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LS 엔터 홍보부 곽 팀장이 양손 가득 커피를 든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민현승, 그 친구의 개인 앨범 말인데….”
며칠 전, 전남일 대표가 꺼낸 말 한마디로 인해서 꽤 여유롭던 스케줄러가 좁쌀만 한 글씨로 가득 차 버리기에 이르렀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진행해 봐도 되겠어.”
곡을 직접 들어 본 전남일 대표는 민현승과 제이블의 음원 성적 맞대결이 제법 승산 있는 싸움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결과.
벌써 며칠 내내 동이 떠오를 무렵까지 온갖 언론사 측 인사들을 만나 부어라 마셔라 음주를 반복해야 했다.
‘내가 술상무도 아니고….’
속은 진탕을 하고, 머리는 깨질 듯 지끈거렸다.
이윽고.
곽 팀장이 홍보부실 앞에 다다르던 찰나.
“이 정보는 취합하면 안 되겠죠?”
“어, 그리고 아까 내가 보내 준 자료 어디로 넘겼어?”
“그거 아까 대일 언론사 연예부로….”
“뭐? 미친 거야? 그쪽 보낼 자료는 따로 취합했잖아!”
“어머, 어떻게 하면 좋아….”
“어떻게 하긴! 일단 전화부터 넣고 다시 보내야지!”
아니나 다를까 홍보부의 분위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아….”
문 앞에 선 곽 팀장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비스무리한 눈을 한 채로 장내를 둘러보던 찰나.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워 둔 채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팀장님! 왜 이제야 오시는 거예요!”
“지금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야.”
“됐고, 커피 저희 주시려고 사 온 거 맞죠?”
곽 팀장이 “어? 응….” 하고 답하자마자 직원이 그의 손에 들린 커피를 낚아채서는 테이블 위에 보기 좋게 깔아 놓았다.
“다들 커피 한 잔씩 가져가세요! 존경하는 곽 팀장님께서 잠도 자지 말고 일하라는 의미로 커피 한 잔씩 돌리시겠다네요!”
그 말에 곽 팀장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했다.
“야, 야, 눈치 좀 그만 줘라. 나도 오늘 해 뜰 무렵까지 술 상무 노릇 하다가 왔어.”
능청스럽게 커피 몇 모금을 쪽쪽 빨아들인 직원이 마냥 유려한 투로 말을 이었다.
“설마 저희가 팀장님 노고를 모르겠어요? 얼른 오셔서 숙취도 안 가셨는데 부하 직원들 업무를 돕는 리더다운 면모 뽐내셔야죠.”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함께해 온 사이인 터라 나눌 수 있는 꽤 친근감 넘치는 대화였다.
“에휴, 오늘은 아예 숨 돌릴 새도 없어 보이네.”
대표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로 현재 LS 엔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마케팅 채널이 현승에게로 집중된 채였다.
“안 그래도 방금 신입이 실수했거든요? 이 건은 제가 수습해 볼 테니까 팀장님은 저희 협업 툴에 갱신된 보고서부터 결재해 주시면 될 것 같고 아직 못 넘긴 기사들 최종 검토해 주시면 되겠네요.”
그 말에 “오냐.” 하고 답한 곽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컴퓨터 전원을 켜던 찰나였다.
“그런데 될까요?”
“뭐가?”
“HS 말이에요.”
직원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남들은 제이블 발매 일자 피하려고 기를 쓰잖아요?”
“그렇지.”
“날고 기는 가수들도 제이블 곡이랑 붙으면 기도 못 펴고 묻히기 일쑤인데….”
말끝을 흐린 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HS 씨가 너무 무리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해서요.”
그 말에 곽 팀장이 답했다.
“나라고 뭐 알겠냐? 만약 누가 이길지 맞힐 능력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매니지먼트 팀으로 떴겠지.”
“예? 그건 안 되죠!”
“흠, 그럼 아쉬운 대로 회사 앞에 자리 깔고 매니지먼트 팀한테 복비 받으면서 사는 건 어때?”
