 벌어들이는 수입이 단순 억 단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무 처리를 담당하던 세무 직원의 수만 하더라도 거진 열 명에 육박했었다.
서당 개도 삼 개월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비록 당장은 전담 세무사를 따로 선정하지 않은 상황이라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정보를 활용해 미리미리 대비 중이었다.
“혹시 관련해서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현승이 다시금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 아린이 너는 아까 왜 그렇게 찾은 거야?”
그 말에 정아린이 “아!”하고 탄성을 지르며 답했다.
“대박 뉴스! 대박 소식! 대박 속보!”
“뭔데?”
“작곡가님, 데이트 신청에 성공하셨어요!”
김 실장이 놀란 눈으로 “현승이가?” 하며 되물었다.
“제가 아까 분명 대박 뉴스에, 대박 소식에, 대박 속보라고 거듭 말씀드렸잖아요!”
“현승이가?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무 농사에나 관심 두던 애가 대체 어떻게….”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는 걸까?
“이 자식….”
김 실장이 현승을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제 작곡가님 연애하면 실장님 혼자 외롭겠어요.”
정아린의 물음에 김 실장이 정색하며 답했다.
“무슨 소리야? 말 나온 김에 털어놓는 건데 나도 이번 주말에 소개팅 자리 있어.”
“꺄악, 뭐야, 뭐야! 뭐 하시는 분인데요? 바쁘신 분이 소개팅은 언제 잡으셨대요!”
“그냥 뭐, 요 근처에서 네일샵 일하는 분이래. 아는 분이 하도 권유하셔서….”
그리고는 “큼, 흠.”하고 헛기침하며 현승에게 물었다.
“야, 그나저나 데이트 신청할 때 뭐라고 말했냐?”
“예?”
“혹시 마음에 들면 애프터 신청해야 하니까….”
현승의 데이트 신청이 ‘썸썸 하이스쿨’게임 내에서 벌어진 일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기에 오해가 켜켜이 쌓여 가고 있었다.
“글쎄요, 이 공략법이 통할지는 모르겠는데.”
“아! 진짜 치사하게 구네!”
“아니, 알려 드릴 순 있는데 도움이 되려나.”
“됐으니까 일단 말해 봐!”
김 실장의 채근에 현승이 마지못해 답했다.
“내 주말을 줄 테니 너도 네 주말을 달라고 박력 있게 질렀더니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던데요.”
“뭐? 그런 게 먹힌다고?”
“거봐요, 이 공략법이 통할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일단 저는 그랬어요.”
김 실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현승을 바라보다 물었다.
“순 얼굴 빨 같은데….”
현승은 확실히 잘생긴 편에 속했다.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
선이 또렷하고, 미형적이며, 광채가 도는.
정말 말 그대로 잘생긴 얼굴.
“흠.”
저 정도 얼굴이라면 대뜸 물을 뿌린 뒤 대충 꽃에 물을 줬다고 둘러대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됐다, 됐어….”
대충 고개를 내저은 김 실장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다음 작업은 슬슬 구상하고 있어?”
이윽고.
현승이 기다렸다는 양 즉답했다.
“네, 제 개인 앨범 작업 좀 해 보려고요.”
일순 김 실장과 정아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