“그것도 안 돼요!”
직원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저희 일 늘어나는 거잖아요.”
“짜식이―!”
“어쨌든, 정말 승산 있을까요?”
그 말에 곽 팀장이 상념에 잠겨 들었다.
“승산이라….”
홍보팀을 지휘 중인 곽 팀장은 그간 현승이 내딛고 온 발걸음을 기록해 기사로 송출하고, 이후 따라 오는 반응을 취합해 분석하는 형태의 업무를 반복해 왔다.
사실상 현승의 행보나 발매했던 곡에 대한 여론의 반응 따위를 가장 최전선에서 즉각적이고 세밀하게 느끼고 있는 인물이랄 수 있는 셈이었다.
‘난놈인 것 같긴 하단 말이지.’
서지니나 공효주 때까지만 하더라도 실력보다는 운과 타이밍에 의한 결과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정아린 때부터는 실력에 혀를 내두르게 됐고 점차 그와 관련된 기사를 송출하는 일을 기대하게 된 입장이었다,
“난 승산 있어 보여.”
“정말요?”
“너도 곡 들어 봤잖아.”
그 말에 직원이 두루뭉술 답했다.
“예, 곡은 좋은데 제가 듣는다고 뭘 알겠어요….”
이내 곽 팀장이 어깨를 들썩였다.
“일단 내 생각에는 승산이 없진 않아.”
인지도로도 경험으로도 현승이 제이블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일단 곡이 좋고….’
민현승 역시 제이블 못지않은 신흥 음원 깡패로 격상하는 추세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어지간해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전남일 대표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걸 보면….
“뭐,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곽 팀장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식구잖아? 기왕이면 이겼으면 좋겠다 싶은 거지.”
따라 웃음을 지어 보인 직원이 답했다.
“예, 저도 기도하면서 할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네요.”
* * *
“어렵다, 어려워….”
현승은 벌써 몇 시간 째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김 실장이 현승의 개인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익살스러운 투로 물었다.
“이야, 천하의 민현승도 발매일 다가오니까 똥줄 좀 타나 봐?”
현승이 근심 가득한 뒷모습을 하고 앉아 있던 까닭이었다.
“오셨어요? 언제 가시려고요?”
“이 자식이!”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그 말에 “버르장머리가 없어요, 버르장머리가.” 하고 중얼거린 김 실장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기사라도 찾아보는 중이야? 그래도 걱정은 되나 보네?”
그러고는 현승의 모니터 화면을 확인해 보기 위해 몇 걸음을 더 다가선 그가 눈매를 좁혔다.
“뭐야?”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자신의 경쟁 상대인 제이블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오산이었다.
[ 10대 후반 여자가 좋아할 만한 선물 리스트 10선 ]
이내 김 실장이 탄식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거 내가 또 속았네! 또 속았어! 그렇고 속고 속았는데도 또 속았어!”
“제가 뭘 속였는데요?”
“천하의 민현승이 경쟁자 모니터링 같은 생산적인 일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 말에 현승 역시 이죽댔다.
“아니, 그럼 선물 고르는 게 비생산적인 일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제이블 앨범이야 어차피 잘될 텐데 제가 들여다보고 있어서 뭐 해요? 그럼 이제부터 망하라고 저주라도 해 볼까요?”
김 실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련할까? 여자 친구 선물 고르는 일도 몹시 생산적인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고는 “여자 친구?” 하고 중얼대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10대? 야! 민현승! 너 미성년자랑 사귀는 거였어?”
“왜 범죄자 보듯 보세요?”
“말 돌리지 말고, 여자 친구 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예? 여자 친구? 제가요?”
아무래도 ‘미연시 게임’의 진행이 순탄치 않아 질문 몇 번 했던 걸 여자 친구가 생겨서 그런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아, 그건 그냥 한낱 심심할 때 재미로 하는 게임….”
“야! 사랑이 재미? 게임? 와, 이거 진짜 쓰레기네!”
“예? 무슨 소리를… 여동생 선물 고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 말에 김 실장이 멋쩍은 표정으로 “아, 여동생….”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줘야 좋아할지 영 감이 안 와서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현아 선물 고르고 나면 아버지 선물도 골라야 하니까 실장님이 도와주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 실장이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 하며 되물었다.
“내가 도움이나 되겠어? 차라리 아린이한테 물어보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오, 좋네요. 그냥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에 김 실장이 재차 “이 자식이, 진짜―!” 하고 투덜대고는 재차 덧붙였다.
“됐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발매 예정인 거 알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약속 잡아 둔 거 있으면 다음 날로 미루든가 해.”
“크리스마스에 출근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심술을 부리세요? 제가 회사에 없으면 앨범 발매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에 출근하는 사람 여기 있다! 그래도 네 앨범 발매 일인데 다 같이 반응 확인하는 자리에 빠지면 쓰냐!”
현승이 귀를 막으며 “에배배―.” 하고 이죽거리자 김 실장이 재차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난 너 때문에 ‘미연 씨’랑 데이트는커녕 출근해야 하는 팔자인데….”
김 실장이 말한 ‘미연 씨’는 사옥 근처에서 작은 커피숍 하나를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청순하게 생긴 외모와 살가운 성격으로 자신을 항상 반갑게 맞이해 주는 그녀에게 반하게 되었고.
열 번 찍어서 안 넘어오는 나무는 없다지.
틈날 때마다 찾다 보니 사담까지 나누게 될 정도로 친해져서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를 핑계 삼아 영화라도 한 편 보자고 데이트 신청해 볼 심산이었다. 뭐, 결국 현승의 앨범 발매로 인하여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만….
한편.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현승이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봤다.
“김 실장님도 미연시를 아세요?”
다름 아니라, 김 실장의 예비 연인인 “미연 씨.”를 “미연시”로 잘못 들은 까닭이었다.
“네가 미연 씨를 알아?”
“그럼요, 당연히 알죠.”
“네, 네가 어떻게 알아?”
“저도 푹 빠져 있거든요.”
“이거 미친놈 아냐!”
“욕먹을 일은 아니잖아요!”
“아니긴 대체 뭐가 아니야!”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뭐가 치사하다는 건데?”
오해의 실타래가 풀리기는커녕 더욱 꼬여 가기를 잠시.
“이 자식…!”
숭고한 사랑을 ‘한낱 재미로 하는 게임’ 정도로 치부하는 놈에게 미연 씨를 빼앗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저 자식은 젊고 잘생긴 건 물론, 자신보다 돈도 훨씬 많은 버는 승산 없는 경쟁자가 아니던가?
“네가 미연 씨를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라고 판단했다.
진심, 그리고 부지런함.
이내 김 실장이 곧장 작업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큼은 너한테 질 생각 없다!”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어요? 재미있는 거 있으면 같이….”
“같이? 이거 진짜 쓰레기 같은 놈 아냐?”
“왜요? 둘이 같이 그냥 사이좋게 오순도순 함께 하자는….”
“더러워! 말 걸지 마! 이 나쁜 자식아―!”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데이트를 이젠 용기 있게 신청해 볼 요량이었다.
“사랑을 한낱 ‘게임’ 정도로 치부하는 놈! 나쁜 놈! 바람둥이! 카사노바! 라푸스틴!”
쿵―!
그렇게 김 실장이 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섰고….
“저 정도면 과몰입 아냐? 그래봤자 2D 그래픽인데….”
하기야, 김 실장은 일에 치여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 가정을 꾸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자녀를 초등학생에 보내기도 했다고 했지.
“쩝, 이렇게 생각하니 또 딱하네.”
그러고는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가족들 선물은 뭐가 좋으려나….”
돈이야 얼마나 들더라도 전혀 상관없었으나 취향 내지는 기호를 아예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전 삶에서 모든 기념일을 돈으로 챙겼던 자신이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렵다, 어려워….”
현승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모니터 화면만 들여다봤다.